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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lating...

아, 그러니까... 흠, 8장, 시작해볼까요? 어... '이유보다 속성' 그리고 '불변성이 진리'라... 좀 철학적인 제목이네요.

일단 지식이라는 건, 있잖아요, 그... 우리 주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주는 정보와 이해잖아요? 근데, 이 지식 추구라는 게, 반드시 진실 추구랑 연결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건 지식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맘대로 하는 거지, 뭐. 그러니까, 진실이라는 건 다른 정보들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그런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진실은 추상화라는 개념이랑 딱 맞는다는 거예요. 왜냐면 추상화는 하위 개념들을 포함하는 더 높은 수준의 범주인데, 오직 그 범주만이 변화에 끄떡없거든요. 예를 들어, 세상에 있는 강아지 품종 절반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쳐봐요. 그래도 '강아지'라는 범주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잖아요? 반대로, 1000가지 새로운 강아지 품종이 생겨나도 마찬가지고요. 개념적으로 관련된 세부 사항들의 집합이 존재하는 한, 더 높은 수준의 구조는 계속 유지되는 거죠. 추상화는 그 안에 속한 세부 사항들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는 거예요.

이걸 생각해보면, 물리적인 추상화도 똑같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더 높은 수준에서 존재하는 물질의 형태는 항상 더 낮은 수준의 내부 세부 사항보다 오래 지속되거든요. 근데, 중요한 건 이게 복잡한 시스템에만 해당된다는 거예요. 단순한 시스템은 아니고요. 자동차 변속기에서 기어 하나를 빼버리면 (이건 단순한 시스템이죠), 변속 레버가 작동을 멈추잖아요. 하지만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높은 수준의 물리적 추상화는 시스템의 "변속 레버"에 해당하는 여러 구성의 결과거든요. 이걸 예전에 봤던 '다중 실현 가능성'의 엔트로피적 결과라고 할 수 있죠.

우리가 관찰하는 창발적인 구조와 행동은 달성될 수 있는 가장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불변하는 거죠. 만약 우리가 관찰하는 것들이 몇 개의 잘 정의된 경로 덕분에 가능하다면, 자연 환경의 변덕 속에서 너무 쉽게 망가질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관찰하는 추상화 수준이 높을수록, 더 불변한다는 거죠. 이건 물리적인 추상화뿐만 아니라 정보적인 추상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돼요. 이걸 보면, 무엇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자연이 생존할 수 있는 것만 보존하듯이, 진실은 다른 모든 것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변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부분의 제목이 '불변성이 진리'인 거죠.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 즉 진실과 연결되어야 하는 지식은 내부 세부 사항에 기반해서는 안 돼요. 내부 세부 사항은 정의상 일시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거든요. 하지만 가장 추상적이고 높은 수준의 패턴은 훨씬 더 영구적이고, 따라서 자연과 삶에 대한 진실을 말해주는 거죠.

이걸 통해 우리가 지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개념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돼요. 지식은 계속 축적되는 것이라는 생각은 복잡성 아래에서는 말이 안 된다는 거죠. 지식은 축적되는 것이 아니라 수렴되어야 해요. 이건 현재의 과학 및 공학 패러다임에서 우리가 듣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죠. 우리는 인간의 지식은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항상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배우잖아요. 계속해서 껍질을 벗겨내고,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배우고요. 지식은 경계가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는, 끊임없이 팽창하는 원과 같다고 하죠.

하지만 진실이 불변하다면, 더 깊이 탐구해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드러날 뿐이에요.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의 대부분이 그렇죠. 물론, 심해에서 새롭게 발견된 종은 우리가 전에 본 적 없는 것이고, 의심할 여지 없이 매혹적이죠. 하지만 새로운 생명체는 모든 생명을 지배하는 동일한 몇 가지 과정의 단일 사례일 뿐이에요. 밝혀내야 할 새로운 생명체는 끝없이 존재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지식 성장 대 지식 수렴

대부분의 과학과 공학은 지식을 축적하고 조직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어요. 하지만 지식은 환원주의적인 종류일 때만 성장하거든요. 왜냐하면 환원주의적 지식은 조각과 세부 사항으로 만들어지고, 밝혀내야 할 세부 사항은 항상 더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지적으로 솔직하다면, 그러한 세부 사항은 우리가 측정하고 관찰하고 경험하는 결과와 연결되지 않아요. 환원주의의 근본적인 가정은 조각과 연결이 우리가 관심 있는 현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준다는 것이거든요. 이건 틀렸다는 거예요.

