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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있잖아요, 오늘 제가 진짜 흥미로운 얘기를 좀 해볼까 해요. 음... 효율성 떨어진 준비, 그러니까 뭔가 비효율적인 준비가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얘긴데요.
보통 늦게 피는 사람들, 그러니까 늦깎이들은 막 계획적으로 성공을 막 준비하고 그러진 않잖아요. 대부분 뭘 목표로 하는지도 잘 모르고, 그냥 이것저것 막 시도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겪는 경우가 많죠. 처음엔 잘 안 되니까 다시 해보고, 아이디어를 다시 실험해보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한테 맞는 걸 찾아내는 거죠. 이게 뭐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잖아요, 솔직히.
한 서른 중반쯤 돼서야 인생에서 뭘 하고 싶은지 깨닫거나, 마흔다섯 살에 처음으로 성공적인 사업을 시작하거나, 쉰 살 넘어서 직업을 바꾸거나, 아니면 은퇴하고 나서야 시간, 돈, 용기를 내서 진짜 하고 싶은 걸 하는 사람들 보면, 왠지 시간 낭비 같고 기회를 놓친 것 같기도 하죠.
근데 희한하게도, 이 불확실하고 비효율적인 길이 늦깎이들한테는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경험이랑 이해를 주기도 해요.
이걸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스파게티 마시멜로 챌린지'라는 유명한 실험인데요. 톰 우젝이라는 심리학자이자 디자인 사상가가 엄청 많이 해본 실험이래요. 목표는 간단해요. 스파게티 면으로 탑을 쌓아서 마시멜로 무게를 지탱하는 거죠.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요? MBA 졸업생이나 기업 임원들이 이 실험에서 진짜 못한다는 거예요. 오히려 유치원생들이 훨씬 잘한대요. 이유가 뭐냐면, 경영대학원 졸업생들이나 임원들은 너무 계획을 짠다는 거죠. 팀을 만들고, 리더를 뽑고, 아이디어를 막 토론하고, '정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효율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애들은 그런 거 없잖아요. 그냥 막 쌓아요. 경영인들이랑 다르게, 애들은 여러 번 시제품을 만들어보고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결국 성공적인 탑을 쌓아 올리는 거죠. 예상하시겠지만, 건축가나 엔지니어들이 제일 잘한대요. 아, CEO들도 잘하는데, 비서가 옆에 있어야 된대요. 그, 왜 있잖아요, 적절한 사람들이 업무 과정을 관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뭐 그런 거죠.
늦깎이들은 종종 경영인들보다는 유치원생이나 엔지니어처럼 생각하고 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될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거죠. 오늘은 이리저리 방황하는 게 어떻게 보면 효과적인 커리어 경로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거예요. 비효율적인 준비는 크게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느린 발전'이랑 '소명 찾기'예요. 정치, 사업, 음악 분야의 예를 통해서 늦깎이들이 항상 늦거나, 방해받거나, 붙잡혀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요. 많은 사람들이 실용적인 이유, 운, 혹은 성격 때문에 비효율적인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일찍 시작하지 못했다고 해서 나중에 성공하지 못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아, 맞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인터뷰에서 코미디언 제리 사인펠트가 비효율성을 칭찬한 적이 있어요. 사인펠트는 진짜 유명한 시트콤 "사인펠드"를 쓰고 주연도 맡았잖아요.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대요.
"사인펠드는 작가실 없이 래리 데이비드와 함께 썼는데, 번아웃 때문에 중단한 이유도 있었죠. 더 지속 가능한 방법은 없었나요? 맥킨지 같은 곳에서 더 나은 모델을 찾도록 도와줄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사인펠트가 이렇게 대답했대요.
"맥킨지가 뭔데요?"
"컨설팅 회사입니다."
"거기 사람들 웃겨요?"
"아니요."
"그럼 필요 없어요. 효율적이라면 잘못된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올바른 방법은 어려운 방법입니다. 이 쇼가 성공한 이유는 제가 모든 단어, 모든 대사, 모든 테이크, 모든 편집, 모든 캐스팅을 직접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방식입니다."
