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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 오늘 무슨 얘기를 좀 해볼까, 으음…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돌멩이 뚜드려 패던 사람들 이야기? 좀 딱딱한가? 뭐, 그래도 한번 들어봐요.
때는 바야흐로 헨리 캐번디시가 런던에서 막 실험을 끝마치려고 할 무렵이었는데, 650km나 떨어진 에든버러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바로 제임스 허턴 아저씨가 돌아가실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죠. 허턴 아저씨한테는 안 좋은 소식이었지만, 과학계에는 희소식이었어요. 왜냐하면 웬 존 플레이페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허턴 아저씨의 그… 좀 난해한 저작들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거든요.
허턴 아저씨는 정말 눈썰미도 좋고 말도 잘하는,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지구의 신비롭고 느린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도 엄청났고요. 문제는, 글을 너무 못 썼다는 거예요. 거의 뭐… 언어 장애 수준? 비유가 좀 심했나? 암튼, 글 한 줄 쓰는 데도 잠이 쏟아질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 했죠.
1795년에 쓴 "지구론 및 증거와 설명"이라는 책에서는 엉뚱하게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과거 지구를 구성했던 물질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세 번째 지구라고 생각되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에휴, 뭔 소린지…
그래도 허턴 아저씨는 혼자 힘으로, 아주 훌륭하게 지질학이라는 학문을 개척했고, 우리가 지구를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어요. 1726년에 부유한 스코틀랜드 가정에서 태어나서 물질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편안하게 연구하면서 지낼 수 있었죠. 원래 의학을 공부했는데 적성에 안 맞아서 농업으로 바꿨대요. 베릭셔에 있는 자기 농장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유유자적하게 살았죠. 그러다가 1768년에 땅이랑 양떼에 질려서 에든버러로 이사를 갔어요. 거기서 염화암모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해서 크게 성공하는 동시에, 여러 과학 연구에도 매진했죠.
당시 에든버러는 지식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중심지였는데, 허턴 아저씨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주 신이 났죠. "굴 클럽"이라는 학회에 들어가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화학자 조지프 블랙, 철학자 데이비드 흄 같은 사람들이랑 밤새도록 토론을 벌였다고 해요.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제임스 와트 같은 유명인사들도 가끔 들렀다고 하니까, 진짜 대단했죠.
그 시대 사람들답게 허턴 아저씨는 광물학부터 형이상학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가졌어요. 화학 약품으로 실험도 하고, 탄광 개발이나 운하 건설 방법도 연구하고, 소금 광산도 조사하고, 유전 메커니즘도 추측하고, 화석도 수집하고, 비나 공기의 조성, 운동 법칙에 대한 이론도 제시하고… 진짜 못 하는 게 없었네, 그쵸?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지질학이었어요.
옛날 옛날, 호기심 많던 그 시절에 사람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질문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산꼭대기에서 왜 조개껍데기나 다른 바다 생물 화석이 발견되느냐는 거죠. 대체 어떻게 그런 데까지 올라갔을까?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수성론자"랑 "화성론자"라는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죠. 수성론자들은 지구상의 모든 것, 심지어 높은 곳에 있는 조개껍데기까지, 해수면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걸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산맥이나 언덕 같은 지형도 지구만큼 오래되었고, 단지 전 지구적인 홍수 때 물에 깎여서 변형된 거라고 생각했죠.
반면에 화성론자들은 화산이나 지진 같은 역동적인 힘이 끊임없이 지구 표면을 변화시키고 있고, 이건 바다랑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주장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던졌죠. "홍수가 안 날 때는 그 물이 다 어디로 갔을까? 알프스 산맥까지 잠길 정도의 물이 있었다면,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걸까?" 화성론자들은 지구가 내부 깊은 곳의 힘과 표면의 힘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조개껍데기가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이유를 시원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어요.