우리가 배우는 내부 조각들은 자연 현상의 구조와 행동에 대한 책임이 없어요. 환원주의자들이 믿는 방식으로는요. 조각과 연결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보는 것을 구분하고 그에 따라 책임을 할당하는 편리한 방법일 뿐이었죠.

저는 창발성이 정보를 처리하여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해왔어요. 더 작은 조각에서 더 큰 조각으로 이어지는 인과 관계 이야기라기보다는, 창발성은 단순히 많은 입력을 더 적은 출력으로 매핑하는 데 필요한 구성을 찾는 것이죠. 이러한 종류의 계산은 모두 자연 문제 내에서 발견되는 중첩된 수준에 도움이 되는 것이고요.

환원주의 외부의 지식과 진실은 불변성에 관한 것이고, 오직 지속되는 것만이 정의상 불변한다는 거죠. 이걸 통해 지식이 성장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지식은 더 많은 정보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패턴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거죠.

이건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 인식론에 가져다주는 주요 변화예요. 내부 세부 사항과 외부 경험 사이의 인과 관계에 의존하는 지식 이론은 옳을 수 없다는 거죠. 현재의 과학 및 공학 패러다임이 지식 이론에 가져다주는 방법, 타당성 및 범위는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과 반대된다는 거예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실로 가득 찬 우주라는 관점에서 지식을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발견할 것이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슬프게도, 이 책의 제목이 무의미해질 테니까요. 오히려 발견이라는 것의 의미를 재정의하는 거죠.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작동시키는 숨겨진 내부 세부 사항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것을 만드는 거예요.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동하는 솔루션을 발견하는 것이죠. 단순한 프락시스, 즉 이론이나 지식의 실제 적용이 아니라, 뭔가를 구축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거죠. 우리의 창의적인 솔루션은 이전의 지식에서 비롯될 수 없고, 스스로 창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지식 수렴은 수천 년 된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실되게 들리는 이유예요. 고대에 발견된 진실은 혼란스러운 삶에서 탄생한 불변하는 추상화였거든요. 그 삶의 내부 세부 사항은 현대인의 삶과는 거의 다르지만, 진실은 여전히 관련성이 있죠. 이건 철학적 진실을 현재 기술과 연결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정보가 자연에서 작동하는 방식의 부정할 수 없는 측면일 뿐이에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정보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고, 인간이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단지 인식론적 편의일 뿐이고요.

이게 우리가 심해나 열대 우림의 덮개 아래에서 새로운 종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러한 종을 볼 때, 그들의 물리적 및 행동 패턴의 가장 진실한 측면은 그다지 놀랍지 않죠. 그들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자연의 솔루션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거든요. 이러한 발견은 항상 동일한 핵심 진실로 돌아갈 거예요.

과학과 공학에서의 발견은 우리가 결코 몰랐던 것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반복해서 보는 동일한 핵심 패턴을 드러내는 것에 더 가깝다는 거죠. 진정한 지식, 즉 자연과 가장 일치하는 지식은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수렴하는 거예요.

설명의 횡포

과학은 설명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삼았어요. 그 임무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것이죠. 과학의 힘은 우리가 관찰하는 것 뒤에 숨겨진 인과 관계를 밝혀내는 능력에 있다고 배우잖아요. 과학은 자연의 비밀을 밝히고 인간 지식의 성장과 기술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거죠.

과학의 목적을 설명에 두는 것은 결함이 있어요. 오늘날 과학에서의 설명은 가치 있는 목표처럼 들리지만, 내부 지식이라는 개념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주로 환원주의적이거든요. 과학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내부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배우잖아요.