"효율적이라면 잘못된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거 진짜 늦깎이들의 모토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 천천히 발전하는 데는 분명히 장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전설적인 재즈 기타리스트 Django Reinhardt는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거든요. 악보도 못 읽었대요. 모든 걸 어렵게 배웠죠. 근데 그 덕분에 엄청난 창의성을 가지게 된 거예요. 독학으로 음악을 배운 창의적인 음악가들이 많대요. 재즈랑 클래식 기타를 둘 다 마스터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Jack Cecchini도 언론인 David Epstein에게 독학의 고통스러운 방법이 배우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대요.
제리 사인펠트랑 Jack Cecchini가 깨달은 건 뭐냐면, 쉽게 배우는 건 잘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명한 전투기 조종사, "붉은 남작"으로 알려진 Manfred von Richthofen은 원래 기병 장교였대요. 처음에는 비행 훈련생으로서 진짜 엉망이었대요. 처음 조종간을 잡았을 때 추락했을 정도였다니까요. 타고난 쇼맨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전술가이자 사격 솜씨가 아주 좋았대요. 전쟁 중에 적 항공기 80대를 격추시켰대요. 늦깎이에게는 힘들게 느껴지는 것, 혹은 외부 관찰자에게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것이 오히려 최고의 발전 방법일 수도 있다는 거죠.
경제학자 David Galenson은 늦깎이 예술가와 작가들에게서 이러한 비효율적인 발전을 확인했대요. Galenson은 경력 후반기에 정점을 찍는 '실험적인 예술가'랑 30세 이전에 정점을 찍는 경향이 있는 '개념적인 예술가'를 대비시켰어요. 개념적인 예술가들은 체계적이고, 일찍부터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작품에 대한 자세한 계획을 세우죠. 첫 번째 원칙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반면에 실험적인 예술가들은 행동을 통해서 배우죠. 그들의 작품은 연구인 거예요. 각 작품은 테스트이자 발견인 거죠. 각 그림을 완성된 실행이나 완전한 작품 시리즈의 일부로 보는 대신에, 실험적인 예술가들은 각 그림을 결과를 제공하는 실험으로 보는 거죠. 이 결과들은 축적되고 미래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테스트되고 고려되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실험적인 예술가들은 점차적으로 비전이랑 기술을 축적해 나가는 거죠. 나중에 나올 내용이지만, 이런 아이디어가 예술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늦깎이 사업가 Ray Kroc의 삶에도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줄 거예요.
비효율적인 준비는 끈기가 필요해요.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나중에 우리는 마가렛 대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건데요. 그녀는 어머니이자 주부이자 변호사였고, 국회의원 후보이기도 했잖아요. 가끔 롤러 스케이트를 타고 집 안을 돌아다니는 기분이라고 했고, 여자가 권력을 포기하는 게 남자보다 쉽다고 말했대요. 왜냐하면 "집을 봄맞이 청소하면서 시간을 채울 수 있으니까"요. 건축가로서 늦깎이였던 미켈란젤로는 마지막 10년 동안 에너지가 너무 넘쳐서 촛불을 꽂을 수 있는 모자를 만들어서 밤늦게까지 조각을 했대요.
경제학자 Tyler Cowen이랑 벤처 자본가 Daniel Gross는 최근에 쓴 책에서 재능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 끈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어요. 그들은 심리학적인 개념인 투지랑 성실성을 옹호하는 대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친다고 지적했죠. 벤처 자본가나 투자자들이 스타트업을 지원할지 결정할 때 보는 자질이 바로 에너지래요. 심리학자 Angela Dworkin이 대중화시킨 투지는 열정이랑 인내를 강조하지만, 중요한 건 인내라는 거죠.
David Epstein은 "Range"라는 책에서 이것이 교육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줬어요.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시험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단기적인 패턴 학습은 마모율이 높은 반면에, 개념이랑 시스템을 진짜 이해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노력하는 것은 지속적인 학습을 만들어낸대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하는 것과 모든 게 제자리에 착착 들어맞을 때까지 끈기 있게 노력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잖아요. 두 번째 종류의 학습은 더욱 창의적이고 개별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거죠.
