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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녕하세요 여러분. 음... 오늘 제가 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 뭐랄까... 신앙에 대한... 그런 얘기에요.
성경 구절 중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뭐 이런 말씀.
저랑 로렐이랑 처음으로 성경을 다 읽고 나서, 'Voice of Prophecy'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거든요. 론니 멜라쉔코 목사님이 진행하시는 거였는데, 그때 저희는 그게 그냥 일반적인 기독교 방송인 줄 알았어요.
근데 듣다 보니까 되게 흥미로운 거예요. 그래서 그 방송에서 하는 성경 공부 가이드 같은 걸 신청해서 봤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저희가 생각하는 거랑 거의 비슷했거든요.
근데 마지막 레슨이 좀 충격적이었어요. 달력 역사를 막 분석하더니 토요일이 진짜 안식일이라는 거예요. 일요일 말고. 그리고, 어... 일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막 그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랑 로렐은 그때 기독교에 대해 진짜 초보였으니까, 어... 진짜 완전 깜짝 놀랐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주말에 쉬는 날을 뭐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니? 진짜?
그래서 그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이 누군지 궁금해져서 좀 알아봤거든요. 뭐... 그때는 검색 엔진 같은 게 없을 때라... 어... 좀 힘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교단이더라구요. 전 세계에 신도가 2천만 명 정도 된다고 하던데... 전 세계 기독교인 수에 비하면 진짜 작은 숫자지만, 되게 친절하고 미디어 outreach를 잘하는 걸로 유명하대요.
이런 좀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고 나서, 저랑 로렐은 다음에 뭘 해야 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기독교에 대해서 더 배우고 싶긴 한데, 이제는 '누구의 기독교'를 배워야 할지가 문제가 된 거죠.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더 복잡해지는 거예요. 성경이 무오하다고 믿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더라구요. 어떤 건 진짜 사소한 걸로 싸우기도 하고. 예를 들어서, 제대로 된 세례가 뭐냐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물을 조금 뿌리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물에 잠기는 것만 인정한다 그러고.
윌리엄 블레이크 시인의 시가 생각나더라구요. "네가 보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내 눈에는 가장 큰 적이라. 네 모습 닮은 큰 코 가진 그리스도, 내 모습 닮은 들창코 그리스도라. 네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친구요, 내 그리스도는 소경에게 비유로 말하네. 네 그리스도는 네 세상 사랑하고, 내 그리스도는 네 지옥문 사랑하네." 뭐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기독교인들은 또 성경 번역본에 대해서도 엄청 싸우잖아요. BibleGateway.com이라는 유명한 온라인 사이트에만 영어 번역본이 61개나 있대요. 미국 성서공회에 따르면, 영어 성경 번역본이 총 900개 정도 된다고 하더라구요.
이런 번역본들이 필요한 이유는, 언어가 계속 변하니까 그래요. 우리가 지금 쓰는 영어가 17세기 초에 킹 제임스 버전이 처음 나왔을 때 쓰던 영어랑 다르잖아요.
욥기 36장 32절을 킹 제임스 버전으로 보면, "With clouds he covereth the light; and commandeth it not to shine by the cloud that cometh betwixt" 뭐 이렇게 나오거든요. 근데 현대 영어 New Living Translation으로는 "He fills his hands with lightning bolts and hurls each at its target" 이렇게 번역이 돼요.
학자들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 원본에서 번역할 때 다른 전략을 쓰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의미 대 의미로 번역하고.
이런 선택지가 너무 많으니까, 저랑 로렐은 마치 5센트 동전 하나 들고 사탕 가게에 간 아이들 같았어요. 어... 뭘 골라야 될지 막 고민되는 거죠. 그래도 혼란스럽다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갔어요.
특히 저는 신약성경이랑 양자 물리학 사이의 유사점에 계속 관심을 가졌거든요. 신약성경이 양자 물리학처럼 우주에 대한 심오한 진실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뻔하고, 당연하고, 논리적인 진실 말고, 막... 당황스럽고, 심오하고, 초논리적인 진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진실.