설명은 주어진 현상의 출력이 어떻게 생성되는지에 대한 인과 관계 이야기를 제시해요. 원자처럼 비교적 단순한 시스템 (우리의 경험에 비해)을 예로 들면, 물질에서 보는 색상을 전자 전이로 설명할 수 있죠. 전자가 다른 수준에서 전이하면서 특정 주파수의 빛인 광자를 방출하고, 우리 눈은 이러한 주파수를 색상으로 인식한다는 거예요.

하지만 이게 정말 색상일까요? 광자 방출은 의심할 여지 없이 역할을 하지만, 색상은 단순성이 아니라 복잡성 영역에 존재하거든요. 무언가를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눈에 부딪히는 입자를 기본적으로 계산하는 것 이상이라는 거죠. 우리 뇌는 우리가 보는 것을 처리하고 해석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누락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항상 더 많은 환원주의를 설명에 추가할 수 있다고 주장할 거예요. 빛의 물리적 속성 외에도 시각 시스템의 생물학을 분석하고, 색상의 주관적인 해석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학을 추가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색상 인식이 광수용체 세포에 의한 빛 흡수, 망막에 의한 신호 처리, 뇌의 시각 피질이라고 부르는 곳으로의 신호 전송을 포함하여 눈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과정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고요.

하지만 조명 조건, 주변의 다른 색상, 인식의 개인차와 같은 요인은 어떨까요? 모든 사람이 색상을 똑같이 보는지 알 수 없잖아요. 문화적 수준에서까지 영향을 미쳐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한 뚜렷한 연관성과 해석을 제공할 수도 있고요.

색상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을 계속 추가할 수 있지만, 언제쯤 의미가 없어질까요? 원자에 의한 빛 주파수의 방출은 색상의 한 측면이지만, 설명력을 거의 제공하지 않거든요. 생물학적 및 심리적 설명을 추가하는 것은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인 것 같고요.

환원주의적 설명의 문제는 우리가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언제든지 시스템의 일부를 선택하고 고립된 존재를 밝혀낼 수 있죠. 하지만 이 고립된 조각은 우리가 측정하고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거의 되지 못해요. 실제로 어떤 것의 고립은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립된 원인을 믿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고립된 조각이 인식과 인과 관계를 가지고 연결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럴 수 없고요. 우리는 복잡한 체제에서는 조각들이 우리가 인식하는 속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결정론적인 의미로는요. 하지만 이것이 과학계에서 설명을 판매하는 방식이라는 거죠. 이러한 가정된 결정론은 과학에 대한 사회의 인식에 너무 깊이 스며들어 있어 설명이 제공되면 우리가 보는 것과 인과 관계를 가지고 연결된다고 추정하는 거죠.

설명의 핵심적인 오류는 복잡한 현상에 대해서는 테스트할 수 없다는 거예요. 반복적인 관찰을 통해 테스트할 수 있는 예측과는 달리, 복잡한 체제에서의 설명은 파괴될 가능성이 매우 낮거든요. 뇌의 특정 영역에서 활동을 측정하여 분노라는 감정을 설명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네, 활동은 실제이고 측정 또한 실제이죠. 측정값을 임의로 정밀하게 조정하여 설명에 정밀도를 높여 추가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것으로 뇌 영역과 경험 사이의 연결이 더 실제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거든요. 환원주의적 발견과 인간 경험 사이의 실제 연결은 대부분 허구라는 거죠.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가정된 인과 관계에 기반하고 있고요. 우리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자연이 기능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자연은 하위 수준의 것에서 인과 관계를 사용하여 상위 수준의 것을 만들어내지 않거든요.