금융 전문가 John Paulson은 2007년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헤지 펀드 매니저"로 묘사되었고, "다양한 인수합병의 결과에 베팅하는 탄탄하고 지루한 헤지 펀드를 운영한다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대요. 그는 나중에 끈기를 통해서 방황하고 배우면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트레이더 중 한 명이 되었죠.
Paulson은 성공으로 가는 길을 오랫동안 빙빙 돌았어요. 대학교 때는 방향도 없었고, 남미에 가서 Bloomingdale's에 셔츠를 팔기 시작했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돌아와서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합류했대요. 28살쯤 되었을 때 컨설팅에 좌절감을 느껴서 금융으로 바꿨죠. Bear Stearns에서 몇 년 만에 이사까지 올랐지만,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싫었고, 자기 투자를 하고 싶어서 회사를 나와서 더 작은 회사에 합류했대요. 그것도 오래가지 못해서 휴식을 취하면서 즐겼대요. 그러다가 자기 헤지 펀드를 시작했죠. 기분 변화가 심했고, 실적도 별로 없었고, 사람을 채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대요. 경력 내내 최고 성적을 받았고 빠르게 승진했지만, 그가 원했던 큰 성공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죠. 1996년, 41세에 그의 회사는 1,600만 달러의 자산을 관리했는데, "헤지 펀드 세계에서는 진짜 작은 규모"였대요. 그는 정착했어요. 파티도 그만두고, 결혼도 하고, 건강하게 먹었죠. 부동산 붐을 놓친 것에 대해서 좌절감을 느끼면서 인수합병 업무에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고 느꼈고, 동창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성공하는 걸 지켜봤대요. 하지만 그가 더 진지해지면서 회사는 30억 달러로 성장했는데, 여전히 작지만 주목받기 시작했대요.
그러다가 Paulson은 또 다른 늦깎이, Paolo Pellegrini를 고용했대요. Pellegrini는 두 번이나 해고당했고, 이혼했고, 순자산도 없었대요. 금융 세계에서는 엄청나게 실패한 사람이었죠. Paulson과 함께 일하면서 Pellegrini는 모기지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대요. 그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집착하면서 데이터를 연구했고, 모든 각도를 처음부터 꼼꼼하게 조사했대요. 사람들은 그가 가까운 거리로 가는 데도 지름길을 택하지 않을 거라고 농담했대요. 우리가 봤듯이, 때로는 비효율적인 게 더 좋을 수도 있고, Pellegrini는 "모든 걸 스스로 하고 바퀴를 다시 발명하는 게 더 흥미롭다"고 말했대요. 제리 사인펠트랑 래리 데이비드가 사인펠드를 쓴 것처럼, Pellegrini가 답을 얻기 위해서 연구를 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철저하게 하는 것뿐이었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친 짓처럼 보였지만, 효과가 있었던 거죠. Pellegrini는 주택 가격이 하락하면 복잡한 대출이랑 신용 스왑이 붕괴될 거라고 예상했대요. 과거 금리 데이터를 조사한 결과 주택 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래서 그와 Paulson은 시장에 반대하는 베팅을 했어요. Paulson의 회사는 그 거래로 150억 달러를 벌었는데, 아마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투자 포지션일 거예요.
늦깎이들은 항상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소명 의식이나 직업 의식을 가지고 있대요. 제리 사인펠트랑 Django Reinhardt의 비효율적인 발전은 창의적인 충동에 의해서 추진되었죠. Katharine Graham은 무슨 일이 있어도 뉴스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요. 소명 의식이나 직업 의식은 구체적인 목표보다 더 큰 동기가 될 수 있대요. 그냥 하고 싶어서, 코미디나 음악을 좋아해서, 정치 뉴스가 흥미로워서, 아니면 그냥 뭔가를 이해하고 싶어서 뭔가를 하기를 원하는 것은 종종 목표를 발견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해요.