바로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던 중에 허턴 아저씨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거예요. 자기 농지를 보니까, 바위가 깎여서 흙이 되고, 흙 입자는 시냇물이나 강물에 씻겨서 다른 곳에 쌓이잖아요. 이 과정이 지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계속된다면, 지구는 결국 엄청나게 매끄러워질 거라는 걸 깨달은 거죠. 그런데 주변에는 언덕이 엄청 많았거든요. 뭔가 다른 과정, 즉 새로운 언덕과 산을 만들어내는 융기 작용 같은 게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산꼭대기에 있는 바다 생물 화석은 홍수 때 쌓인 게 아니라, 산이랑 같이 솟아오른 거라고 추측한 거예요. 또 지구 내부의 지열이 새로운 암석과 대륙을 만들고, 산맥을 융기시킨다고도 주장했죠. 지질학자들이 이 주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건 무려 200년이 지나서였고, 그제서야 판 구조론을 받아들였으니까, 허턴 아저씨는 진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던 거죠.
허턴 아저씨의 이론은 특히 지구를 형성하는 데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걸 시사했어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요. 정말 혁명적인 아이디어였죠.
1785년에 허턴 아저씨는 자기 생각을 긴 논문으로 써서 에든버러 왕립 학회에서 발표했는데, 거의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대요. 왜냐? 일단 글이 너무 어려웠어요. 허턴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발표를 했다고 하죠. "어떤 경우에는, 형성하는 힘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체 내부에 있다. 왜냐하면, 이 물체가 열에 의해 활성화된 후, 물체의 특유한 물질의 반응을 통해, 맥락을 구성하는 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들은 뭔 소린가 했을 거예요. 친구들은 허턴 아저씨한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고, 더 길게 쓰면 혹시라도 좀 더 명확해질까 기대했죠. 감동적이네, 그쵸?
허턴 아저씨는 그 후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대작을 준비했고, 1795년에 드디어 두 권으로 된 책을 출판했어요. 근데… 책이 너무 재미없었던 거예요! 거의 천 페이지나 되는 분량인데, 아무도 읽으려고 하질 않았죠. 게다가 내용의 절반 가까이가 프랑스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거였어요. 세 번째 권은 너무 지루해서 허턴 아저씨가 죽고 한 세기가 훌쩍 지나서야 출판되었고, 네 번째 권은 아예 출판되지도 못했대요. 허턴 아저씨의 "지구론"은 "가장 안 읽히는 중요한 과학 저서"로 뽑혀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죠. 19세기 최고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조차도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고 혀를 내둘렀으니까요.
다행히 허턴 아저씨에게는 존 플레이페어라는 훌륭한 조력자가 있었어요. 플레이페어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수학 교수이자 허턴 아저씨의 절친이었는데, 글도 아주 잘 쓰고, 오랫동안 허턴 아저씨 옆에서 지낸 덕분에 허턴 아저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부분 알아들었다고 해요. 1802년에 플레이페어는 허턴 아저씨가 죽은 지 5년 만에 "허턴 지구론에 대한 설명"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게 아주 인기를 끌었어요. 지질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상황은 점점 바뀌고 있었죠.
1807년에 런던에서 뜻이 맞는 13명이 코번트가든 광장에 있는 프리메이슨 호텔에 모여서 클럽을 하나 만들었는데, 나중에 "지질 학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어요. 학회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마데이라 와인 한두 잔 마시면서 지질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가비를 비싸게 받아서 아무나 못 오게 했대요. 그래도 금방 회원이 400명까지 늘어났고, 왕립 학회를 능가하는 영국의 최고 과학 단체가 될 기세였죠.
11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회원들이 한 달에 두 번씩 모였는데, 이때쯤 되면 다들 야외로 나가서 지질 조사를 하느라 바빴대요. 돈 벌려고 광물을 찾는 것도 아니고, 학자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돈 많고 시간 많은 신사들이 취미로 하는 거였죠. 1830년에는 회원이 745명까지 늘어났다고 하니, 진짜 대단했죠.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19세기에는 지질학이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았어요. 다른 과학 분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말 특별한 열풍이었죠. 1839년에 로드릭 머치슨이 "실루리아기 체계"라는 엄청 두꺼운 책을 냈는데, 메사암이라는 암석에 대한 연구서였어요. 근데 이게 베스트셀러가 돼버린 거예요! 책 한 권에 8기니나 했는데도 4판까지 나왔다고 하니, 진짜 대단했죠. 물론 읽기는 엄청 힘들었대요. 머치슨을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문학적인 매력은 전혀 없다"고 인정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찰스 라이엘 아저씨가 1841년에 미국 보스턴에서 강연을 했을 때는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바글바글했다고 해요. 심지어 해저의 비등석이나 캄파니아 지역에서 일어난 지진에 대한 설명을 조용히 경청했다고 하니, 진짜 신기하죠?