이런 걸 찾으려면, 어... 진리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좀 더 열린 마음, 통찰력, 인내심이 필요하잖아요.
저는 성경을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무시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거든요. 저도 예전에는 그랬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 외경이 빠져 있다고 불만을 가지기도 하고, 어... 저는 이제 외경도 다 읽어봤는데, 빠진 이유가 다 있더라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 구절 번역을 가지고 끝없이 싸우고.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있을 거라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성경 해석이나 번역본에 대해서 계속 싸울 거라는 것도 알고.
그렇다고 제가 막 실망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오히려 신약성경이랑 양자 물리학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확신만 더 커졌죠.
왜냐하면 양자 물리학자들도 양자 물리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엄청 싸우거든요. 정통적인 양자 물리학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하는데, 다른 해석도 진짜 많아요. 그걸 그냥 경쟁하는 교단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다중 세계 해석, 드 브로이-봄 해석, 거래적 해석... 뭐 이런 거.
그러니까 신약성경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다고 해서 그냥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저는 이미 잘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신약성경을 무시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건 기독교 세계관이 겉으로는 이상해 보여도, 어... 사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증거와 일치한다는 걸 제가 이미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증거가 증명은 아니지만, 어... 증명이라는 건 원래 없는 거니까. 양자 물리학도 증명할 수 없고, 앞으로도 절대 못 할 거예요.
사실 아인슈타인도 죽을 때까지 양자 물리학에 대해 회의적이었거든요. "양자 역학은 인상적이지만, 내 안의 목소리가 아직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뭐 이렇게 말했대요.
기독교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가 많고, 회의적인 사람들도 많지만, 기독교 세계관을 평가할 때는 적어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종교처럼 강하게 파헤치되, 열린 마음으로, 편견 없이 봐야 하는 거죠.
만약 기독교 세계관이 제 과학적인 검증을 통과한다면, 경쟁하는 해석의 안개를 뚫고 기독교의 뻔한 진실뿐만 아니라, 필수적이고, 불가해하고, 초논리적인 진실도 분별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건 마치 음악을 듣는 것과 같아요. 저는 베토벤 교향곡 공연을 많이 봤는데, 어떤 공연은 진짜 엉망이었거든요. 그래도 베토벤의 천재성은 항상 빛났어요.
신약성경의 핵심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았죠. 주류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가장 과감한 주장들, 예를 들어서, 예수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고, 우주를 창조하고 생명을 만드신 분이라는 거. 예수가 신약성경에 나오는 말과 행동을 실제로 했고, 예언과 기적을 행했다는 거. 예수가 고대 히브리 예언에서 예언된 메시아라는 거.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거. 예수가 죄 없는 삶을 살았다는 거. 예수가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다시 살아났다는 거. 예수가 하나님과 성령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포함하는 삼위일체의 일부라는 거. 예수를 진심으로 믿으면, 그가 존재한다는 것만 믿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고 당신을 위해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면, 당신이 누구든 과거에 뭘 했든 상관없이 하나님과 영원히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거.
기독교에 대한 저의 수년간의 연구 결과를 다 말하려면 책 한 권을 써야 될 거예요. 그래서 지금부터는 중요한 부분만 좀 얘기해 볼게요.
성경은 그냥 역사 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하잖아요.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이야기를 영원히 담고 있다고 주장하죠.
크게 보면, 성경은 당신과 저, 그리고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우리의 나쁜 행동과 오늘날의 불친절하고, 불공정하고, 파괴된 세상의 근본 원인이 뭔지, 그리고 우리와 지구의 암울하고 밝은 미래가 어떤지 설명한다고 주장해요.
그러면서 성경은 기독교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는데, 그건 바로 직선적인 시간관이에요.
이게 진짜 중요한 거거든요. 다른 종교, 예를 들어서 힌두교나 불교는 순환적인 시간을 믿잖아요. 그리고 놀랍게도, 기독교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과학도 그랬대요.