심리학자 Jane Sturges랑 Catherine Bailey에 따르면, 사람들이 소명에 도달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대요. Sturges랑 Bailey는 잠재된 소명이랑 잃어버린 소명을 구별했대요. 잠재된 소명은 삶의 상황이 변할 때 뒤늦게 발견되는 소명이래요. 잃어버린 소명은 어렸을 때 발견했다가 인생이 바빠지면서 중년에 잃어버리는 직업 의식이래요.
잠재된 소명은 삶의 맥락이 바뀌어서 소명이 더 유효하게 느껴질 때 발견된대요. 늦깎이 화가 Grandma Moses랑 Bill Traylor는 잠재된 소명을 가진 사람들의 예시죠. Moses는 70대 후반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Traylor는 8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대요. 둘 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죠. Moses는 12살 때부터 일을 했고, 많은 자녀를 낳았고 (그중 몇 명은 죽었고), 평생 농장에서 일을 해야 했대요. Traylor는 노예로 태어나서 소작농이 되었고요. Moses의 경우에는 은퇴, Traylor의 경우에는 노숙 생활이 그들이 합법적으로 재능을 추구할 수 있는 맥락이었대요. 그 전에는 그렇게 하는 게 불가능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았죠. (Moses의 이야기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인생 초반에 소명을 추구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만, Moses나 Traylor 같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대요. 그들의 소명은 나중에 발견되었을 뿐인 거죠. 이런 일은 어느 나이에도 일어날 수 있대요. Mother Teresa는 수녀원에서 나와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는 소명을 수녀로 20년 동안 지낸 후에 느꼈대요. Madonna Buder는 48세에 운동 훈련을 시작해서 80대에 아이언맨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한 수녀래요. Ray Moon은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담배랑 술을 많이 마셨대요. 70대가 되어서 친구의 설득으로 보디빌딩을 시작했고, 호주에서 여러 대회에서 우승했대요. Mae Laborde는 90대에 텔레비전 배우가 되었대요. 그녀는 은행 창구 직원과 백화점 직원으로 일했고, 텔레비전 스타 Lawrence Welk를 위해서 일했었대요. 은퇴 후에야 소명을 찾은 거죠. 잠재된 소명을 가지는 데는 큰 이점이 있대요. Sturges랑 Bailey는 은퇴 후에 시간과 돈이 있을 때 자신의 관심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보여줬대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찍 소명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린대요. 직업, 특히 창의적이거나 예술적인 직업에 들어가려면 시간과 돈이 필요한데, 사람들은 그럴 수 없거나 그럴 의향이 없죠. 반복되는 실패는 돈을 벌고 경력을 쌓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잖아요. 종종 소명을 포기하고 직업을 구하는 것이 더 실용적일 때가 많죠.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중요한 네트워크, 동료, 멘토가 없을 수도 있고요.
Sturges랑 Bailey는 인생 초반에 소명을 포기하고 덜 직업적인 경력을 추구한 32명의 음악가를 인터뷰했대요. 그들 모두 2~3살 때부터 음악에 대한 반응을 보였고, 음악이 자신의 삶에 필수적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고 보고했대요. 10대나 20대 쯤에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포기했대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대요. 낮은 임금과 직업 불안정과 같은 열악한 근무 조건, 필요한 수준의 재능이나 성격이 없다는 믿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척이나 기회 부족으로 인한 낙담감이었대요.
Sturges랑 Bailey는 잃어버린 소명으로 돌아가는 세 가지 경로가 있다고 설명했대요. 수용, 출현, 연기. 소명의 수용은 직업과 함께 취미로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대요. 출현하는 소명은 처음에는 약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강해지는 소명이래요. 연기된 소명은 중년에 잃어버렸다가 완전히 재발견해야 하는 소명이래요. 소명을 포기한 사람들, 혹은 그렇게 강하게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은 종종 새로운 활력으로 돌아온대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나중에 가장 헌신적인 학습자이자 실천가가 될 수도 있대요.