당시 영국에서는 지식인들이 너도나도 시골에 가서 "돌멩이 뚜드려 패는" 일을 했다고 해요. 그것도 엄청 진지하게. 중절모 쓰고 검은색 정장을 입고… 폼도 엄청 잡았대요. 옥스퍼드 대학교의 윌리엄 버클랜드 목사님만 예외적으로 박사 가운을 입고 야외 활동을 했다고 하네요.
야외 활동은 많은 유명인들을 끌어들였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앞에서 말했던 로드릭 머치슨 아저씨였어요. 젊은 시절에는 말을 타고 여우를 쫓아다니거나, 총으로 새를 쏴서 깃털을 휘날리면서 거의 30년 동안을 보냈대요. 신문 읽고 카드 게임 잘하는 거 말고는 머리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갑자기 돌멩이에 꽂혀서는 지질학계의 거물이 돼버렸으니,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죠.
제임스 파킨슨 박사님도 빼놓을 수 없죠. 초기 사회주의자였고, "피 흘리지 않는 혁명" 같은 선동적인 팜플렛을 많이 썼대요. 1794년에는 조지 3세 국왕이 극장 관람석에 앉아 있을 때 독침을 쏴서 암살하려는 황당한 음모 사건인 "장난감 공기총 계획"에 연루돼서, 추밀원에 끌려가 심문까지 받았다고 해요. 하마터면 쇠고랑 차고 호주로 유배될 뻔했지만,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났죠. 그 후에는 좀 더 얌전하게 살면서 지질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결국 지질 학회의 창립 멤버가 되고 "지난 세계의 유기 유해"라는 중요한 지질학 책을 썼다고 해요. 이 책은 반세기 동안이나 계속 인쇄되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죠? 그리고 파킨슨 박사님은 "떨림 마비"라는 질병을 연구해서 의학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그 병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파킨슨병"이라고 부르는 질병이에요. 아, 그리고 1785년에 복권 당첨돼서 자연사 박물관을 차지한 희한한 기록도 가지고 계시대요!
파킨슨 박사님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당시 지질학계에 있던 사람들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찰스 라이엘 아저씨였어요. 라이엘 아저씨는 허턴 아저씨가 죽은 해에 허턴 아저씨 집에서 113km 떨어진 키너디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부모님은 스코틀랜드 사람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게으르고 술을 좋아한다는 어머니의 생각 때문에 잉글랜드 햄프셔의 뉴포리스트에서 자랐다고 해요. 부유하고 지적인 가정에서 자란 19세기 신사 과학자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죠. 아버지도 찰스였는데, 시인 단테와 선태류(이끼류) 연구의 권위자였다고 해요. 라이엘 아저씨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윌리엄 버클랜드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서 지질학에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대요.
버클랜드 목사님은 괴짜 기질이 있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는데, 훌륭한 업적도 많이 남겼지만, 특이한 성격 때문에 더 유명해진 면도 있어요. 특히 크고 위험한 맹수들을 많이 키우는 걸로 유명했고,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동물을 다 먹어봤다는 소문도 있었죠. 기니피그 구이나 쥐 반죽, 구운 고슴도치, 해삼 볶음 같은 걸 손님들에게 대접하기도 했다는데, 뜰에 사는 평범한 두더지만큼은 맛이 끔찍하다고 질색했대요. 또 똥 화석의 권위자였는데, 똥 화석으로 만든 테이블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죠?