더 복잡한 설명보다는 간단한 설명을 찾아보라고 권장하는 문제 해결 원칙인 오컴의 면도날을 생각해 보세요. 간단한 설명을 사용하는 요점은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거나 더 간단한 이론이 더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간단한 것은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거든요. 오컴의 면도날은 우리가 무언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살아남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식론적 겸손을 인정하기 때문에 작동하는 거죠.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연에서 어떤 것이 무작위적인 이유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거든요. 생존은 어떤 것의 타당성에 대한 가장 큰 증거라는 거죠. 하지만 복잡한 현상에 대한 설명은 테스트할 수 없기 때문에 오컴의 면도날은 소용없어지는 거죠. 이제 설명은 인위적으로 옹호되고, 만들어지고 있는 발견에 대한 가짜 가정 때문에 살아남거든요. 그것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인과 관계 및 결정론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죠.

이 모든 것이 정당화된 믿음과 의견을 구별하는 방법을 아는 것을 보장하는 인식론적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네, 복잡한 시스템 내부에서 인과 관계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환원주의적 설명을 테스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죠. 하지만 그러한 설명이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반복적인 관찰로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속성과 논리에 근거한 주장에 의존함으로써요.

우리는 복잡한 현상이 준수하는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러한 속성은 창발적이며, 따라서 내부 단계의 추가적이고 결정론적인 집합에 의해 발생하지 않거든요. 이것이 전자 전이를 색상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일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 이유이죠. 색상은 인식 없이는 의미가 없으며, 인식은 복잡한 현상에서 발생하는 것이거든요. 추가적인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또는 심리적 설명은 색상 그림에 추가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추가할 것이 없기 때문이죠.

분명히 말하자면, 이것은 전자 전이 또는 다른 생물학적, 화학적 또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물론 하고 있죠. 하지만 그 역할을 안다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거든요. 앞에서 주장했듯이, 미토콘드리아가 에너지를 생산한다고 말하는 것은 흥미롭지만 의미가 거의 없어요. 이른바 "역할"은 항목이 세포에서 제거되면 완전히 사라지거든요. 역할은 편리한 구분이지, 인과 관계 현실이 아니라는 거죠. 어떤 것이 수많은 다른 역할의 매트릭스에 포함되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역할이라는 단어는 모든 의미를 잃게 돼요.

설명의 횡포는 우리가 내부 지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도록 강요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사회가 고립과 추출을 통해 발견된 단절된 메커니즘만을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죠.

환원주의적 설명의 최악의 위반이 동화 같은 본질이라면, 그것들은 기껏해야 오해의 소지가 있겠죠. 하지만 환원주의적 설명은 우리의 설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의료를 생각해 보세요. 일단 연구가 수행되어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주면, 종종 사회에 통합되거든요. 연구자들은 건강 관련 현상의 일부 측면을 분리하여 그 역할을 확인하겠죠. 그런 다음 이것은 인간의 건강을 달성하기 위한 경로가 되는 거예요. 하지만 고립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진실인 전자 전이에 대한 내부 지식이 색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알려주지 않듯이, 비타민, 미네랄 또는 건강 관련 중재의 역할도 마찬가지인 거죠.

이것이 복잡한 현상에 대한 설명이 환원주의적 설명이 아니라 속성과 논리에 의존해야 하는 이유예요. 하지만 논리만으로는 깨진 패러다임 내에서 사용될 때 답이 될 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논리는 누군가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전제가 그 자체로 유효할 때만 작동하거든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건강에 미치는 비타민 C의 경로를 밝혀냈다고 유효한 주장을 할 수 있지만, 사회가 잘못 가정하고 있는 전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것이 우리의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이 너무 많은 헛소리를 벗어나는 방법이에요. 논리가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실제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발견된 것이 자동으로 우리가 보는 출력과 연결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기본 가정이 문제인 거죠.

하지만 논리가 복잡한 시스템에서 진실로 알려진 속성과 함께 사용된다면, 우리가 관찰하는 현상에 대한 주장을 펼치는 강력한 도구가 되거든요. 불변하는 진실에 기반한 보다 적절한 형태의 지식과 결합된 논리는 실제적인 것에 대해 추론하는 강력한 도구라는 거죠.