소명을 수용한 음악가들, 그러니까 음악을 취미로 유지한 사람들은 음악 연습을 계속했지만, 전문 음악가만큼 헌신하지는 않았대요. 그들은 자신의 관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연습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무 시간을 바꾸거나 직장을 옮기기도 했대요. 음악 없이 사는 건 상상할 수 없었대요. 덕분에 은퇴 후 음악으로 전환하기가 더 쉬워졌대요. 일이 줄어들면서 음악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리는 식으로요.
소명을 연기한 음악가들, 그러니까 음악 없이 수년, 때로는 수십 년을 보낸 사람들은 음악을 삶에 끼워 넣을 수 없었대요. 그들 중 한 명은 "나는 내 일에 매우 관심이 많았고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고 말했대요. 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좌절감을 느꼈고 비참함까지 느꼈대요. 한 명은 팔다리를 잃은 것 같다고 비유했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자신이 내린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대요. 하지만 은퇴 후에 어떤 영감이 떠올라서, 예를 들어서 교회를 지나가다가 합창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음악을 다시 시작했고, 어떤 경우에는 새로운 악기를 배우기도 했대요.
초기 소명이 약했지만 삶 전체를 통해서 강해진 출현하는 소명을 가진 사람들은 어렸을 때 음악을 더 쉽게 포기할 수 있었대요. 이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성취를 이뤘고 아마추어 상태로 돌아가는 건 덜 매력적이었대요.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음악으로 돌아왔는데, 장례식에 참석해서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과 같은 위기나 변화의 순간을 통해서, 혹은 은퇴 후에 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래요. 놀랍게도, 이 그룹이 가장 광범위하게 공부할 가능성이 높았대요. 대학원 학위를 공부하고 오케스트라를 만들었죠. 소명의 출현적인 재발견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가졌대요.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듯이, "어렸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면의 음악가에게 도달했다"고요. 이전의 성취에서 소명이 나타난 거죠.
Sturges랑 Bailey의 연구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돌아온 방법에 관계없이 직업이 아닌 취미로 유지한 것이 관심을 높였대요. 꾸준한 음악 직업의 지루함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을 연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대신에, 그들의 관심은 삶에서 주변적인 역할 덕분에 생생하게 유지되었죠. "사람들은 열정을 직업으로 삼지 말고 취미로 유지하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더 만족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좋은 조언이었을 겁니다." 아마추어는 더 많은 자율성을 가지고, 천천히 발전할 수 있는 더 많은 공간을 가지고 있어요. 그들은 방황하죠.
여기서 잠시 멈춰서 "소명"에 대한 문헌의 메타 연구를 주목할 가치가 있대요. 소명의 내재적인 동기를 가지는 것은 웰빙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매우 강한 소명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과로와 관련된 스트레스를 경험하기도 한대요. 물론 소명에 따라서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은 때때로 불협화음의 불행한 영향을 경험할 거예요. 도덕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소명을 너무 강하게 믿어서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실망하기 쉽대요. 메타 연구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거의 없었고, 대신 소명을 가지는 것이 웰빙을 증가시키고 종종 크게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대요. 하지만 저자들이 검토한 연구는 대부분 양적 연구였고, 검토하지 않은 질적 연구는 종종 동물원 관리자나 동물 보호소 직원과 같이 더 극단적인 맥락에 기반을 두고 있었대요. 그 사람들은 달성할 수 없는 도덕적인 소명을 가지고 있어서 실망할 가능성이 더 높죠.
늦깎이들은 종종 재능의 초기 징후를 보이지만, 발견된 직업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대요. 우리는 어렸을 때 인생에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잖아요. 심리학자 Bryan J. Dik이랑 Ryan D. Duffy는 소명이 인생 초반에 부인할 수 없거나 초월적인 느낌이 아니라 "직업 내 활동의 목적과 의미,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기여를 평가하는 지속적인 과정"일 수 있다고 말했대요. Dik이랑 Duffy의 관점에서 소명은 직업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일을 보는 방식의 결과래요. 소명 의식을 가지기 위해서 자선단체 직원이나 교사가 될 필요는 없대요. 모든 직업은 자신의 일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보고 소명으로 접근함으로써 소명 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대요.
