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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그 재조명된 삶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볼까 해요.
위스콘신 헬레나 밸리에 있는, 좀 외딴, 낡은 유니티 예배당에 서서 북쪽으로 강을 바라보면, 언덕에 세워진 세 개의 건물이 보이는데, 현대적이면서도 묘하게 주변 환경에 어울려요. 마치 미시간 호의 등대나 계곡의 키 큰 나무들처럼, 로미오와 줄리엣 풍차는 주변을 둘러싼 삼나무로 덮여 있어서 눈에 확 띄죠. 그 다음으로 미드웨이 반은 위스콘신의 큰 헛간을 낮고 평평하게 만든 것 같은데, 매디슨(주 수도)으로 가는 길을 따라 흩어져 있는 헛간들과 똑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탈리에신은 언덕 꼭대기를 감싸고 있는 집인데, 수십 그루의 떡갈나무와 붉은 삼나무 속에 파묻혀서 언덕, 돌, 나무껍질의 회색과 갈색을 재현하고 있죠. 계곡 위로는 검은 독수리와 흰머리 독수리가 점점 더 넓은 원을 그리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고요.
이 세 건물은 모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가 설계했는데, 지금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잖아요. 그의 가족은 19세기에 이 계곡에 정착해서 유니티 예배당을 지었어요. 열한 살 때부터 그는 여름에 매디슨에서 이곳에 와서 삼촌의 농장을 방문했죠. 젊은 시절, 라이트는 건축가가 되기 위해 시카고로 남쪽으로 갔고, 그곳에서 루이스 설리번에게 훈련을 받았는데, 설리번은 그에게 형태와 기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20년 후, 그는 스캔들로 가득하고 창의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인물로 이 계곡으로 돌아왔죠. 라이트는 스스로를 “태생적으로 위스콘신 급진주의자”라고 선언했어요. "급진주의자는 '뿌리'를 의미하는 좋은 단어입니다. 급진주의자이기 때문에 저는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위스콘신이 바로 제 자리입니다." 여기서, 중년에 라이트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자신을 재창조했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늦게 피지 않았더라면, 혹은 두 번째로 피지 않았더라면,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짓지 못했을 거예요. 라이트는 자신이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번째로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그는 중년의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라이트의 엄청난 자신감은 어렸을 때부터 발전했는데, 그것이 그를 침체기에서 벗어나 이 두 번째 단계로 끌어올린 부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창의성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라이트의 자존심은 그를 지배적이고 폭력적으로 만들었죠. 이 책에 나오는 다른 늦깎이들보다 라이트의 어두운 면이 그의 성공을 이끄는 동력이 된 거죠. 그는 헌신적인 숭배자들을 주변에 모았는데,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자신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죠. 캐서린 그레이엄은 성공하기 위해 지배적인 남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지만, 라이트는 그녀의 정반대였던 셈이에요.