속성과 함께하는 논리

논리는 엄격한 타당성 원칙에 따라 수행되거나 평가되는 추론이에요. 논리는 인간이 진술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하여 일반적으로 참된 진술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하죠. 일반적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는 순수한 연역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참된 전제가 얼마나 참될 수 있는지에는 항상 모호한 측면이 있으며, 이는 순수하게 참되고 현실적인 진술이 존재할 가능성을 배제하거든요. 달리 말하면, 극도로 간단한 상황만이 참인 것으로 증명될 수 있으며, 현실은 간단한 상황으로 구성되지 않거든요. 이것이 과학적 증거라는 것이 없는 이유라는 거죠. 논리적 증거는 있어요. 수학적 증거도 있고요. 과학적 증거는 없죠.

이것은 현실 세계 논리적 주장의 강점이 전적으로 전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논리 시스템이 우리의 전제와 결론을 함께 묶을 수 있지만, 전제의 진실만이 주장을 자연에 묶을 수 있거든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전제가 가까울수록,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거죠.

오늘날의 환원주의적 과학은 논리 (느슨하고 간접적으로)를 사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옹호할 거예요. 과학은 실험을 수행하거나 이론을 개발하고, 이는 주장에 사용되는 전제의 진실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행되거든요. 누군가가 인간의 뇌 영역에서 활동을 측정한다면, 이 활동을 사용하여 일부 행동의 원인과 관련된 결론을 추론하는 방법을 추론하겠죠. 예를 들어, fMRI 스캔에서 일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참가자의 전전두피질에서 활동이 증가한 것이 나타날 수 있어요. 연구자들은 전전두피질이 의사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추론하겠죠. 지금까지는 완전히 유효해요. 하지만 이 주장은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각하게 결함 있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는 거죠. 그것은 인간의 의사 결정에 대한 신경학적 근원이 있다고 가정해요 (어떤 식으로든 확립하지 않고). 완전히 구워진 주장에서는 이것이 그들의 전제 중 하나가 될 것이거든요. 하지만 이 전제는 참일 수 없다는 거죠. 복잡한 시스템에는 소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참일 수 없어요. 복잡성은 그 정의상 창발성에 의존하며, 이는 소스 위치나 영역에 따라 기능하지 않거든요. 창발성은 전체론적이고 매우 상호 의존적인 방식으로 도달하는 것이고요. 인간의 뇌가 가장 복잡한 복잡한 시스템의 속성은 영역이나 위치를 사용하여 출력을 생성할 수 없다는 거죠.

인간 의사 결정의 신경학적 근원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은 숨겨진 전제 (암묵적 전제라고도 함)이에요. 이것은 명시적으로 진술되지 않았지만 결론이 유효하려면 참이라고 가정하는 전제라는 거죠. 숨겨진 전제는 눈에 띄지 않고 조사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요. 이것은 잠재적으로 잘못된 추론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복잡한 시스템의 출력을 설명하는 소위 활동 영역의 경우, 이러한 숨겨진 전제는 완전히 거짓이며, 그러한 실험에서 도출된 결론은 가짜라는 거죠.

이것이 오늘날 과학 및 공학 패러다임의 핵심에 있는 부패예요. 환원주의적 전제가 단순한 것을 발견하고 구축하는 데는 완벽하게 잘 작동했지만, 복잡성에 직면해서는 거짓이라는 거죠. 오늘날의 과학과 공학은 논리가 결론을 옹호하는 데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많은 환원주의를 벗어나고 있어요. 오늘날의 대부분의 실험과 이론은 환원주의에 뿌리를 둔 숨겨진 전제가 있는 주장을 실행하고 있거든요.

일반인에게는 그러한 연구가 완벽하게 괜찮아 보일 수 있어요. 심지어 윤리적일 수도 있고요. 뇌 영역 연구가 특정 개인이 이 영역이 손상되었을 때 의사 결정에 어려움을 겪는 방법을 밝혀냈다고 들으면, 다운스트림 치료법이 있을 수 있다고 제안하잖아요. 하지만 이것은 나쁜 과학이 우리의 설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거죠. 개입에 관한 한, 이것은 윤리가 아니라 재앙을 위한 레시피라는 거죠.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논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복잡성을 극도로 오해한 잘못이죠. 논리는 인간 추론에 강력한 아군이지만, 전제만큼만 강하거든요. 전제의 근접성은 자연에 대해 알려진 것에 가까워야 하고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속성이라는 거죠.

