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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lating...

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 헤라클레이토스의 법칙, 뭐랄까,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서의 확률의 한계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볼까 해요.

사실 인간을 포함한 지각 있는 존재들은 예측 기계라고 할 수 있잖아요. 우리 생존 자체가 예측에 달려있으니까요. 먹이를 찾아 나설지, 싸울지, 아니면 도망칠지 결정하는 모든 게 미지의 것을 계산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는 거죠. 숫자가 없어도, 고도의 논리가 없어도, 심지어 통계 전문가가 없어도 동물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추측을 해요. 우리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삶의 모든 경험은 뇌 속에 있는 분홍빛 회색 컴퓨터가 처리하는 신경학적 데이터가 되는 거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신경망이 미세하게 조정되고요. 그렇게 세상을 헤쳐나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이 예측 기계는 불안정한 세상, 그러니까 아주 작은 모래알 하나가 엄청난 연쇄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할까요? 예전부터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왔죠. 많은 고대 문명이나 현대 문명은 전지전능한 신의 개입을 믿었고요. 사제나 예언자는 신의 지혜를 얻거나, 신을 설득해서 의로운 자를 돕고 악한 자를 벌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미래를 이해하거나 예측하는 건 인간의 역할이 아니었던 거죠. 그런 세계관에서는 불확실성이 세상의 특징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결함이었던 거예요. 신은 항상 모든 걸 알고, 확률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인간은 신의 지혜를 빌려서 신비로운 세계를 살짝 엿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죠. 예를 들어, 고대 중국에서는 주역이 점술 기계처럼 사용되었고, 산가지를 이용해서 더 깊고 견고한 진실을 알아내려고 했고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측정이나 데이터를 이용해서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신에 대한 오만함, 신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불경스러운 시도로 여겨졌어요.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수천 년 동안 불확실성이나 위험을 정확하게 측정하거나 수치화하려는 체계적인 시도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그게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 세계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엄청나게 정교한 생각을 했으면서도, 확률론의 기초적인 수학조차 발전시키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몰라요. 좀 신기하죠?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박 게임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발굽이 있는 동물의 발목뼈나 무릎뼈(아스트라갈리라고 불렀대요)는 기원전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리스에서 주사위의 전신으로 사용됐다고 해요. 그러니까 확률에 대해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위한 체계적인 논리를 만들지는 못했던 거죠. 비슷한 도박 게임은 역사적으로 다른 문화권에도 존재했고요. 예를 들어, 주사위를 뜻하는 아랍어 '알-자흐르'에서 위험을 뜻하는 현대 영어 단어 'hazard'가 나왔고, 스페인어 'azar'는 "우연" 또는 "무작위성"을 의미하죠. 즉, 수학은 게임보다 뒤쳐졌던 거예요.

그러다가 1156년, 이탈리아 해상 공화국 제노바의 공증인 계약에서 라틴어 단어 'resicum'이 처음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우리의 단어 'risk'가 탄생하게 되죠. 지중해를 횡단하는 위험한 해상 여정에서 발생하는 전리품을 비례적으로 분배하는 데 사용되었어요. 이런 여정은 보통 큰 부를 가져다주지만, 때로는 파멸로 이어지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위험을 수치화하려면, 논리적이고 정확한 방법으로 측정하려면 수학자들이 필요했죠. 그런데 처음부터, 위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부분적으로 결함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즉 미래의 확률을 도출하려면 그저 "대부분의 경우에 일어나는 일"을 계산하면 된다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과거가 미래를 위한 믿을 만한 지침이라는 가정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엄청난 실수가 될 수 있죠.)