라이트는 천재, 즉 타고난 건축가가 되어야 했다고 해요. 그의 어머니는 그가 아직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가 위대한 건물을 설계할 것이라고 결정했다고 하죠. 그녀는 그에게 프뢰벨 블록 세트를 사주었는데, 라이트는 어린 시절부터 이 도형들을 배열하고 정리했는데, 이것이 그의 후기 작품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앤서니 알로프신이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인식'이라고 부르는 기하학의 기본 구조를 꿰뚫어 보는 것을 어린 나이에 배웠다는 평이 많죠. 그의 프레리 하우스와 초기 사원에서부터 후기 작품에 이르기까지, 이 기하학적 추상화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잖아요. 그의 어머니는 또 다른 기반을 마련했는데, 그녀는 어린 시절에 존 러스킨의 예술 및 건축 비평을 그에게 읽어주고 위대한 고딕 성당의 판화를 소년의 침대 위에 걸어두었다고 해요. 그의 아버지는 라이트를 문학과 음악에 몰두시켰고요. 라이트는 종종 건물을 작곡에 비유했는데, 탈리에신에서는 학생들이 밭에서 일하고 건물을 수리하는 계곡 전체로 음악을 보내기 위해 스피커에 올려놓고 바흐와 베토벤을 크게 틀었다고 하네요. 열네 살 때, 그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를 읽고 구텐베르크 이후 책이 문화적 표현의 주된 형태로 건축을 대체했다는 비극적인 교훈을 얻었는데, 라이트는 그 대체를 뒤집고 건축을 예술의 어머니로서의 정당한 위치로 되돌리기로 결심했죠. 이 아이디어는 그가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하면서 80대에도 여전히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라이트의 경력은 1880년대에 시작되었고 1930년대에 끝난 것으로 널리 여겨졌었는데, 당시 그는 모더니스트 학계와 건축계에서 거부당했지만,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축가였을 거예요. 비록 그의 후기 의뢰 중 최소 두 건, 즉 위스콘신 와우와토사의 성모 희보 그리스 정교회와 구겐하임 미술관은 처음에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지만요. 1909년 이전에 그는 시카고 교외에 집과 종교 건물을 설계했는데, 그의 혁신적인 프레리 하우스는 널리 호평을 받았었죠. 그와 그의 아내 캐서린은 평범한 중산층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존경받는 공동체에 받아들여졌었고요.
1909년, 42세의 나이에 수평적으로 지어진 개방형 내부의 프레리 스타일 주택 건축가로 성공한 라이트는 가족을 버리고 사업을 동료에게 맡긴 후, 유부녀 고객이었던 마마 보스윅과 함께 유럽으로 갔는데, 그의 사업은 1907년에 침체되었고 그는 1908년에 캐서린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요구했었죠. 그들은 서로 멀어졌고 라이트는 그 이전의 예술 및 공예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일과 가정의 통합을 믿었던 거죠. 떠나는 것은 대담한 선언이었는데, 그는 더 이상 부르주아가 아니라 괴짜였고, 존경받지만 혁신적인 건축가였어요. 즉, 그는 스캔들이었던 거죠. 그의 아들이 그를 때려 넘어뜨렸다고 하더라고요.
유럽에서 돌아온 후 그는 위스콘신, 헬레나 밸리로 돌아가서 탈리에신을 지었는데, 이것은 전환점이 되었어요. 그것은 그의 초기 아이디어를 확장하고 새로운 방향을 설정한 아이디어와 실험의 건물인 거죠. 이 계곡에서 라이트는 침체되었던 그의 경력을 다시 활성화시켰고, 이것은 그의 삶에서 개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길고 어려운 기간의 시작이었는데, 1911년에서 1925년 사이에 탈리에신은 두 번이나 불탔고, 그의 연인 마마 보스윅은 이상하고 끔찍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후속 결혼은 양쪽 모두에 폭력이 가해졌다고 주장하면서 실패했었죠. 라이트는 건축계에서 주변부 인물이었고, 구식으로 여겨졌으며, 미스 반 데어 로에와 국제 스타일의 아이디어를 옹호하는 모더니스트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조롱당했었죠. 톰 울프가 말했듯이, 1932년까지 라이트는 유럽 모더니스트에 비해 '반 현대적'으로 여겨졌었는데, '이는 그가 끝났고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죠.' 게다가 그는 종종 돈이 부족했다고 하더라고요.