진지한 과학 연구를 할 때도 엉뚱한 방식으로 접근했는데, 어느 날 밤에는 흥분해서 아내를 깨우더니 "세상에, 이 화석 발자국은 거북이 발자국이 분명해!"라고 외쳤다고 해요. 부부는 잠옷 차림으로 부엌으로 달려갔고, 버클랜드 부인은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서 테이블 위에 깔고, 버클랜드 목사님은 집에서 키우던 거북이를 가져왔대요. 거북이를 반죽 위에 던져서 걸어가게 했더니, 버클랜드 목사님이 연구하던 화석 발자국과 완전히 똑같았다고 하네요! 찰스 다윈은 버클랜드를 "광대"라고 불렀지만, 라이엘은 버클랜드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좋아했던 것 같아요. 1824년에는 버클랜드와 함께 스코틀랜드 여행을 다녀온 후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지질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라이엘 아저씨는 시력이 엄청 나빠서 평생 동안 눈을 가늘게 뜨고 다녀서 늘 찡그린 인상이었대요. (나중에는 완전히 실명했다고 하네요.) 또 엉뚱한 버릇이 있었는데, 생각에 잠길 때마다 가구에 말도 안 되는 자세로 기대거나,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몸을 쭉 뻗는 자세를 취하곤 했다고 해요. 심지어 의자에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와서 엉덩이가 거의 바닥에 닿을 때까지도 몰랐다고 하니, 진짜 웃기죠? 라이엘 아저씨는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지질학 교수를 지낸 것 말고는 평생 동안 다른 직업을 갖지 않았어요. 바로 이 시기에 "지질학 원리"라는 책을 썼고, 1831년부터 1833년까지 세 권으로 나누어 출판했어요. 이 책은 여러 면에서 한 세대 전에 허턴 아저씨가 처음 제시했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체계화했죠. (라이엘 아저씨는 허턴 아저씨의 책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플레이페어가 정리한 책을 아주 열심히 읽었다고 해요.)
허턴 아저씨 시대와 라이엘 아저씨 시대 사이에는 지질학계에 새로운 논쟁이 벌어졌어요. 과거의 수성론 대 화성론 논쟁을 대체하면서도 섞여 있었는데, 바로 "격변설"과 "동일과정설"의 대립이었죠. 격변설은 말 그대로 지구가 갑작스럽고 격렬한 사건들, 주로 홍수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이론이었어요. 그래서 격변설과 수성론이 혼동되기도 했죠. 격변설은 특히 버클랜드 목사님처럼 성직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를 과학적인 논의에 포함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죠.
반면에 동일과정설은 지구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났고, 거의 모든 지질학적 변화는 느린 속도로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일어난다고 보는 이론이었어요. 이런 주장을 처음 한 사람은 라이엘 아저씨라기보다는 허턴 아저씨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라이엘 아저씨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라이엘 아저씨가 근대 지질학의 아버지로 여겨지게 된 거죠.
라이엘 아저씨는 지구의 변화는 일관되고 느리며,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라이엘 아저씨와 그의 추종자들은 격변설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혐오하기까지 했어요. 격변설자들은 멸종을 일련의 과정의 일부로 보았는데, 동물이 계속해서 멸종하고 새로운 동물로 대체된다고 생각했죠. 헉슬리는 이런 관점을 "휘스트 게임에서 사람들이 판을 엎고 새로운 패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고 비꼬았어요. 라이엘 아저씨는 "이런 교리보다 게으른 정신을 조장하고 호기심을 약화시키는 것은 없다"고 비난했죠.
라이엘 아저씨도 실수를 꽤 많이 했는데, 산맥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빙하가 변화의 요인이라는 걸 보지 못했어요. 아가시가 주장한 빙하기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구 냉각"이라고 폄하하면서, "가장 오래된 화석층에서 포유류가 발견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죠. 또 동물과 식물이 갑자기 멸종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주요 동물군(포유류, 파충류, 어류 등)이 아주 오래전부터 동시에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는데, 결국 다 틀린 것으로 밝혀졌어요.