이것은 제가 속성이 이유보다 우선한다고 부르는 것으로 귀결돼요. 복잡한 시스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속성의 수는 무한하지 않고 소수에 불과하며, 이러한 몇 가지 속성만이 과학, 공학 및 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하거든요.

속성은 인과적 설명과 대조적으로 가장 잘 정의돼요. 인과적 설명을 생성하려면 주어진 현상이나 사건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출력을 생성하는 근본적인 원인 또는 메커니즘을 식별해야 하거든요. 인과적 설명은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설명하려고 시도하죠. 우리는 원자의 운동 에너지 증가에 대해 논의하여 금속이 가열될 때 팽창하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고, 이는 더 많은 원자 분리로 이어진다는 거죠.

대조적으로, 속성은 객체 또는 현상의 설명적인 측면이에요. 객체가 출력을 생성하는 방법이 아니라 객체가 무엇과 같은지에 대한 답을 주거든요. 우리의 금속 예에서, 금속이 가열될 때 팽창한다는 사실은 금속의 속성 (열팽창)이죠. 여기에는 인과적 메커니즘에 대한 호소가 없어요. 단지 금속이 가열될 때 팽창한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죠.

속성은 자연이 준수하는 제약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속성은 물리적, 화학적 및 생물학적 프로세스가 발생하는 경계를 설정하거든요. 질량과 에너지는 생성되거나 파괴될 수 없고 변환될 수만 있다는 것과 같이 자연에는 많은 속성이 있죠. 외부 힘에 의해 작용하지 않는 한 닫힌 시스템의 총 운동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라던가, 엔트로피는 고립된 시스템에서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를 서로 끌어당긴다는 것, 전자기력은 작은 물질을 결합한다는 것 등등이요. 다른 것들은 유기체가 특성을 전달하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고, 환경에 더 적합한 유기체가 생존하고 번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요. 우리는 생태계가 영양소 순환과 에너지 흐름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빛의 속도에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우리는 재료의 속성이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을 알고 있죠. 우리는 자연의 시스템이 피드백 메커니즘을 통해 평형과 안정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기타 등등.

이전의 속성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 이유이거든요. 단순한 시스템에서 어떻게와 왜는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거죠. 행성이 태양에 가까이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중력의 속성은 우리에게 어떻게와 왜를 모두 알려줄 수 있어요. 하지만 복잡성 아래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우리가 모든 행성이 어떻게 그 위치에 남아 있는지 묻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왜 (중력 때문에)에 답할 수 있지만, (행성을 그 위치에 유지하는 특정 프로세스인) 어떻게를 정확한 의미로 답하기는 어렵거든요. 이것을 더 복잡한 시스템으로 확장하면 어떻게는 완전히 사라진다는 거죠.

우리는 이 책 전체에서 복잡성의 다양한 속성을 보아왔어요. 이것들은 열역학, 정보 이론, 계산 및 진화의 더 넓은 영역에 속하죠. 저는 진화 과정, 즉 변이, 선택 및 반복의 자연 레시피, 엔트로피가 현상의 물리적 및 정보적 측면과 동등하게 연결되는 방식, 자연의 정보 압축 사용, 문제의 중첩된 구조, 유연한 결정론, 다중 실현 가능성, 메타 수준 프로세스가 추상화를 생성하는 방법, 그룹 선택 및 우연한 이유로 생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논의해왔어요.

이것들은 모두 비선형성, 자기 조직화, 적응성, 탄력성, 피드백 루프, 계층 구조, 임계성, 혼돈 및 주기적 역학, 동기화, 상전이, 분기 및 자발적인 패턴 형성 같은 더 기본적인 속성에서 비롯되죠.