이 기간 동안 라이트는 미국에서 의뢰를 거의 받지 못했고, 그가 받은 의뢰도 종종 실패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한가한 시간이 아니었어요. 1923년에 그는 일본의 임페리얼 호텔을 완공했는데,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물리적으로나 상상적으로 놀라운 업적이었죠. 그 호텔은 지어진 다음 해에 지진에서 살아남으면서 스스로를 증명했는데, 10년 후 그는 자랑스럽게 썼죠. '그들은 도쿄에 임페리얼이 지어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는 지진 지역에 건물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국내에서 그의 성공은 미미했는데, 저렴한 주택을 만들려는 그의 시도는 재정적으로 실패했어요. 라이트는 이 중간기에 야망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돈을 벌고 견습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글을 쓰고 강의를 해야 했었죠. 대공황 동안 건축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마침내 끝난 것처럼 보였는데, 한 역사가가 말하길 '라이트는 대중의 상상력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1930년대 초에 폴링워터, 존슨 왁스, 허버트 및 캐서린 제이콥스 퍼스트 하우스(제이콥스 I)라는 세 개의 상징적인 건물에 대한 의뢰와 함께 두 번째 막이 시작되었죠. 1935년부터 1959년까지의 이 두 번째 경력은 라이트의 가장 혁신적인 시기였는데, 유소니아, 헬리오센트릭 및 직물 블록 주택, 미국 서부의 풍경에 기반한 새롭고 독창적인 디자인, 그리고 구겐하임 미술관과 존슨 왁스 컴퍼니와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이 만들어졌죠. 마치 그가 인생을 다시 사는 것 같았는데, 그는 어린 시절에 배웠던 패턴을 끊임없이 재상상했던 방식으로 그의 경력을 재상상하고 재구성했던 거죠.
그래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일찍 꽃을 피우기도 하고 늦게 꽃을 피우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는 인생의 4분의 1이 지난 68세 이후에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해냈는데, 그의 마지막 10년은 그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였어요. 라이트가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작품의 중요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노년에 그의 가장 실험적인 건물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60세에 그의 경력은 쇠퇴기에 있었지만, 80세에는 상승세에 있었고요. 동등 확률 규칙이 예측하는 것처럼 라이트는 엄청나게 열심히 일했고, 91세로 사망하기 1년 전, 그는 바그다드에 제안된 문화 센터를 위해 100개의 도면을 제작하기도 했답니다.
이중 정점 경력 형태는 그의 경력의 매년 그의 디자인에 따라 완성된 건물의 수 그래프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건물을 설계하는 것보다 건설하는 데 더 오래 걸리고, 많은 외부 요인이 디자인이 언제 완성될지 또는 완성될지 여부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완전히 대표적인 것은 아니지만, 라이트의 경력의 두 정점이 명확하게 보이고 있죠.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무렵의 침체 이후, 라이트의 사업은 1935년 폴링워터에 대한 의뢰가 있을 때까지 거의 잠잠했었는데, 라이트의 멘토인 루이스 설리번이나 그의 제도사 러셀 배어 윌리엄슨과 같은 많은 건축가들은 라이트가 겪었던 1911–19년의 업무 감소와 같은 침체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답니다.
라이트의 경력에는 11.1 그림에서 포착되지 않은 질적인 측면이 있는데, 라이트는 혁신적이고 새로운 맥락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재작업하고 삶을 끊임없이 재검토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정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1911년에서 1917년 사이에 라이트는 자신의 건축 원칙에 따라 저렴한 주택을 만들려는 시도인 시스템 빌트 홈 프로그램에 대해 100개 이상의 디자인을 만들었는데, 시스템 빌트 홈은 그의 총 생산량의 약 10%를 차지하지만, 대부분 건설되지 않았죠.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라이트의 일본 작업, 그리고 아이디어를 재정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만드는 데 어려움이 겹쳐서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는데, 간과된 시스템 빌트 홈, 엘리자베스 머피 하우스에 대한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헤이스는 프로그램이 취소된 지 1년 후에도 라이트가 나중에 프로젝트에서 디자인 요소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카이브의 메모를 발견했는데, 그리고 그는 1936년에 제이콥스 I과 함께 저렴한 건축가가 설계한 주택의 아이디어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유소니안으로 알려진 건물 세트의 일부였죠.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중간기는 야심 찼었는데, 1916년의 보그 하우스는 임페리얼 호텔(예비 계획은 1913년에 시작됨)의 영향을 보여주며, 라이트의 독특한 스타일을 입증하고 있죠. 그것은 밀워키 교외의 거리에서 독특하고 단일하고 이질적인 집으로 눈에 띄는데, 틀림없이 라이트이고, 몇 년 전에 그가 짓고 있던 프레리 하우스와는 완전히 다르죠. 작은 규모의 기념비적인 건물의 미학으로 작업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1936–9년에 건설된 위스콘신 라신의 존슨 왁스 본사에서 위대한 고딕 성당에서 영감을 얻었을 때 다시 볼 수 있었어요.