하지만 라이엘 아저씨의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지질학 원리"는 라이엘 아저씨 생전에 12판까지 나왔고, 20세기까지도 지질학계의 지침서로 여겨졌죠. 찰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할 때 "지질학 원리" 1판을 가지고 다녔는데, 나중에 "원리의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엘이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더라도, 어느 정도는 그의 눈으로 보게 된다"고 썼을 정도니까요. 다윈은 라이엘을 거의 신처럼 여겼고,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고 하네요. 1980년대에 지질학자들이 멸종에 대한 충돌 이론을 받아들이기 위해 라이엘의 일부 이론을 버려야 했을 때 엄청 괴로워했다는 사실만 봐도 라이엘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한편, 지질학에는 해야 할 분류 작업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순탄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았어요. 처음부터 지질학자들은 암석을 형성 시기에 따라 분류하려고 했지만, 시기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 논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나중에 "데본기 대논쟁"이라고 불리게 되었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애덤 세지윅은 어떤 암석층이 캄브리아기에 속한다고 주장했고, 로드릭 머치슨은 그 암석층이 실루리아기에 속한다고 맞섰던 거예요. 논쟁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고 점점 격렬해졌는데, 머치슨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세지윅을 "저속한 깡패"라고 부르기까지 했대요.
마틴 루드윅은 "데본기 대논쟁"이라는 책에서 이 논쟁을 아주 잘 묘사했는데, 책 제목만 봐도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신사들의 토론 무대", "메사암의 수수께끼 해독" 같은 제목으로 시작해서, "메사암 방어와 공격", "비난과 반박", "악의적인 소문 퍼뜨리기", "웨버의 이단 철회", "촌놈 기 꺾기", "머치슨의 라인란트 전투 개시" 같은 제목이 나오는데, 거의 전쟁 수준이었던 거죠. 논쟁은 1879년에 캄브리아기와 실루리아기 사이에 오르도비스기를 추가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대요.
지질학 초창기에는 영국인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기 때문에, 지질학 용어에 영국 지명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데본기는 당연히 잉글랜드의 데번 주에서 유래했고, 캄브리아기는 로마인들이 웨일스를 부르던 이름에서 유래했고, 오르도비스기와 실루리아기는 고대 웨일스 부족인 오르도비스족과 실루리아족을 떠올리게 하죠. 하지만 지질학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전 세계의 지명이 점점 등장하게 되었어요. 쥐라기는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에 있는 쥐라 산맥과 관련이 있고, 페름기는 러시아 우랄 산맥의 페름 지방을 떠올리게 하고, 백악기는 벨기에 지질학자 J.J. 도말리우스 드알로이가 이름을 지었다고 하네요. 이름도 참 어렵다, 그쵸?
원래 지질 시대는 제1기, 제2기, 제3기, 제4기 이렇게 네 개의 시대로 나뉘었는데, 너무 단순해서 오래가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질학자들은 더 세분화된 새로운 분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죠. 제1기와 제2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제4기는 아직 사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 쓰는 사람도 많다고 해요. 오늘날에는 제3기만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름일 뿐이죠.
라이엘 아저씨는 "원리"에서 공룡 시대 이후를 가리키는 새로운 단위를 사용했는데, 갱신세("최근"), 선신세("비교적 최근"), 중신세("꽤 최근"), 점신세("약간 최근") 같은 이름들이 바로 그것들이었어요.
현재 일반적으로 지질 시대는 선캄브리아대, 고생대("고대 생명"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 중생대("중간 생명"), 신생대("새로운 생명") 이렇게 네 개의 "대"로 나뉘어요. 그리고 이 네 개의 대는 12개에서 20개로 나뉘는데, 이걸 "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계"라고 부르기도 해요. 백악기, 쥐라기, 삼첩기, 실루리아기 같은 이름들은 아마 많이 들어봤을 거예요.