확률 이론은 훨씬 나중에 발전하게 되었어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우연히 발생한 역사적 사건 때문이었죠. 로마 숫자와 그리스 숫자는 수학적으로 조작하기가 너무 불편했거든요. (MMXXIII에서 MDCCCXLIII을 빠르게 빼보세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아라비아 숫자는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숫자가 공식 문서에서 위조하기 너무 쉽다고 걱정했기 때문에 더 빨리 전 세계적으로 퍼지지 못했죠. 예를 들어, 숫자 1은 쉽게 4나 7로 바뀔 수 있었으니까요. (작가 피터 번스타인은 이 때문에 많은 유럽인들이 여전히 7을 쓸 때 위쪽 줄에 두 번째 줄을 긋는다고 설명해요.) 아라비아 숫자는 인쇄술의 발달로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깃펜으로는 위조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유럽에서 확률 이론의 발전은 위조 문서에 대한 과민 반응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지연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초기 확률 이론의 획기적인 발전은 도박 게임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특히, 1654년에 블레즈 파스칼과 피에르 드 페르마는 이른바 '중단된 게임'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죠. 두 사람이 게임을 시작했지만, 어떤 이유로든 한 사람이 이기기 전에 게임을 중단해야 하는 경우였어요. 파스칼과 페르마 이전에는, 누가 수학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가장 높은지에 따라서 상금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가 명확하지 않았거든요. 그 난제를 해결하면서, 그들은 제롤라모 카르다노, 슈발리에 드 메레, 야코프 베르누이,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라플라스의 악마), 토마스 베이즈 (베이즈 추론 또는 베이즈 통계 개발)와 같은 거장들의 지원을 받아 확률 분야의 급속한 발전을 이끌어냈죠.

수학적 도구가 발전하면서,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계산할 수 있게 되었어요. 곧, 유럽 상류 사회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세는 열풍이 불었죠. 아이작 뉴턴이 수학적 물리학을 발전시키면서, 세상이 수량화 가능한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자, 사상가들은 숫자와 방정식을 이용해서 인간 사회의 미스터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전망에 매료되었고요. 1662년, 존 그랜트는 런던의 사망률에 대한 획기적인 양적 평가를 발표하면서 인구 통계학 분야를 탄생시켰죠. 1800년대 초중반, 프랑스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실증주의라는 영향력 있는 사고방식과 합리적인 의사 결정에 대한 새로운 양적 접근 방식에서 크게 파생된 사회학 분야를 탄생시켰고요. 벨기에의 천문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통계학자인 아돌프 케틀레는 세고 수량화하는 데 몰두한 초기 사회 과학을 발전시켰어요. 이 시기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불확실성에서 확실성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급진적인 새로운 사고의 시대였죠.

하지만 18세기, 스코틀랜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확률이 확실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경고하면서, 그의 유명한 "귀납의 문제"를 명확히 밝혔죠. 흄의 경고는 적절했어요. 인과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과거에 일어난 일에 근거해서, 경험에만 기반을 두고 있으니까요.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거죠. 혹은, 그가 더 매력적으로 표현했듯이, "확률은 우리가 경험한 대상과 경험하지 못한 대상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추정에 근거한다"는 거죠. 확률은 유용할 수 있지만, 미래가 과거의 패턴과 다를 수도 있고, 만약 그렇다면 우리를 완전히 속일 수도 있는 거예요. (곧 알게 되겠지만, 흄은 옳았죠.)

오늘날 확률 이론은 정교하고 수익성이 좋은 수학 분야가 되었어요. 수백만 명이 확률적 예측 분야에 종사하고 있고, 수십억 명이 그러한 예측을 이용해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더 나은 판단과 정보에 입각한 평가를 내리고 있죠. 점점 더 많은 것들이 수량화되고, 환원주의적 회귀 분석, 더 똑똑한 알고리즘, 정교한 머신 러닝 모델의 블랙박스에 투입되고 있어요.