게다가 다른 종교의 경전은 보통 시간을 초월하거든요. 사람과 사건을 시간 없는 배경에서 묘사하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성경은 사람과 사건에 대한 시간과 장소를 엄청 자세하게 명시해요.
게다가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은 고고학적 증거로도 많이 뒷받침되고 있대요. 히브리어와 셈어 연구 분야의 전문가인 로렌스 미키티우크에 따르면, 2017년 6월 기준으로 과학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53명의 존재와 시대적 배경을 확인했고, 그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해요.
그들의 이름이 성경에 묘사된 기간 동안 쓰여진 비문에 등장하고, 대부분의 경우 확인된 사람의 생존 기간 동안 또는 그에 가까운 시기에 쓰여졌다는 거죠.
성경은 또 미래에 대한 예측도 하거든요. 이런 예언들은 특정 시점에 일어날 특정 사건에 대한 것이 많아요. 그것도 중요한 거죠.
과학에서는 가설이 시험 가능하고 반증 가능할 때만 신뢰할 수 있다고 믿잖아요. 달이 녹색 치즈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건 달에 가서 확인할 수 있으니까 괜찮은 거죠. 근데 복권 당첨되는 꿈을 꿨다고 주장하는 건 시험할 방법이 없으니까 안 되는 거고.
기독교적인 주장을 포함해서 많은 종교적 주장은 독립적으로, 객관적으로 시험하거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합법적인 과학적 가설이 될 수 없어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과학적인 성격이 아니라는 거죠.
이건 과학에도 적용돼요. 다중 우주가 존재한다거나,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거나, 과학 기술이 나쁜 결과보다 좋은 결과를 더 많이 가져온다는 주장은 모두 사실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험하고 반증할 수 없기 때문에 합법적인 과학적 가설이라고 할 수 없어요. 대신에 종교적, 철학적 신념의 범주에 속하는 거죠.
수백 가지의 구약성경 예언 중에는 메시아의 출현을 예언하는 것도 있거든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구약성경은 고통받는 메시아와 승리하는 메시아, 이렇게 두 명의 메시아를 예언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니면, 고통받고 승리하는 한 명의 메시아일 수도 있고.
주류 기독교인들은 후자의 가능성을 믿고, 예수가 그 고통받고 승리하는 메시아라고 믿어요. 사실, 그들은 그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받아야 했고, 미래에 지구에 두 번째로 영구히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요.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메시아 예언은 좀 애매모호해서, 지나고 나서야 설득력 있게 옹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른 예언은 과학적 가설과 비슷하거든요. 시험하고 반증할 수 있죠. 저는 그런 예언에 눈길이 갔어요.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학자들은 이런 예언들이 기원전 470년에서 기원전 735년 사이에 쓰여졌다고 하거든요. 예수님이 태어나기 대략 475년에서 740년 전인 거죠.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너희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혜와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가 그의 앞에서 얼굴을 가리고 멸시를 받았으며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어린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것 같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끌려갔으니... 그는 악을 행하지 않았고 아무도 속이지 않았도다 그러나 그는 범죄자처럼 묻히고 부자의 무덤에 안치되었도다"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휩쓸림 같을 것이요 또 그의 종말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함이 작정되었느니라"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겨 가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뭇 민족들 사이에 심판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런 구약성경 예언들과 제가 여기에 열거하지 않은 다른 예언들은 예수님의 지구에서의 삶에 대한 신약성경 기록과 일치하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예언된 메시아라는 게 증명되는 건 아니죠. 이런 예언에 대한 주류 기독교의 해석이 유일하게 가능한 해석도 아니고요.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복잡한 문제에서는 증명이라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가 어떤 가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선은 그것이 가장 신뢰할 만한 증거와 일치한다는 것뿐이에요.