그다음에는 라이엘 아저씨가 말했던 "세"가 나오는데, 갱신세나 중신세 같은 이름들은 가장 최근의 6천 5백만 년 동안만 사용되고요. 마지막으로 "절" 또는 "대"라고 부르는 더 세분화된 분류가 나오는데, 대부분 지명을 따서 이름을 짓기 때문에 읽기가 엄청 힘들어요. 일리노이절, 디모인절, 크로이절, 킴메리지절 같은 이름들이 대표적인데, 하나같이 다 비슷하게 생겼죠? 존 맥피에 따르면 이런 이름이 "수백 개"나 된다고 하니, 지질학을 전공하지 않는 한 앞으로 다시는 들을 일이 없을 거예요. 아마…
더 혼란스러운 건 북미에서 사용하는 "절" 또는 "대"가 유럽에서 사용하는 것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북미의 신시내티절은 유럽의 아시길절과 거의 같고, 약간 이전에 해당하는 카라도크절이 조금 섞여 있다고 하네요.
게다가 교과서마다, 사람마다 부르는 이름도 달라서 어떤 학자는 7개의 대를 주장하고, 어떤 학자는 4개의 대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네요. 어떤 책에서는 제3기와 제4기를 사용하지 않고 길이가 다른 계로 대체해서 하부 제3계, 상부 제3계 같은 식으로 부르기도 하고요. 또 선캄브리아대를 태고대와 원생대라는 두 개의 대로 나누는 경우도 있고, 신생대, 중생대, 고생대를 묶어서 "현생누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어요.
게다가 이 모든 게 시간 단위를 나타내는 것뿐이라는 거예요! 암석 단위를 나타내는 계, 통, 조 같은 것도 따로 있고, "조기", "만기" 같은 시간 구분도 있고, "상부", "하부" 같은 암석층 구분도 있으니,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정말 헷갈리는 일이죠. 하지만 지질학자들에게는 감동적인 일일 수도 있어요. 영국의 리처드 포티는 20세기에 캄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의 경계선을 두고 벌어진 오랜 논쟁에 대해 "어른들이 생명 역사의 아주 짧은 시간 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것을 보았다"고 썼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첨단 기술을 이용해서 연대를 측정할 수 있지만, 19세기 대부분 동안 지질학자들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암석이나 화석을 시대순으로 배열할 수는 있었지만, 그 시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답답했죠. 버클랜드 목사님이 어룡 뼈의 나이를 추측할 때 "1만 또는 1만 이상 곱하기 1만" 년 전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하지만 확실한 연대 측정 방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를 측정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1650년에 아일랜드 교회의 제임스 어셔 대주교는 성경과 다른 역사 자료를 꼼꼼하게 연구한 끝에 "구약 연대기"라는 책에서 지구가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정오에 창조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해요. 나중에 역사가들과 교과서 저자들은 이 날짜를 웃음거리로 삼았죠. (거의 모든 책에서 어셔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은 조금씩 다르다고 하네요. 어떤 책에서는 1650년에 발표했다고 하고, 어떤 책에서는 1654년, 또 어떤 책에서는 1664년에 발표했다고 하고, 지구 시작 날짜를 10월 26일로 기록한 책도 많다고 해요.)
참고로, 어셔의 관점이 19세기까지 과학계를 지배했다는 낡은 신화가 있는데, 많은 책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해요. 마틴 루드윅에 따르면 "자신의 연구가 다른 지질학자들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지질학자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 범위 내에서 시간 척도를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네요.
19세기의 독실한 신자였던 버클랜드 목사님조차도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첫째 날에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쓰여 있지 않고, 단지 "태초에"라고만 쓰여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시작이 "수백만 년 동안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결론은 다들 지구가 엄청 오래되었다는 건 인정했지만, "도대체 얼마나 오래되었을까?"가 문제였던 거죠.
지구 나이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 합리적인 접근법을 제시한 사람은 에드먼드 핼리였어요. 1715년에 핼리는 전 세계 바닷물에 있는 소금의 총량을 매년 증가하는 양으로 나누면 바다의 나이를 알 수 있고, 그걸 통해서 지구의 나이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제안했죠. 그럴듯한 방법이었지만, 바닷물에 소금이 얼마나 있는지, 매년 얼마나 늘어나는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실험은 불가능했대요.