우리는 발목뼈를 던지던 시대에서 아주 멀리 왔죠. 오늘날 우리는 더 신뢰할 수 있는 예언자, 즉 과학과 통계에 의존하고 있고, 산가지는 경험적 증거와 방대한 데이터 세트로 대체되었죠. 이러한 엄청난 변화는 엄청난 인간 잠재력을 열어주었지만,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불확실성의 달인이 될 수 있다는 인간 능력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좀 지나쳤어요. 우리는 너무 자주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한 과신 때문에 우리는 우연, 혼돈, 그리고 우발적인 변수를 무시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는 더 깔끔한 세상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놀라운 성공의 인지적 희생자이기 때문이죠. 과학자들은 현대의 마법사가 되었고, 유전자를 편집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를 발견하고, 심지어 소행성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니까요. 그러한 획기적인 발견은 우리에게 이해할 만하지만 잘못된 감각, 즉 세상의 대부분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느낌을 주었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지식이 그저 성가신 미지의 것들을 청소하는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믿고 있고, 그건 곧 만족스럽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암에 대한 치료법은 없지만 곧 가능할 것이고, 화성에 사람은 없지만 곧 있을 것이라고요. 현대 과학의 겉보기에 모든 것을 아는 듯한 모습은 우리에게 우발성과 혼돈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전히 불확실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죠. 우주의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미스터리 중 일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이기도 해요. 그것들은 절대적인 불확실성의 안개 속에 가려져 있고, 우리는 그냥 모르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론 조사에서 경제 예측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모델의 예측에 시달리고 있어요. 이것들은 마치 우리가 세상을 길들인 것처럼, 일종의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세상을 예측하고, 통제하고,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임의적이고 신비로운 힘이 우리 삶에서 작은 역할을 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지겠죠.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세상의 동화 같은 버전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거죠. 반대로, 만약 당신이 가장 크고 중요한 미스터리 중 많은 것들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우연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여지가 더 많아지는 거고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안개의 장막을 무시하고, 우리가 보고 측정할 수 있는 것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죠.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의식이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1994년부터, 가장 까다로운 과제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라고 불려왔는데, 현대 철학의 거장인 데이비드 차머스가 만든 용어죠. 인간은 오랫동안 이른바 '심신 문제', 즉 우리가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뇌의 물리적, 화학적 구조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당황해왔죠. 만약 우리가 폐와 간이 그저 화학 물질을 함유한 조직과 세포의 덩어리라고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왜 뇌는 달라야 할까요? 하지만 차머스는 더 심오한 것을 강조했죠. 작가 올리버 버크먼이 그 난제를 요약했듯이, "어떻게 당신 두개골 안에 있는 1.4킬로그램의 촉촉하고 분홍빛 베이지색 조직 덩어리가 그 분홍빛 베이지색 덩어리, 그리고 그것이 붙어 있는 몸의 경험처럼 신비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고, 우리는 아무런 단서도 가지고 있지 않죠.

게다가, 우주의 기본 법칙도 있죠. 1874년, 16세에 막 대학교에 입학한 독일의 천재는 그의 학문적 멘토에게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죠. 이론 물리학은 신경 쓰지 말라고 멘토는 조언했어요.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이미 발견되었고, 남은 것은 몇 개의 구멍을 채우는 것뿐이다." 다행히 학생, 즉 젊은 막스 플랑크는 그 조언을 무시하고 그 구멍을 채우기로 결심했죠. 1918년, 그는 양자 물리학의 새로운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는데, 이 이론은 우리가 우주의 방식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뒤엎었죠.

가장 작은 수준에서, 물질은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행동해요. 양자 실험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작은 입자가 한 번에 두 곳에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는데, 이것을 중첩이라고 부르죠. 하지만 우리가 그 입자를 관찰하면, 그것은 단일 위치로 붕괴되는데, 이것은 누군가가 보고 있는지에 따라서 현실이 변한다는 것을 암시하죠. 훨씬 더 혼란스러운 것은, 양자 얽힘에 대한 일부 해석은 엄청난 거리로 분리된 쌍둥이 입자가 한 입자가 측정될 때 즉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거예요. 단순히 빨리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경멸적으로 "원거리에서 일어나는 으스스한 작용"이라고 불렀죠.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할 어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입자의 행동은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세계에서 접하는 그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죠. 최고의 과학자조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 입자들이 어떻게든 완전히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죠. 마치 삶의 또 다른 마법 같은 실에 의해서요.