그의 마지막 10년 동안 라이트는 베스 샬롬 사원과 구겐하임 미술관과 같은 기념비적이고 혁신적인 공간을 지었는데, 구겐하임 미술관은 전후 시대의 가장 놀랍도록 미래적인 건물 중 하나이고, 70대의 기하학적 상상력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계에서 맨해튼에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그는 반복이 아닌 재배열을 통해 이러한 화려한 새로운 형태로 왔고,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양화했죠. 존슨 왁스 본사의 아이디어는 1931년 디자인에서 처음 볼 수 있는데, 연속적인 나선형 경사로의 아이디어는 1920년대 디자인에서 처음 나타났고, 그가 구겐하임 작업을 의뢰받았을 때 새로운 종류의 콘크리트가 사용 가능하게 되었고, 그의 선구적인 이상을 공유하는 후원자가 있었죠. 라이트가 행성계를 위해 첫 번째 나선형 경사로를 설계했을 때 그는 '당시의 기술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구겐하임 디자인이 새로운 고객을 위해 수정된 구제 디자인의 재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대신, 그것은 라이트가 가장 단순한 형태에서도 광대한 가능성을 보고 새로운 재료로 작업할 수 있었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죠. 존슨 왁스 본사의 나무 모양 기둥은 라이트가 최신 형태의 철근 콘크리트로 작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라이트의 두 번째 단계는 새로운 놀라운 방식으로 첫 번째 단계의 아이디어를 재검토한 결과였죠. 그가 경력이 부활하기 몇 년 전인 1931년에 말했듯이, '인간의 이 창조적인 능력은 그가 하는 일에 자신을 투영하고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패턴으로 다시 태어나는 자질 또는 능력입니다.' 1934년 이후, 폴링워터, 존슨 왁스 본사 및 제이콥스 I과 함께 라이트의 경력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패턴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가 어떻게 이것을 해냈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관행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건축 역사에서 미켈란젤로 이전의 디자인 드로잉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인쇄기가 종이를 풍부하게 만들었고, 레오나르도와 같은 예술가들은 창의적인 독창성에서 제도 및 스케치의 용도를 발견했고, 르네상스는 제너럴리스트의 시대였죠. 그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들, 즉 도나토 브라만테, 조르조 바사리, 발다사레 페루치는 모두 먼저 화가이자 조각가였는데, 그것은 늦게 꽃을 피우는 시대였죠. 브루넬레스키는 중년에 건축가가 되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했는데, 이것은 고대 시대의 위대한 돔을 복제하는 방법으로 천 년 동안 건축가를 당황하게 했던 문제를 해결했었죠. 건축은 그림과 조각과 드로잉 기술을 공유했고, 세 가지 예술 모두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방법으로 드로잉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작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적지 않고 글쓰기가 자신의 생각 방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죠. 드로잉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조각가 및 건축가, 특히 미켈란젤로에게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어요.
미켈란젤로는 건축에 관심을 갖기 전에 경력의 중간에 있었고, 교황으로부터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으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는 노인이었는데, 은퇴하는 대신, 70대의 예술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가 되었죠. 다른 예술가들처럼 미켈란젤로는 드로잉을 통해 건축가가 되었던 셈이에요.