여기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예수가 예언된 메시아라는 가설은 가장 신뢰할 만한 증거와 일치해요. 그 증거에는 신약성경 기록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뒷받침하는 외부 자료도 포함돼요.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베들레헴의 별이라는 천문학적 사건 때문에 처음부터 저를 매료시켰어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서 얘기하지 않겠지만, 현재 저는 그 주제를 새롭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진행하고 있어요.
저는 또 예수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주장에도 흥미를 느꼈거든요. 천사 가브리엘이 어린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알리잖아요.
마리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 사건은 수세기 전에 이사야가 한 메시아 예언과 일치하거든요. 고대 예언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썼죠.
보라!는 히브리어 단어 hinneh(הנה)의 현대 영어 번역본인데, 종종 보라고 번역되거든요. 19세기 미국 신학자인 앨버트 반스는 "주의를 끌기 위해, 말하려는 것의 중요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고 설명해요. "생생한 묘사와 활발한 담화에서, 특이한 일이 말해지거나 발생했을 때, 또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 사용된다"고도 하고요.
처녀는 히브리어 구절 ha'almah(העלמה)의 영어 번역본이에요. 반스는 almah만으로는 "본래 소녀, 처녀, 미혼 여성,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자를 의미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ha'almah는 그 처녀를 의미하니까, 그 젊은 여성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마리아가 정말 처녀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almah는 젊은 여자나 처녀로도 번역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학자들은 마리아 시대와 문화의 엄격한 도덕성을 고려할 때, 결혼 적령기의 젊은 여자는 거의 확실히 처녀였을 거라고 지적해요.
동정녀 탄생은 많은 사람들에게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우선,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그분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건 분명하잖아요. 만약 그분이 우주 전체를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면, 처녀의 자궁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당연히 할 수 있죠.
둘째, 자연에는 놀랍게도 무성 생식을 할 수 있는 생물이 많다는 걸 저는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물무늬비단뱀, 귀상어, 꿀벌, 염생새우, 코모도왕도마뱀, 심지어 가축화된 칠면조에서도 동정녀 탄생이 일어나거든요.
그 과정을 처녀생식이라고 불러요. 흔한 일이지만, 우리는 아직 그걸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털사 대학교의 유전학자인 워렌 부스는 "우리가 생식 생물학에 대한 연구를 이렇게 많이 한다는 게 놀랍다"면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주변 동물들의 생식 방식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고 말하죠.
포유류에서는 자연적인 동정녀 탄생이 관찰된 적이 없거든요. "임상적으로 정상적인 인간 처녀생식체(즉, 단일 처녀생식 활성화 난자에서 완전히 유래된 건강한 개체)는 과학 문헌에 보고된 적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2004년, 도쿄 대학교의 일본 과학자들이 유전 공학을 통해 최초로 쥐의 동정녀 탄생에 성공했죠. 그들은 기적적인 작은 포유류를 카구야라고 이름 지었어요.
예수님에 대해 뭘 믿든 상관없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거든요. 그게 제가 기독교 세계관을 조사하면서 곧 알게 된 사실이에요.
사실 예수님의 삶에 대한 역사적 증거는 고대 시대의 다른 위대한 인물들보다 더 많거든요. 여기에는 소크라테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알렉산더 대왕이 포함되는데,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들이 존재했다는 걸 의심하지 않죠.
신약성경에 묶여 있는 27개의 편지 외에도, 역사적으로 인증된 18개 정도의 기독교 외부, 비기독교 자료가 있는데, 이 자료들은 모두 기원후 1세기 동안 자신의 시대의 시민적, 종교적 평화를 어지럽히고, 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의 추종자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더 크고, 세계적인 혁명을 일으킨 예수라는 비범한 인물의 존재를 확증해 주고 있어요.
이러한 독립적인 자료 중 하나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저술한 20권 분량의 유대 역사서인 유대 고대사인데, 요세푸스는 예수님의 십자가형 직후에 태어난 유대인 귀족이자 역사가였어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의 신약학자인 바트 어만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자료"라고 말하죠. 어만은 또 "나사렛 예수님이 실제로 살았다는 데 의심을 품는 고대 시대의 진정한 학자(성경 학자, 고전 학자, 역사가)는 거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해요.