이 목록이 광범위해 보일 수 있지만,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제시하는 인과적 설명의 수에 비하면 상당히 적다는 거죠. 환원주의 하에서는 날조될 수 있는 설명의 수에는 제한이 없거든요. 우리는 언제든지 레이어를 벗겨내고, 물질의 일부 (유전자, 영역 등)를 선택한 다음, 표면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것과 연결되는 이야기에 대해 발명할 수 있거든요.

저는 진정으로 엄격한 사물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그로부터 나올 수 있는 모든 의사 결정은 인과적 설명에 의존할 수 없다고 주장해요.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속성을 기반으로 자연을 설명하고 결정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과학적이거든요. 현실 세계 상황과 모든 자연 현상에는 경로와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준수하는 부인할 수 없는 속성이 있는 거죠. 속성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진실이며, 진정한 진실이 살아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논리와 이유가 아닌 속성을 결합하는 프레임워크를 통해서만 우리는 복잡성의 시대 내에서 과학과 공학의 지적으로 정직한 단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죠.

복잡성의 방향

원인에 얽매여 있다면 놓칠 수 있는 자연의 속성은 우리에게 복잡성이 단방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복잡한 것은 갑작스럽고 되돌릴 수 없는 물리적 구조와 행동의 출현을 나타내죠. 우리가 자연에서 보는 속성은 어떤 원인이나 경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통계적 가능성의 환상적으로 복잡한 시스템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거죠. 자연을 자연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조각이 필요하고요. 자연의 해결책은 전체 그룹이 협력하여 전체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기능할 수 없어요. 단순한 시스템에서 각 조각은 전체 기능에 점진적으로 추가되지만, 복잡한 시스템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거든요. 복잡한 시스템은 외부 문제에 대한 답을 계산하는 데 필요한 조각이 제자리에 있을 때 즉시 나타나죠.

복잡성 하에서 결정론적 경로가 완전히 없다는 것은 복잡성이 한 방향으로만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우리는 복잡한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구성 요소를 조립할 수 없고, 복잡성은 사후에 발생해야 한다는 거죠. 이것은 설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개념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거예요.

복잡성의 이러한 단방향성은 디자인이 창발성이 올바르게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여 복잡한 것을 구축하는 것을 방해할 것임을 보장하거든요. 이것이 문학 구조를 사용하는 글쓰기가 지루한 콘텐츠를 생성하는 이유이죠. 이것이 어떤 결과를 설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전자 변화를 도입하는 것이 부작용 없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이고요. 이것이 "정밀 의학"이 모순어법인 이유이고요. 이것이 과감한 사회 공학이 결국 잔학 행위로 이어지는 이유라는 거죠. 복잡성 하에서 좋은 디자인은 어려움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의 문제라는 거예요.

입력에 대한 변경 사항을 도입하면 정의상 출력에 광범위한 변경 사항이 발생하겠죠. 이러한 변경 사항 중 몇 가지는 바람직하다는 것이 입증될 수 있겠죠. 두통이 사라지거나 옥수수밭이 번성하거나 아기가 푸른 눈을 가질 수 있고요. 이것은 원인이 확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한쪽 끝에서 크랭크를 돌리는 것이 다른 쪽 끝에서 재현 가능한 변경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거든요. DDT는 모기 개체수를 통제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먹이 사슬을 파괴하고, 계란 껍질을 얇게 만들고, 개체수를 파괴하는 데도 능숙했다는 거죠.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자연은 인간이 정의한 허구의 원인에 따라 움직이지 않거든요. 복잡성은 결정론적인 의미에서 입력에서 출력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따라 움직이지 않아요. 복잡한 시스템에 대한 개입은 설계에 기반하고, 설계는 복잡한 시스템이 출력을 생성하는 방식과 정반대되는 전제에 기반하기 때문에 유해한 방식으로 간섭해야 한다는 거죠.

복잡성과 관련된 속성, 즉 삶을 알면, 복잡성과 관련된 보편적인 패턴을 기반으로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거죠. 모든 상황은 더 잘 결정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결정을 허구의 내부 지식 (이유)에 두는 대신, 보편적으로 참된 속성을 기반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거죠. 이것은 특정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시스템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제약 조건과 패턴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거든요.