Chris Gardner는 경험도 없고, 대학 교육도 없고, 당시 금융 경력에 전형적이지 않은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식 중개인이 되었대요. 영감을 주는 순간 때문이 아니라 비효율적인 준비의 긴 여정 덕분에 성공했죠. 그는 다른 여러 직업을 거친 후에야 소명을 찾았대요.
Gardner의 어린 시절은 혼란스러웠고, 젊은 시절은 불확실했대요. 의붓아버지는 폭력적이고 학대적이었죠. 어렸을 때 Gardner는 위탁 가정에서 시간을 보냈대요. 종종 고립되고, 위축되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헌신적이고 집중적이고 강했대요. 어머니로부터 자립심을 배웠죠. 어머니는 기병대가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그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대요. 삼촌으로부터 해군에 입대하라는 영감을 받았고, 나이가 되자마자 입대했대요. 해군에서 Gardner는 의료 전문가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Gardner를 자신의 연구실에 고용한 외과의사와 연결되었죠. 그는 의사가 될 생각이었대요.
하지만 의료계의 변화로 인해서 어려운 선택이 되었대요. Gardner가 외과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10년의 훈련이 필요했고 외과의사들의 수입은 감소할 예정이었대요. 그는 또한 자신의 자격보다 실질적인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에 지루해했죠. "내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공식적으로 하기 전에 10년 더 자격을 갖춰야 했다." 26살에 그는 의료 훈련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대요. 당시 그의 결혼 생활은 끝나가고 있었고, "열렬한 상태" 때문에 결근하고 코카인을 복용하는 등 다른 사람과 강렬한 관계를 시작했대요. Chris Gardner는 아직 성공의 길에 들어서지 못했죠. 하지만 아버지가 되었대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이 Gardner에게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도록 영감을 주었고, 그를 알지 못했었죠. 그리고 새로운 파트너와의 다툼으로 인해서 그의 낮은 급여를 받는 실험실 업무보다 가족을 더 잘 부양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대요. 그는 의료 장비를 판매해서 수입을 두 배로 늘렸죠.
아버지를 만난 것이 Gardner가 "아버지 없는 설움"이라고 부르는 것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는 새로운 회사의 최고 연봉자 8만 달러를 버는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하면서 사업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되었대요. 그는 힘든 교훈을 배웠죠. "최고의 영업사원은 그렇게 태어난다." Gardner는 잘하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면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대요. 어느 날 영업 전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회사의 주차장을 돌고 있는 페라리를 봤대요. Gardner는 운전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그가 주식 중개인으로서 한 달에 8만 달러를 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대요. 그는 소명을 찾은 거죠. 이 깨달음이 너무 강렬해서 처음으로 Miles Davis의 음악을 들었을 때와 비교했대요.
Gardner는 27살이었어요. 그의 상황은 당시 주식 중개인의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죠. 학위도 없고, 인맥도 없고, 경험도 없었죠. 그리고 흑인이었고요. 하지만 그는 이 새로운 소명에 너무 헌신적이어서 결국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주식 중개인들과 회의를 하다가 주차 위반 딱지 미납으로 감옥에 갇혔대요. 마침내 그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사람을 찾았을 때 Gardner는 영업 직을 그만두었지만, 중개 회사에 출근해서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해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대요. 그는 결국 새로운 직업을 얻지 못했죠. 이제 그는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잡역부였어요. 다툼 후에 그의 파트너는 아들을 데리고 떠났고, 미납 주차 딱지 때문에 감옥에 있는 동안 아들을 데리고 면접을 보러 가야 했죠. 하지만 그것이 기회를 망치는 대신에 면접을 보는 사람이 자신의 세 번의 이혼 이야기를 하게 되었대요. Gardner는 일자리를 얻었죠. 이 훈련 프로그램의 적은 급여는 Gardner가 친구랑 지인들과 번갈아 가면서 지내야 했고, 결국 여관에서 방을 얻어야 했다는 것을 의미했대요. 그는 나중에 이것이 가장 큰 어려움에 대한 준비라고 생각하게 되었대요. 그의 파트너가 아들을 데리고 돌아온 후에 아들과 함께 노숙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준비였죠.