많은 학자들(전부는 아니지만)은 요세푸스의 원래 예수님에 대한 언급 중 일부가 나중에 기독교인들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의심하거든요. 하지만 다음 언급은 널리 진본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이때쯤 예수라는 현명한 사람이 있었다... ; 놀라운 일을 하는 사람,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빌라도는 우리 중 지도자들의 제안에 따라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 부족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베스도는 이제 죽었고, 알비누스는 길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판사들의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와 다른 사람들을 그들 앞에 데려왔다..."
피터 셰퍼는 널리 우리 시대의 고대 유대교의 탁월한 학자로 여겨지거든요. 그의 세심하게 연구된 책인 탈무드의 예수에서 셰퍼는 후기 고대 시대의 주요 랍비들이 예수님에 대한 언급을 신중하게 피했다고 설명해요. 그가 만든 신흥 종교에 대한 적대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죠. 그들은 예수님을 가짜이고, 신성모독적인 문제아로 여겼어요.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한 몇 가지는 허위 정보 캠페인처럼 들려요. 셰퍼가 설명하듯이, "랍비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야기에 대한] 강력한 반박 이야기를 작성했는데, 그 이야기는 기독교 메시지의 기초를 흔들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관계로 태어났으며, 창녀와 그녀의 연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윗 가문의 메시아는커녕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었다"는 거죠.
하지만 랍비들과 기독교 혁명에 대해 글을 쓴 다른 고대 비방자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에 동의했거든요. 그건 바로 소란을 피우는 나사렛 예수님은 당신과 나만큼이나 실제 인물이었다는 거죠. 퍼듀 대학교의 로렌스 미키티우크는 "예수님이나 그의 추종자들을 싫어했던 유대인 랍비들은 그가 마술사이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비난했지만, 그들이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말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요.
2015년, 영국 성공회는 예수님에 대한 견해에 대해 성인 2,545명(18세 이상)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어요. 2016년에는 청소년 2,000명(11~18세)을 대상으로 비슷한 연구를 진행했고요. 연구 결과는 충격적이었거든요. "영국 성인의 40%와 청소년의 46%는 예수가 지구에 살았던 실존 인물이라고 믿지 않거나 확신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인류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대한 끔찍한 수준의 무지죠.
저는 불교를 탐구하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하지만 붓다, 즉 시다르타 고타마가 상한 돼지고기나 독성 버섯을 먹고 식중독으로 죽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좀 실망했어요. 깨달은 분이 세상을 떠나는 방법치고는 너무나 비천하고,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 같았거든요.
신약성경과 다른 독립적인 자료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도 비천했죠. 그는 평범한 도둑 두 명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거든요. 하지만 십자가형은 무의미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정반대였죠.
신약성경에 따르면, 빌라도 앞에서의 예수님의 재판은 모든 재판의 어머니였어요. 전 세계가 보고, 영원히 볼 수 있도록,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반란으로 인해 우리 종,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체포, 재판, 유죄 판결, 처형을 나타냈어요.
신약성경은 이렇게 설명하죠. 오직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님만이 그러한 우주적인 정의를 내리고, 우리의 범법 행위와 하나님의 꾸짖음 사이의 끝없는 공방을 완전히 끝낼 권한이 있었어요. 오직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인 예수님만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창조주로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결산할 수 있는 힘이 있었죠.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은 이렇게 말하죠.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요.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우리 종의 범죄 기록은 에덴 동산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하나님은 신속하고 정당한 처벌을 내리셨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니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맙소사!
그 후에 인류는 반란을 확대하기로 했고, 하나님은 다시 한번 신속하고 정당한 처벌을 내리셨죠. 구약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노아의 생애 동안 일어났는데,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거든요.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지구의 동식물 대표만이 하나님의 정당한 형벌의 홍수에서 살아남았죠.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구약성경에 따르면, 인류는 말을 안 듣는 십대처럼 계속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매번 정당한 처벌을 받았어요. 심지어 히브리인들, 즉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도 반역-처벌-참회-용서-반역-처벌-참회의 멈추지 않는 순환을 경험했죠...