생존만이 유일한 진정한 검증이다

검증은 항상 설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어요. 디자인이 최종 사용자와 다른 이해 관계자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수많은 프로세스가 발명되었죠. 검증의 요점은 디자인이 해결하려는 문제를 해결하는지 확인하는 것이거든요. 물론, 이 모든 것은 복잡성 하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기계의 인과적 결정론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복잡한 것을 구축할 때 검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의 작업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핵심적인 차이점은 복잡한 솔루션은 의도한 대로 (알려진 프로세스라는 의미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의도는 디자인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라는 거죠. 복잡한 발명품의 내부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에 대한 세부 사항을 알 수 없는데, 환원주의적 의미에서 "내부"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하지만 검증은 중요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자연적으로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을 계산하는 물리적 추상화의 자동 실현을 검증해야 하거든요. 우리는 끝까지 가는 도중에 어떤 형태의 검증 없이 책 전체를 쓸 수 없어요. 시스템에 대한 지식에 부합하는 진행 중인 노력을 검증하지 않고는 다음 딥 러닝 시스템을 엔지니어링할 수 없고요. 이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시스템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재정의라는 거죠.

앞에서 논의했듯이, 이제 중요한 것은 복잡성의 속성이며, 좋은 솔루션과 나쁜 솔루션을 구분하는 것이고요. 이러한 속성이 준수되어야 할 것이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준수"라는 단어에 주의해야 한다는 거죠. 복잡성의 방향을 상기해 보세요. 복잡성 하에서의 검증은 사전에가 아니라 사후에만 작동할 수 있거든요.

무언가가 준수한다는 것은 규칙, 표준 또는 법률을 준수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현재의 과학 및 공학 패러다임에서는 이것이 복잡성과 반대 방향으로 발생하죠. 사용되는 규칙, 표준 또는 법률은 처음에 설정되고, 우리의 작업은 그에 부합할 것으로 예상되거든요. 복잡성에서는 그러한 적합성이 반대 방향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거죠. 규칙, 표준 및 법률은 시행 착오 및 경험적 방법의 사용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로만 사용되어야 하거든요.

이것은 우리의 창조물의 내부에 있는 구조가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것에 관한 것이죠. 적합성의 규칙, 표준 및 법률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예상하는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고요. 이유 대신 속성이 복잡성 하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거죠. 속성은 우리 창조물의 내부 세부 사항의 유기적인 흐름과 도착에 개입하지 않거든요.

이것은 속성을 범주적으로 메타적으로 만들죠. 복잡성의 속성을 예로 들어보세요. 자기 조직화요. 이것은 외부 개입 없이 개체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 참조적이거든요. 자기 조직화는 시스템이 지침과 방향에 대해 스스로를 참조할 수 있도록 하는 자체 유지 피드백 루프를 활용하거든요. 서로 다른 기본 구조가 동일한 결과 또는 행동을 생성하는 다중 실현 가능성은 어떻고요? 여기에는 시스템이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대체 "경로"를 찾아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중복성이 있거든요. 다시 말하지만, 시스템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변경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외부 개입은 없어요. 시스템이 스스로 조정할 수 있도록 많은 입력을 적은 출력으로 매핑하는 내장된 용량이 있을 뿐이죠.

설계와 달리 복잡한 것을 구축하는 것은 적합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구조가 진정으로 복잡하다는 징후를 보일 때까지 더 많은 조치를 취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거죠. 우리 창조물의 구조가 특정 방식으로 보일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창발적 구조가 나타나는지에 관계없이 복잡성의 징후를 보이는지 확인하는 것에 관한 것이고요.

모든 것의 궁극적인 검증은 생존이라는 거죠. 글쓰기에서 우리의 작품은 우리의 직관과 감정에서 살아남는 것만이어야 하고요. 상황이 옳다고 느껴지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겠죠. 직관적인 종결이 있을 때 완료된 것으로 간주하고요. 직관을 따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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