아마도 가장 기이한 것은, 양자 물리학의 최고 과학자 중 일부가 그 분야의 핵심 방정식, 즉 슈뢰딩거 방정식의 의미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다세계 해석을 믿게 되었다는 거죠. 그 해석은 프린스턴 대학원생 휴 에버렛의 머리에서 나왔는데, 그날 저녁에 "모든 당사자가 엄청난 양의 셰리를 마셨다는 데 동의한다"고 하죠.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그래서 세계는 끊임없이 무한한 수의 우주로 분기된다고 해요. 그 이론은 당신의 무한한 복사본이 존재하고,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무한한 우주도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죠. 그것은 너무 많은 LSD를 복용한 후 펜을 든 1960년대 SF 작가의 몽상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양자 역학을 지배하는 확고하게 검증된 방정식에 대한 가장 간단한 수학적 해석 중 하나이기도 해요. 그리고 매우 똑똑하고, 매우 뛰어난 물리학자 중 일부는 다세계 해석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는 거죠. 다른 우주에 있는 당신의 셀 수 없이 많은 대안 버전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꽤 중요한 미해결 질문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아무도 우리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죠. 그리고 진화 생물학자 잭 블라운트가 내게 말했듯이, 아마도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몰라요. "저는 적어도 인간이 두 발로 걷는 사회적 유인원을 번식할 만큼 오래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 진화한 뇌를 사용해서 우주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어요."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불확실하게 보일 세상에 살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질문은 우리가 적어도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거죠.

2016년, 이코노미스트는 국제통화기금(IMF)의 15년간의 경제 예측을 분석했는데, 189개국을 대상으로 했죠. 그 기간 동안, 한 국가가 220번이나 경기 침체에 진입했는데, 이는 수백만 명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경제 침체였죠. IMF는 1년에 두 번, 4월과 10월에 예측을 발표하는데, 1년의 실제 데이터의 절반을 본 후에 발표하죠. 이 예측은 얼마나 자주 경기 침체의 시작을 정확하게 예측할까요? 우리의 최고 두뇌는 얼마나 자주 맞힐까요?

220건의 경우 중에서, 4월 예측에 대한 답은 0번이었어요. 0번. 이 예측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죠. 이미 경고 신호가 섞인 6개월의 실제 데이터를 가지고 작업한 10월 예측은 약 절반 정도만 맞혔고요. IMF 예측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짐바브웨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국가가 매년 4%의 평탄한 속도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정적 모델과 비교했을 때 약간 더 나은 정도였죠. 물리학에서는 이론의 예측이 아주 조금만 벗어나도 버려지거든요. 하지만 우리 자신을 연구할 때, 우리는 때로는 "내년에 그 경제가 위축될 것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조차 한 번도 맞힌 적이 없는 이론으로 작업하고 있다는 거죠. 반면에, 2004년에 인간은 우주선을 발사해서 시속 84,000마일로 이동하는 폭 2.5마일의 혜성에 부드럽게 착륙하기까지 10년 동안 여행했죠. 모든 계산은 완벽해야 했고, 실제로 완벽했어요. 반대로, 태국의 경제가 다음 6개월 동안 성장할지 위축될지, 아니면 영국의 인플레이션이 3년 후 5% 이상일지 확실하게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죠.

이것은 사회 과학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에요. 결국 저는 (환멸을 느낀) 사회 과학자니까요. 하지만 모든 사회 과학자들은 우리 최고 두뇌조차 우리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밀을 알고 있는데, 우리는 그 비밀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 이것은 특히 드물고, 반복할 수 없고, 우발적인 사건에 해당되는데, 이러한 사건은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건인 경우가 많죠. 우리의 얽힌 사회는 피드백 루프와 티핑 포인트,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연과 혼돈, 사고와 변수에 의해서 흔들리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스터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니까요.

20세기 초, 프랭크 나이트라는 경제학자는 일련의 단순한 가정에 의존한 기존의 경제적 지혜에 도전을 했죠. 나이트는 그의 용어로 불확실성과 위험 사이의 차이점을 설득력 있게 밝혔어요. (여기서 위험은 변동성과 관련이 있고, 나쁜 일이 일어날 위험과는 관련이 없어요.) 나이트는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결과가 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 정확한 확률은 알려져 있고 안정적일 때 위험, 즉 더 관리하기 쉬운 위험이 발생한다고 주장했어요.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그것이 어떻게 또는 왜 일어나는지는 알고 있다는 거죠. 예를 들어, 6면 주사위를 던지는 것은 불확실성보다는 위험의 문제예요. 우리는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각 숫자가 위에 나타날 확률이 6분의 1이라는 것을 알고 있죠. 위험은 길들일 수 있는 거죠.