브루넬레스키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로마로 여행하여 고대 건물을 조사하여 건축을 배우지 않았는데, 그는 고전적인 스타일, 형태 및 규칙에 영감을 받았지만 책을 통해서였죠. 그는 고전적인 건축 질서로 가득 찬 코덱스를 연구했고,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는 대신 필요한 것을 취했죠. 그는 자신의 그림을 준비하면서 누드 인물을 하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서 이 코덱스의 형태와 모양을 배웠는데,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발명품이 아니었어요. 그것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관행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는 드로잉이 사고방식이고 예술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그들처럼 배웠죠. 미켈란젤로 드로잉과 건축의 발명에 대한 훌륭한 연구인 미술 사학자 카미 브라더스가 썼듯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드로잉의 잠재력을 연구의 한 형태로,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성하는 매체로 입증했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미켈란젤로의 드로잉은 반복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는 자세, 포즈, 각도에 약간의 변화를 주면서 동일한 인물을 반복해서 그렸는데, 그것이 그가 기본 형태를 자신의 기억에 코딩하고 독창적인 방법을 발견한 방법이죠. 드로잉을 통해 그는 모양에 대한 깊은 이해를 얻었고, 따라서 그의 학생 중 한 명에게 '안토니오, 그려라, 안토니오, 그려라, 안토니오, 그리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고 촉구했던 거죠. 이 반복, 이 재구성에 아이디어가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미켈란젤로가 재해석되고 재형성되어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모양으로 가득 찬 머리를 가지고 각 프로젝트에 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건축에 필요한 기술은 그가 그림에서 배웠고, 해부학에 대한 그의 관심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데, 바사리가 말했듯이, '해부학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죽은 몸을 벗기는 과정에서 그는 나중에 얻은 훌륭한 디자인 감각을 완성하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 비밀 드로잉 습관 때문에 구타당했다고 하는데, 늦게 꽃을 피우려면 아주 어릴 때 시작해야 할 때도 있겠죠.)
코덱스에서 그는 다양한 건물 프로젝트에서 재구성되고 재작업될 수 있는 새로운 일련의 형태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건축을 조각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보았고, 그림이 건축이 남긴 공간에 맞춰져야 했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작업하면서 건축을 그 자체로 흥미롭고 전체 효과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게 되었죠. 건축 프레임과 조각 또는 그림 인물은 이제 그의 상상력 속에서 통일되었고, 기초, 기둥 머리, 페디먼트 및 코니스를 위한 제도 기술을 습득하는 수단으로 시작된 것이 대리석 블록 내에서 인간 형상을 상상하는 능력과 유사한 새로운 관점이 되었는데, 이 스크롤과 기둥을 그리는 기초에서 그는 고전 건축을 재창조한 사람이 되었던 거죠.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건축을 설명하고 설명하는 데 필요한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브라더스는 '어떤 의미에서 그의 건축은 여전히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라고 쓰고 있고, 하지만 우리는 그의 발전에서 반복의 중심적인 중요성을 볼 수 있죠. 그는 추상적이지 않았는데, 그는 그림을 반복적으로 작은 변화를 주면서 올바른 답을 찾을 때까지 그린다는 예술적인 아이디어를 얻었죠. 그는 인간 해부학이나 건축 구조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수도사가 성경 구절을 묵상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곰곰이 생각했는데, 창의성은 이러한 활발하고 반복적인 작업의 결과라고 볼 수 있어요. 그것이 바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그렇게 길고 창의적인 경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법인데, 그는 어린 시절의 모양을 미켈란젤로가 팔과 기둥을 스케치하는 것처럼 70년, 80년 후에 상상력 속에서 돌리고, 배열하고, 재구성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구겐하임이 설계된 방법이었던 거죠. 라이트는 평생 동안 모양을 돌렸다고 하더라고요.