생물학을 통해 저는 이미 인간 게놈에 수많은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10만 개의 DNA 조각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 고대 바이러스는 염색체의 중심 부위인 센트로미어에 집중되어 있는데, 센트로미어는 복잡하기 짝이 없죠. 하지만 이제 저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염색체가 고대 바이러스의 DNA에 감염되어 있다면, 아담과 하와의 반항심이라는 또 다른 고대 전염성 바이러스도 물려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 낡은 병원체가 바로 기독교인들이 원죄라고 부르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저와 로렐은 구약성경이 좀 우울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모두 우리의 불법과 반역,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와 징계에 대한 이야기였거든요.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는 것. 앙갚음하는 것: 눈에는 눈. 행복한 결말은 없어요. 설상가상으로 행복한 결말이 있을 가능성도 분명하지 않아요.
구약성경은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우울했거든요. 그것은 사소하고, 논리적이고, 음울한 방식으로 사실인 것처럼 들렸어요. 세상에서, 혹은 우리 안에서, 어떤 것도 변할 거라는 희망이 없었죠.
몇 년 전에 저는 유대교를 탐구하면서 똑같은 침울한 감정을 느꼈거든요. 저는 세상의 수리, 개선 또는 수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인 티쿤 올람(תיקון עולם)에 대해 배웠어요. 티쿤 올람은 분명히 망가진 세상에 맞서 싸우라는 유대교의 고상한 호소였죠.
기독교도 신도들에게 선행을 하라고 권하잖아요. 하지만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미츠보트, 즉 선행을 전 세계적으로 집계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상황을 바로잡고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데 우리에게 더 크게 의존하거든요. 간단히 말해서, 유대교는 우리의 반항적인 종, 즉 세상을 망가뜨린 사람들이 영원히 나쁜 행동을 하면서 계속 망가뜨리고 있는 인간을 엄청나게 신뢰하는 거죠.
유대교는 구약성경에 자연스럽게 뿌리를 둔 세계관인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죠. 하지만 그건 결코 효과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효과가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반항적인 본성이 문제이고, 그건 우리의 DNA에까지 깊숙이 박혀 있으니까요. 당신과 제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나쁜 선택을 할 것이고, 천국과 화해하는 대신 지옥을 불러일으키겠죠.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걸 알고 계시고, 계획을 가지고 계시죠.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인류의 끝없는 재앙적인 반역과 정의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거든요.
하나님은 자신이 공의를 유지하고 우리가 자유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셨죠.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고집 센 창조물과 한 번에, 영원히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셨죠.
그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자신의 현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개적인 희생을 통해서죠.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시죠.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이유거든요. 그들은 예수님이 정의와 자유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불완전하고, 만성적으로 미워하고, 반항적인 종이 완벽하고, 사랑이 많고, 공의로운 하나님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았죠.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걸 완전히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제 작고, 논리 중심적인 세계관은 인간이면서 하나님인 예수님과 그의 비천하면서도 천상의 희생적인 죽음의 역설적이고, 초논리적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거든요.
하지만 제가 마침내 그걸 이해했을 때, 그것은 판도를 바꾸는 일이었어요. 저에게는 그것이 평생의 무신론의 종말의 시작, 그리고 우주와 생명의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에 대한 저의 지적, 영적 탐구의 시작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죠.
예수님의 가장 열렬한 추종자 중 한 명인 사도 바울로 알려진 역사에 따르면, 기독교의 정당성은 예수님에 대한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에 달려 있거든요. 그가 죽음에서 돌아왔느냐, 아니냐는 거죠.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고린도에 있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주장하면서 중요한 질문에 답하죠. 그 편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약 20년 후인 기원후 5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