반면에, 불확실성은 미래의 결과가 알려지지 않았고,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본 메커니즘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심지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을 의미하는 거죠.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을 평가할 방법도 없어요. 우리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있는 거죠. 이러한 공식에 따르면, IMF는 경기 침체의 시작을 예측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해결 가능한 위험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예측은 실패하는 거고요.

나이트의 불확실성과 위험 사이의 이분법은 유용하죠. 재앙적인 판단 오류를 피하려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데, 어떤 영역은 단순히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점술의 낡은 미신이 아니라, 때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확률의 위안에 의존해왔죠. 대부분의 경우, 확률은 적절하게 적용되고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림으로써 위험을 헤쳐나가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확률로 무장한 채 알 수 없고 불확실한 영역으로 뛰어든다면, 불쾌하고 잠재적으로 재앙적인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 거죠. 길들일 수 없는 혼돈을 길들일 수 있는 우연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영국 은행의 전 총재인 머빈 킹은 최근 인터뷰에서 그것을 잘 표현했죠. "우리는 모두 지능이 높으면 불확실성을 확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어떤 확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라왔어요. 저는 이것이 심각한 실수이고, 좋은 의사 결정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해요." 확률은 위험에 대처하는 훌륭한 도구이고, 그런 종류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죠. 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경우에는, 결함 있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잘못된 확률을 이용해서 알 수 없는 풍경을 헤쳐나가는 것보다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죠.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절망적으로 불확실할 때조차 선택해야 할 때가 있죠. 질문의 세계는 대답해야 할 질문과 그럴 필요가 없는 질문의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는 이것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질문 대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만약 당신이 희귀한 질병에 걸렸다면, 의사들은 그것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 또는 무엇이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지 모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죠.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형태의 암에 대처하는 실행 가능한 옵션이 아니니까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죠.

하지만, 부룬디의 경제 성장이 5년 안에 정확히 3.3%가 될 것이라고 예측해야 한다는 법이나 도덕적 명령은 없죠. 그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정확하고, 틀릴 것이 확실하고, 가짜 확실성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는 거고요.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불필요할 때 어리석은 예측을 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그것이 필요할 때는, 적어도 불확실성의 안개를 인정하고 혼돈의 역동성을 의사 결정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죠. 불행히도, 정반대의 관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지만요. 지적 겸손함을 보상하기보다는, 우리는 너무 자주 (거짓된) 확실성을 자신감과 권력과 잘못 혼동하죠.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항상 확실하지만 자주 틀리는 전략을 따라서 정상에 오르죠.

하지만 만약 확률이 진정한 불확실성의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확률적 추론을 그렇게 자주 오용할까요? 문제는 우리가 그 단 하나의 단어, 즉 확률을 무수히 많은 다른 것을 의미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시작되죠. 그러한 혼란은 일단 누군가가 미래 사건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63.8%의 확률"과 같은 특정 숫자를 제시하면, 그 수량화가 그 사람을 현대의 예언자로 변모시킨 것처럼, 마법처럼 더 정당하거나 진실하게 된 지식을 명령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 심화되죠. (심지어 그 수학이 심각하게 결함 있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을지라도요.) 누군가가 단순히 "나는 ~일 거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명시된 확률에 대해서 논쟁하기가 더 어렵죠. 하지만 그것이 그것을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일까요?