드로잉이 미켈란젤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상상력은 라이트에게 그랬던 것 같아요. 옛 거장은 형태를 찾기 위해 종이에 계속해서 초안을 만들었고, 새로운 거장은 연필을 들기 전에 머릿속에서 신중하게 모든 것을 생각했죠. 라이트의 기억력은 그가 실제로 드로잉을 하지 않고도 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유명하게도 에드가 J. 카우프만이 라이트에게 전화를 걸어 폴링워터 디자인의 진행 상황을 보러 들를 것이라고 말했을 때 라이트는 종이에 아무것도 없었고, 당황하지 않고 라이트는 제도 스튜디오로 걸어가서 주저하지 않고 종이에 직접 세 개의 완전하고 자세한 도면을 그렸는데, 그리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카우프만이 도착했을 때 그는 엄청나게 감명을 받았었는데, 라이트는 앞선 몇 주 동안 머릿속에서 건물을 완전히 상상했기 때문에 순수한 영감에서 나온 것처럼 건물을 생산할 수 있었던 거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909년에 삶에서 걸어 나온 방식을 몇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중년의 위기처럼 보이죠. 그는 자신의 일에 지루하고 불만을 느꼈고, 그의 결혼 생활은 관심사가 달라서 진부해졌고, 그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든 바꾸고 싶어 안달했었죠. 우리는 또한 그의 영웅인 월트 휘트먼과 랄프 왈도 에머슨, 미국 개인주의의 위대한 예언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라이트를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에서처럼 부르주아의 삶에 갇힌 보헤미안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니면 우리는 모든 것을 더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는 행복 곡선의 최저점에 도달하고 있었고(다음 장에서 논의됨),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삶의 자연스러운 단계였던 거죠. 그는 그것을 타기보다는 볼트를 풀었는데, 아마도 이러한 각 요인이 역할을 했을 텐데, 확실히 그는 갇히고 우울하다고 느꼈겠죠. 더 이상의 추측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가 첫 번째 아내 캐서린과 함께 머물렀다면 그의 작품이 똑같이 발전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그러한 낭만적인 개인주의자가 자신의 삶에서 정직하지 않다고 느끼는 동안 발전할 수 없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단순히 불가피한 생물학적 행복 곡선을 따라 미끄러지고 있었다면 모든 것이 똑같은 결과로 이어졌을 수도 있겠죠. 우리는 알 수 없는데, 1909년의 그 단절의 원인이나 결과가 무엇이든 라이트는 이제 '제한과 가상의 선에서 풀려났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럽 건축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은 기능과 구별되는 장식이 없어야 한다는 라이트의 아이디어를 강화했고, 이것은 그의 후기 작품과 포교에 정보를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유럽 건물의 계획을 연구하고, 민속 전통과 평범한 건물 간의 연결 고리를 보고(탈리에신에 정보를 제공함), 다른 국가의 오래된 형태를 복제하는 대신 독창적인 미국 건축을 만들려는 그의 사명에 더 확고해졌죠. 1909~10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고전 건축이 환경과 유기적이라는 것을 보았고, 그 스타일을 다른 시대와 장소에 부과하는 것은 불연속적이라고 믿게 되었고, 현대 미국에서 고전적인 형태를 재현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건축이 없는 유일한 강대국, 죽거나 살아있는 국가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에머슨과 휘트먼은 항상 라이트에게 중요했고, 이제 그는 건축가의 정신적인 측면보다는 지적인 측면만 훈련시키면 모방적인 건물이 아니라 창의적인 건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죠. 앤서니 알로프신이 말했듯이, '라이트는 십자군으로 유럽에서 돌아왔다'고 볼 수 있겠네요.
다음 20년은 그의 후기 경력의 주요 전환점으로 이어지는데, 집에서 고립되고 직업에서 혼자였던 이 위기는 출발점이었죠. 라이트의 문제 기간은 대략 1909년부터 1930년까지였는데, 그때 그는 마침내 자신의 비전을 깨달았던 것 같아요. 1910년 이후, 라이트는 더 이상 같은 건축가가 아닌데, 젊은 시절 멘토 루이스 설리번에게서 배운 형태와 기능이 하나라는 모델이 '확장되고 재작업'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설리번은 그의 장식에서 전체에 대한 감각을 부여했는데, 라이트는 전체가 건물 전체의 특징이 되기를 원했고, 이제부터 라이트는 건물이 아니라 공간을 만들었죠. 그가 모양으로 했던 것처럼 그는 아이디어로 그렇게 했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머릿속에서 돌렸죠.