처음으로 과학적인 시도라고 할 만한 걸 한 사람은 프랑스의 뷔퐁 백작 조르주-루이 르클레르였어요. 아주 오래전부터 지구에서 상당한 열이 방출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지만, 방출되는 속도를 측정할 방법이 없었죠. 뷔퐁은 실험 과정에서 구체를 백열 상태로 가열한 다음 식는 동안 손으로 만져서 (아마 처음에는 살짝만) 열 손실률을 추정했다고 해요. 이 실험을 바탕으로 지구의 나이를 7만 5천 년에서 16만 8천 년 사이로 추정했는데, 당연히 엄청 과소평가한 수치였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견해였다고 하네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구의 나이가 최소 수백만 년, 많게는 수천만 년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은 아닐 거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자신의 계산에 따르면 켄트, 서리, 서식스 주를 포함한 잉글랜드 남부 지역인 웨일드 지방을 창조하는 데 3억 666만 2천 4백 년이 걸렸다고 발표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죠. 이 주장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정확한 숫자를 제시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지구 나이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다윈은 책의 세 번째 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죠.
결론은 다윈과 그의 지질학 친구들은 지구가 엄청 오래되었기를 바랐지만, 그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예요.
이 문제를 주목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켈빈 경이었어요. 켈빈 경은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1892년에서야 귀족으로 승진했지만, 저는 관례에 따라 이 이름으로 부르도록 할게요. 독일 과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는 켈빈 경을 "이해력이 뛰어나고 통찰력이 있으며 생각이 활발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앞에서 나는 가끔 멍청하게 느껴진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켈빈 경은 1824년에 벨파스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도 유명한 수학 교수였다고 해요. 켈빈 경은 어릴 때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는데, 10살에 글래스고 대학교에 입학했고, 20대 초반에는 런던과 파리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수학 분야에서 최고상을 받았다고 하네요. 또 틈틈이 음악 클럽을 만들고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에 대한 논문을 10편 넘게 썼는데, 너무 창의적이라서 선배들이 불편해할까 봐 익명으로 발표해야 했다고 하니, 진짜 대단하죠? 22살에 글래스고로 돌아와서 자연 철학 교수가 되었고, 53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대요.
켈빈 경은 83세까지 장수하면서 661편의 논문을 쓰고 69개의 특허를 받아서 엄청 부자가 되었고, 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어요. 냉장 기술 발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방법을 제시했고, 절대 온도 단위를 고안해서 지금까지도 켈빈 온도라고 부르고 있죠. 해저 전신 케이블을 가능하게 한 가압 장치를 발명했고, 항해용 나침반부터 심해 측량기까지 해운과 항해 분야에도 엄청나게 많은 기여를 했대요.
전자기학, 열역학, 빛의 파동 이론 분야에서도 혁명적인 업적을 남겼는데, 옥에 티가 있다면 바로 지구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해내지 못했다는 점이었어요. 켈빈 경은 지구 나이 문제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결국에는 틀린 결론을 내렸던 거죠. 1862년에 "맥밀런"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처음으로 지구 나이를 9천 8백만 년이라고 주장했지만, 신중하게 최소 2천만 년에서 최대 4억 년까지 가능하다고 밝혔어요. 그러면서 "조물주의 창고에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자료가 있다면" 자신의 계산이 틀릴 수도 있다고 인정했지만, 속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켈빈 경의 결론은 점점 더 확고해졌지만, 점점 더 틀려졌어요. 추정치를 계속 낮춰서 최대 4억 년에서 1억 년으로, 다시 5천만 년으로 줄이더니, 1897년에는 2천 4백만 년까지 낮췄다고 하네요. 켈빈 경이 마음대로 숫자를 바꾼 건 아니고, 물리학적으로 태양처럼 거대한 물체가 수천만 년 이상 타오르면서 연료를 고갈시키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양과 행성은 비교적 젊을 거라고 단정했던 거죠.
문제는 거의 모든 화석이 이 결론과 모순된다는 거였어요. 게다가 19세기에 갑자기 엄청나게 많은 화석이 발견되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