Gardner의 상황은 그의 성공에 큰 장애물이었지만, 소명을 찾은 후에 필요한 준비를 제공해줬대요. 그는 성공적인 주식 중개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백만 달러 규모의 회사를 설립했대요.
어머니가 가르쳐준 자립심은 주식 중개인으로 훈련하는 데 필요한 결단력을 주었대요. 노숙자이자 싱글 부모인 동안에도 Gardner는 하루에 200통의 전화를 걸었고, 회사의 최고의 중개인이었죠. 그가 실험실에서 일했을 때 해군에서 많은 의료 경험을 쌓았지만 학위가 없어서 명문대 출신의 백인 남성 의대생들의 편견에 시달렸대요. 하지만 기관을 운영하는 의사는 Gardner가 책임자라고 분명히 했대요. 자신의 연구실을 운영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었고, 그는 "자신의 멘토가 자신을 통제하는 입장에 놓았을 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의 우월한 태도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배웠대요. 이것은 어머니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을 강화했죠. "아무도 너의 정당성을 빼앗아갈 수 없고 네가 스스로 주장하지 않으면 너에게 정당성을 줄 수도 없다." 이것은 Gardner에게 경영이랑 인재 발굴에 대해서 가르쳐줬고, 사업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죠. 나중의 경력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리더가 되는 방법에 대한 견습 과정이었대요. 그가 의료 센터에서 일하면서 부상당한 선원들의 인종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운 것은 나중에 최고 연봉을 받는 고객의 학대적인 농담을 견딜 수 있었을 때 효과를 발휘했대요.
Gardner는 늦깎이의 핵심 자질을 많이 보여줬는데, 나중에 살펴볼 거예요. 운은 그의 삶에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큰 역할을 했지만, 그는 그 기회를 자신의 이점으로 바꿀 수 있었고, 그의 성격이 행운을 만들어내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대요. 이건 나중에 자세히 알아볼 거구요. 그가 해군에 입대하고, 실험실에서 일하고, 의료 훈련을 그만두고, 주식 중개 회사에 합류했을 때 Gardner는 주변 환경을 바꿨죠. 그는 자신을 새롭고 유익한 영향력하에 두었어요. 나중에 자신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살펴볼 거에요. 그리고 Audrey Sutherland의 이야기에서 이런 종류의 지속적인 변화를 다시 보게 될 거예요. Gardner처럼 Sutherland도 더 큰 목표를 위해서 지금 당장 뭔가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믿었죠. 무엇보다도 그는 요양원, 해군 의료 센터, 연구실, 영업직에서 일하면서 "지식이 없는 상태로 직업에 뛰어들어도"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대요. 나중에 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우리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다시 초보자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울 수 있대요. Chris Gardner는 여러 번 진로를 바꾸면서 학습자가 되는 가치를 일찍 깨달았죠. 그는 늦게 소명을 찾았지만, 비효율적인 준비 기간 덕분에 늦깎이 주식 중개인이 될 수 있었죠.
비효율적인 준비는 느린 발전을 통해서 소명을 찾고 성공을 달성하는 것을 포함한대요. 일련의 실패를 통해서 배우고, 잃어버린 소명을 재발견하거나 재참여하거나, 다양한 관심을 새로운 기회로 결합하는 것을 포함할 수 있죠. 소설가 Penelope Fitzgerald의 삶은 직업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비효율적인 준비의 모든 요소를 보여준대요.
Penelope Fitzgerald는 20세기의 위대한 소설을 썼대요. 70대에 쓴 그녀의 마지막 소설은 미국에서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했죠. 생전에는 다소 소외되었지만, 2000년에 사망한 이후로 그녀의 명성은 높아졌고, 20세기의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대요. Philip Hensher는 2001년에 "지난 25년 동안의 모든 소설가 중에서 그녀가 위대함을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대요. Fitzgerald는 신동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대요. 그녀는 작가로 구성된 까다롭고 지적인 가정 출신이었고, 어머니와 같은 옥스퍼드 칼리지를 다녔죠. 졸업할 때 글을 쓰기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대요. 그녀의 첫 책이 21세가 아닌 58세에 나왔다는 사실은 그녀의 삶의 큰 미스터리래요. 왜 그렇게 늦게 시작했을까요?