벽난로는 1909년 이전의 그의 프레리 주택의 중심이었고, 가정 공간의 초점이었는데, 뉴욕 버팔로에 있는 그 시대의 라킨 빌딩에는 기능적인 공간을 강조하는 거대하고 밝은 중앙 아트리움이 있었죠. 그는 건물 모서리를 벽에서 분리하여 벽돌 스팬드를 담은 유리 채널을 만들었는데, 이런 식으로 그는 벽을 분리하여 건물을 벽으로 둘러싸인 상자가 아닌 일련의 스크린이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죠. 도널드 호프만이 썼듯이, 벽의 일반적인 상자 패턴을 방해함으로써 '내부 공간은 모든 방향으로 자유로워졌다'고 볼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유니티 사원(1905–8)에서 그는 예배 공간을 '디자인의 영혼'으로 만들었죠. 그가 이렇게 디자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 공간 이론이 없었는데, 유럽과 일본 이후 공간의 아이디어는 그의 의도에 점점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죠.
연속 공간의 아이디어는 성모 희보 그리스 정교회와 구겐하임과 같은 그의 후기 원형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높이에 도달했는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벽이 아니라 내부의 끊임없는 흐름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라킨 빌딩의 유리 균열은 폴링워터에서 더 강력하게 재발하여 연속적인 벽을 깨고 내부 공간을 강조하는데, 구겐하임에서는 바닥이 끊임없이 기울어지고 유리 균열이 돔 지붕이 되죠. 존슨 왁스 본사에는 벽과 천장 사이에 유리 튜브로 만들어진 채광창이 있어서 사무실에 빛을 비추고 있고, 마찬가지로 성모 희보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지붕이 원형 창문으로 만들어진 채광창에 놓여 있는데, 초저녁의 빛은 이 창문에서 내려와 제단을 둘러싼 황금 스크린에 반사되고 황금빛 광채가 교회 전체 내부를 감싸는 효과를 보여주죠. '무제한 오버헤드'라는 아이디어는 1908년 유니티 사원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50년 후에도 라이트는 여전히 이 개념을 진화시키고 재구성하고 있었던 거죠. 이런 식으로 그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새로운 패턴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평가할 수 있겠네요.
건물을 공간으로 만드는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탈리에신인데, 그것은 놀라운 혁신이었죠. 그는 1935년 폴링워터까지 그것과 같은 것을 다시 짓지 않았는데, 성모 희보 그리스 정교회의 의뢰인들이 탈리에신을 방문했을 때에도 그들은 건물이 1911년에 처음 지어졌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마치 어제 처음 지어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말했듯이, 탈리에신을 방문할 때 르 코르뷔지에가 제도사였고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견습생이었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설계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기는 끊임없이 어렵다고 볼 수 있겠죠. 탈리에신에서 40대 중반의 위기 동안 그는 새로운 미국 건축을 만들기 위해 공간 개념을 실험했었는데, 그것은 닐 레빈에 따르면 '그가 건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의 선언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탈리에신은 언덕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 주위에 지어졌는데, 언덕 꼭대기가 집의 세 면의 중앙에 있는데, 나중에 선반 바위가 폭포 위에 지어진 폴링워터로 돌출되었듯이 말이죠. 그는 유럽의 영지를 비공식적이고 불규칙하며 유기적인 방식으로 재창조하여 위스콘신 풍경에 통합하기 위해 유럽에서 돌아와 탈리에신을 지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의 초기 혁신 중 하나인 로비 하우스 내의 '총체적인 움직임의 자유와 무한한 공간의 팽창'은 탈리에신에서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려졌는데, '거의 모든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모서리에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모든 방에서 전망은 확장되고 변화하고, 전망은 주변 환경과 함께 흐르면서 내부와 외부의 구별을 줄이는 효과를 주죠. 탈리에신에서는 결코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공간은 항상 열리거나 닫히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은 모든 곳에서 우회하는 입구와 작은 강이 있는 강과 같은 복도, 방, 구석과 틈새 및 아늑함의 연속적인 통로인데, 거의 50년 후에 지어진 구겐하임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어요.