우리는 끊임없이 확률적 진술을 듣죠. 하지만 오늘 비가 올 확률이 80%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하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 답이 분명해 보이는 것 같죠. 그것은 대기 중의 정확히 동일한 초기 물리적 조건이 주어지면, 비가 80%의 시간 동안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까요? (마치 날씨 패턴이 정적인 확률로 주사위를 굴리는 것과 같은 것처럼요.) 아니면 오늘과 비슷한 조건의 100개의 가능한 상상의 세계 중에서, 80개에서는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다른 20개에서는 오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증거가 날씨 모델에서 불확실하지만, 예측자가 비가 올 것이라는 예측에 대해 80%의 신뢰 수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예측이 옳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만약 비가 올 확률이 50% 이상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으면 예측이 틀린 걸까요? 분명히 그것은 옳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80%와 100%는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아니면 예측에 비가 올 확률이 80%라고 말할 때마다, 100번 중에서 80번 비가 오면 예측이 정확한 걸까요? 그 경우, 당신은 수많은 반복된 예측에 걸쳐서만 예측의 정확한 보정을 확인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오늘날의 물리적 조건이 미래의 조건과 비교할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결국, 혼돈 이론이 입증했듯이, 날씨를 만들어내는 물리적 시스템의 작은 변동은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러한 질문은 확률이 날씨 패턴에서 선거와 같은 독특하고 반복 불가능한 사건으로 이동할 때 훨씬 더 어려워지죠. 네이트 실버가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확률이 71.4%(71.3 또는 71.5가 아님)라고 예측했을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컴퓨터 모델에서 선거를 반복해서 실행하면, 클린턴이 71.4%의 시간 동안 승리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좋아요, 하지만 선거는 단 한 번뿐이고, 결과도 하나뿐이며, 아무리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고 할지라도 현실을 반복해서 실행할 수는 없죠. 아니면 선거는 주사위 굴리기와 같지만, 클린턴의 주사위가 6분의 1의 확률이 아니라 71.4%의 시간 동안 승리가 나타나도록 가중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녀가 졌을 때, 71.4% 예측이 틀린 걸까요, 아니면 그저 덜 그럴듯한 결과가 일어난 걸까요?

분명히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죠. 우리가 "Y가 일어날 확률이 X%이다"라고 말할 때, 많은 쓰여지지 않고 말하지 않은 가정이 그 진술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엄청나게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거죠. "공자가 역사 속의 실존 인물이었을 확률이 60%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확률적이지만, "다음 던지기에서 동전이 앞면이 나올 확률이 50%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확률적이죠.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주장이지만, 둘 다 확률이라는 라벨 아래 뭉뚱그려져 있는 거죠.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확률을 설명하는 끝없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베이즈, 객관적, 주관적, 인식적, 우연적, 빈도주의적, 성향, 논리적, 귀납적 또는 예측적 추론 등이죠. 설상가상으로, 그러한 라벨은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죠.

혼란을 없애보도록 노력해볼게요.

확률 진술에는 두 가지 주요 진영이 있어요. 저명한 과학 철학자 이언 해킹이 설명하듯이, 많은 확률은 빈도 유형 확률 또는 신념 유형 확률 중 하나에 속하죠.

빈도 유형은 주로 결과가 얼마나 자주 발생하는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특히 반복된 시도 동안 장기적으로 발생하는지에 기반을 두죠. 예를 들어, 동전을 100번 던지면, 앞면이 43번 나오고 뒷면이 57번 나올 수도 있죠. 그 결과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해요. 아마도 그것은 뒷면이 더 자주 나오는 편향된 동전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그 동전은 공정한 50대50 동전일 수도 있고, 단지 그 100번의 던지기 내에서 약간의 변동이 있었을 뿐일 수도 있는 거죠. 100번의 동전 던지기가 1억 번이 되면, 그 동전이 편향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해질 거예요. 만약 그것이 공정한 동전이라면, 앞면과 뒷면의 전체 비율은 50대50 비율로 수렴할 것이고요.

신념 유형 확률은 완전히 다르죠. 그것은 당신이 이용 가능한 증거에 기반해서 특정 주장이나 미래 결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신뢰의 정도를 표현하는 거예요. 공자는 실존 인물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 그의 존재에 대한 확률적 진술은 신념 유형 확률인 거죠. 그것은 주사위 굴리기와는 완전히 달라요. 마치 역사의 계산 모델을 계속 실행해서 공자가 존재하는 세계가 얼마나 많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증거에 기반한 최선의 추측일 뿐이고, 숫자로 표현된 거죠. 하지만 확률 진술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신념 유형인지 빈도 유형인지 거의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혼란스러워하는 거죠. 그러한 혼란은 지적인 속임수를 만들어내고, 종종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 숫자와 통계에 수반되는 겉보기 자동적인 지혜에 너무 기꺼이 의존하도록 만드는 거죠.