일반적인 대답은 남편 Desmond 때문이래요. Desmond는 술을 마시고, 경력에 실패하고, 채권자들이 쫓아다니는 불안정한 삶을 살아서 Fitzgerald는 글을 쓸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었대요. 어린 시절의 기대도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죠.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에 첫 책을 쓰기 시작했고, 남편이 죽어갈 때 두 번째 책을 썼대요. 비평가들은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 Times Literary Supplement에 대한 익명의 리뷰, Desmond의 아일랜드 근위대 역사에 대한 그녀의 기여, 그리고 그들이 함께 운영한 문학 잡지를 초기 시작의 예로 지적하죠. 그녀는 어린 시절에 두 편의 단편 소설을 썼고, 1950년대에 어머니가 되었을 때 두 편의 단편 소설을 썼대요. 그녀는 1951년에 남편의 이름으로 단편 소설을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고요. 가장 최근의 비평 연구에서는 Desmond가 그녀를 붙잡았고, 이 초기 작품이 그녀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하죠.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삶에 대한 많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래요. Fitzgerald는 좌절한 신동이 아니었대요. 그녀는 늦깎이였죠.
Fitzgerald는 "나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도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대요. 비평가들은 그러한 진술을 거짓 겸손으로 생각하죠. 그녀의 불안정한 삶 때문에 그녀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대요.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태어난 여성의 대표적인 예시이고, 성별 때문에 붙잡혔죠. 하지만 TLS에 익명의 리뷰를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재 소설가가 되지 않잖아요. 이것은 그녀의 삶을 거꾸로 보는 거죠. 그녀의 삶의 변동뿐만 아니라 Fitzgerald 자신에 대한 무언가가 그녀의 늦음을 설명해야 한대요. 어려운 결혼 생활과 교사 직업만으로 잠재적인 천재를 벙어리 무명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위험이 있대요. 물론 삶이 그녀를 영원히 좌절시킬 것처럼 보였던 때도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Fitzgerald의 이야기가 매우 중요하대요. 재능이 번성하지 못한 긴 미완성 역사가 있대요.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에 Fitzgerald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BBC에서 일했대요. 그녀는 글을 쓸 자료가 부족하지 않았죠. 이것은 그녀가 63세에 쓴 네 번째 책 "Human Voices"의 기반이 되었대요. 전쟁 후에 Desmond는 외상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밤에 비명을 질렀대요. Penelope는 유산을 했고 아기는 출산 직후에 사망했죠. 그녀의 전기 작가 Hermione Lee는 Fitzgerald의 작품에서 "긴장의 징후가 있었다"고 말했대요.
이 기간에 대한 의문은 이러한 어려움이 없었다면 그녀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지 여부래요. 그녀는 대본, 영화 리뷰, 과학 및 어린이 프로그램, Woman's Hour 특별 프로그램을 쓰고 있었대요. Fitzgerald 부부는 문학 잡지의 편집을 맡았고요. 그녀는 또한 검은색 벽과 도자기로 집을 멋지게 장식했는데, 그중 일부는 그녀가 직접 만든 것이었대요. 그녀는 햄스테드에서 도자기 수업을 듣고 그림 연습을 하고 있었죠. 그녀는 지식이 많고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대요. 이 기간에 창의적인 시간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래요. Desmond만 탓해서는 안 되죠. Fitzgerald는 "아무도 완전히 잘못한 사람은 없다"고 말했대요. 그가 죽은 후에 그녀는 친구에게 "사실 저는 버릇이 없었어요. 모든 기복 속에서 Desmond는 제가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항상 생각했거든요."라고 편지를 썼대요. 그녀는 1998년에 Guardian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