라이트는 대각선 축에 탈리에신을 지어 이러한 끊임없는 변화와 전망 확장을 달성했는데, 이것은 이제 그의 작업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고, 탈리에신의 다른 아이디어들은 그의 후기 시대를 정의하는 재구성 모양의 일부가 되었는데, 거실의 코너 창은 조인트가 없어서 현대주의의 '상자를 깨고' 집을 자연과 통합하는 방법이 되었죠. 1930년대에 그의 경력을 다시 시작한 건물 클러스터의 일부인 제이콥스 I에서는 거실로 가는 문이 모서리에 있는 정원으로 열리고, 탈리에신이 실패한 시스템 빌트 홈 프로젝트의 일부인 엘리자베스 머피 하우스에서는 현관 문을 통해 들어간 후 왼쪽에 벽이 있는데, 이 벽은 거실의 전망을 막고 집 중앙으로 끌어들이고, 그곳에서 더 개방적인 전망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탈리에신의 거실로 이어지는 원래 현관 문과 같다고 볼 수 있어요.
탈리에신은 개인적인 휴양지였고, 라이트가 독립적이고 마마와 함께 살 수 있는 장소였는데, 그들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파트너십은 언덕과 집의 결혼인 탈리에신에 대한 주요 영감이었죠. 하지만 1914년에 많은 불행 중 첫 번째가 일어났는데, 하인이 불을 질러 탈출하려던 마마와 그녀의 아이들을 포함해 7명을 도끼로 살해했고, 건물의 주거용 날개가 파괴되었죠. 더 많은 것이 뒤따랐는데, 1923년에 라이트는 두 번째 아내인 모드 '미리엄' 노엘과 결혼했고(그의 첫 번째 아내 키티는 1922년에 그에게 이혼을 허락했다) 이것은 까다롭고 불행한 결혼이었고, 그녀는 모르핀 중독자이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는데, 그들이 이혼했을 때 그녀는 라이트를 폭력 혐의로 고발했었죠. 이혼으로 라이트는 부담스러운 빚을 지게 되었고, 1925년에 그는 올기반나 힌젠부르크(결혼 전 성은 라조비치)를 만났는데, 그들은 남은 생애를 함께했고 재건된 탈리에신으로 이사했죠. 그러나 그해 탈리에신은 전기적 결함으로 인해 다시 불탔는데, 1902년부터 라이트가 수집한 일본 예술품 컬렉션이 파괴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사라진 예술품의 가치는 최대 50만 달러에 달했는데, 라이트가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할 수 없는 예술품을 잃은 슬픔까지 더해졌죠. 그는 탈리에신을 다시 지었지만, 그의 채권자들은 그를 쫓아다녔고, 한때 그 집은 그들의 소유였는데, 높은 부채와 적은 일거리로 그의 상황은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그의 미래 작업에 대한 보증을 담보로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컨소시엄을 만들었죠. 그의 거부할 수 없는, 고칠 수 없는 자신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첫 번째 탈리에신 화재 직전인 1913년부터 1922년까지 라이트는 일본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탈리에신과 유럽처럼 이것은 건축에 대한 그의 관점을 변화시켰죠. 앤서니 알로프신은 다음과 같이 썼는데, '그가 일본 예술에서 발견한 원, 사각형, 삼각형의 원형 기하학은 각각 무한, 완전성 및 구조적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