확률은 특정 상황에서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단순하고 폐쇄된 시스템, 즉 6개의 명확하게 정의된 가능한 결과를 가진 주사위 굴리기에서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 때, 확률적 추론은 완벽하게 작동하죠. 하지만 우리가 확률을 복잡한 적응 시스템 안에 있는 엉망진창인 현실의 영역으로 옮기면, 상황은 꽤 빨리 엉망이 될 수 있어요. 존 케이와 머빈 킹이 그들의 훌륭한 책, "급진적인 불확실성"에서 썼듯이, 확률은 "가능한 결과가 잘 정의되어 있고, 그것을 일으키는 기본 프로세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거의 변하지 않고, 관련 역사적 정보가 풍부한" 상황에 가장 잘 적용될 수 있는 거죠. 불행히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의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러한 가정이 적용되지 않죠. 확률은 혼돈 속에서는 작동하지 않아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불확실성보다는 위험에 관한 문제, 즉 동전 던지기로 돌아가보도록 하죠. 인과 관계의 기본 역학은 시간과 공간에 걸쳐서 안정적이죠.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들은 정지해 있어요. 동전을 던지는 사람이 고대 중국의 진나라의 군인이든, 현대 웨스트버지니아의 바텐더이든 상관이 없어요. 앞면과 뒷면의 전체 비율은 각각 대략 50%로 끝나야 하죠. 게다가, 우리가 동전 던지기의 확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특정 던지기에서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를 예측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결과의 평균 분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또한 원하는 만큼 동전 던지기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현상은 반복 가능하죠. 동전 자체도 비교 가능하거나 교환 가능한데, 내가 내 동전을 사용하든 당신의 동전을 사용하든 상관이 없어요. 만약 그것들이 모두 쿼터이거나 더 일반적으로 공정한 동전의 범주에 속한다면요. 이러한 모든 요인의 결과로, 동전 던지기 확률은 수렴적이죠. 더 오래 던지면 던질수록, 각 결과에 대해서 50%에 더 가까워지는 거죠. 이러한 요인(정지적, 평균적, 반복 가능, 비교 가능, 수렴적)의 조합은 과거 사건이 미래 결과의 거의 완벽한 예측 변수가 되는 동전 던지기를 확률적 분석에 이상적으로 만들죠.

이제, 이부프로펜이 두통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또 다른 예를 고려해보도록 하죠. 그것은 동전 던지기보다 더 복잡하지만,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죠. 만약 두통이 새롭고 알려지지 않은 질병에 의해서 유발되지 않는다면, 이부프로펜이 두통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매일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하므로, 이것은 정지적인 문제인 거죠. 우리는 또한 평균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가능한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경향이 있는 치료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고, 모든 특정 경우에 효과가 있는 치료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불행히도, 두통은 개인 내에서 그리고 인간에게 더 일반적으로 매우 반복 가능하죠. 그것들은 또한 대부분 비교 가능한데, 왜냐하면 내 두통을 줄이는 화학적 과정이 당신의 두통도 줄일 가능성이 있다는 합리적인 가정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올바른 범주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죠. 좀 고루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확률에 대해서 엄청나게 중요하거든요. 통계는 우리의 언어만큼 좋을 뿐이죠. 만약 내가 두통이라는 단어를 편두통이나 뇌종양에 의해서 유발되는 머리 통증의 느낌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확률 기반 추정치는 정확한 범주, 즉 내가 다른 상황에서 두통을 지칭할 때, 사과와 오렌지가 아니라 사과와 사과를 비교하고 있다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죠. 만약 그것이 올바른 범주라면, 그러면 동전 던지기와 마찬가지로 두통과 이부프로펜의 문제는 수렴적이죠. 우리 사이에 연령, 성별, 인종, 키, 소득 등에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이부프로펜은 아마도 여전히 효과가 있을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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