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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잖아, 내가 꿈을 꿨는데, 음, 꿈이라고 하긴 좀 애매해. 왜냐면... 그게 완전 꿈같진 않았거든. 뭔가 더 현실 같은 그런 느낌?
암튼, 바이런의 시 "어둠" 알지? 거기에 나오는 구절처럼, "빛나는 태양이 꺼지고, 별들이 하늘을 배회하는..." 그런 기분이었어.
사실, 이게 그냥 꿈만은 아니었던 게, 인도네시아 숨바와 섬에 있는 탐보라 화산 폭발 얘기 들어봤어? 엄청 예쁘고 오랫동안 잠자던 화산이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터져 버린 거야. 용암이랑 쓰나미 때문에 10만 명이 죽었대. 진짜 엄청난 규모였던 거지. 1980년에 있었던 미국의 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보다 150배나 더 컸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6만 개 터지는 에너지랑 똑같았대. 와... 상상도 안 돼.
그때는 소식 전해지는 속도가 진짜 느렸잖아. 탐보라 화산 터지고 나서 7개월 뒤에야 런던 타임스에 상인 편지 형식으로 짧게 보도가 났대. 근데 사실 그때는 사람들이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었던 거지. 240세제곱킬로미터나 되는 먼지랑 재가 대기 전체를 뒤덮어서 햇빛이 엄청 흐릿해지고, 지구 기온이 내려갔대. 석양이 엄청 어둡고 이상해서 영국 화가 터너가 그걸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는데, 대부분의 시간은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던 거지. 바이런이 그 시를 쓴 것도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야. 으스스하다, 그치?
봄은 오지 않고, 여름도 따뜻하지 않았대. 1816년은 그래서 "여름이 없었던 해"라고 불린대. 농작물은 흉작이고, 아일랜드에서는 기근이랑 발진티푸스 때문에 6만 5천 명이 죽었대. 미국 뉴잉글랜드에서는 그해를 "서리가 내려 죽은 해"라고 불렀다더라. 6월까지 계속 서리가 내리고, 씨앗을 심어도 싹이 안 트는 거야. 먹을 게 없어서 가축들도 굶어 죽거나 일찍 도축해야 했고. 진짜 끔찍한 해였대. 아마 현대 농부들이 겪었던 가장 심각한 재앙 중 하나였을 거야. 근데, 있잖아,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1도도 안 떨어졌대. 겨우 1도도 안 떨어졌는데 그렇게 난리가 났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과학자들이 그걸 보고 지구의 온도 조절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게 된 거지.
사실, 19세기는 그렇게 추운 시대는 아니었대. 그 전 200년 동안 유럽이랑 북미는 "소빙하기"를 겪었거든. 템스 강에서 얼음 축제를 하고, 네덜란드 운하에서 스케이트 경주를 할 정도였다니까.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러니까, 추위에 익숙한 시대였던 거야. 그래서 19세기 지질학자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예전보다 훨씬 따뜻하다는 걸 늦게 깨달은 것도 이해가 돼. 그들 주변의 땅이 엄청난 빙하랑 살벌한 추위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걸 몰랐던 거지.
물론, 과거에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유럽 대륙 곳곳에서 북극 순록 뼈가 따뜻한 프랑스 남부에서 발견되고, 엄청 큰 바위들이 있을 리 없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나름대로 과감한 추론을 하기도 했는데, 좀 엉성한 것들도 많았대. 예를 들어, 드 뤽이라는 프랑스 박물학자는 쥐라 산맥 높은 곳에 있는 석회암 지층에서 엄청 큰 화강암이 발견되는 걸 보고, 동굴 안에 압축된 공기가 그걸 튕겨 올린 거라고 설명했대. 마치 장난감 총에서 고무탄 쏘듯이 말이야. 뭐,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19세기에는 그런 설명이 얼마나 그럴듯한지가 중요했지, 실제로 바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별로 신경 안 썼대. 웃기지?
영국의 유명한 지질학자 아서 할람은 18세기 지질학의 아버지 제임스 허턴이 스위스에 직접 갔더라면, 산들이 깎여나간 계곡, 매끄럽게 닳아버린 흔적, 바위들이 쌓여 만들어진 퇴석 같은 것들의 의미를 바로 알았을 거라고 했대. 그 모든 게 빙하가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라는 거지. 근데 허턴은 여행을 별로 안 좋아했대. 그래도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간접적인 정보만으로도 큰 바위들이 홍수 때문에 1000미터나 되는 언덕 위로 떠밀려 올라갔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대. 물로는 바위를 띄울 수 없다는 걸 알았거든. 그래서 대규모 빙하 작용을 주장한 첫 번째 사람이 된 거야. 아쉽게도 그의 주장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고, 반세기 동안 대부분의 박물학자들은 바위의 흔적이 그냥 마차 바퀴 자국이거나, 심지어 신발에 박힌 징 때문에 생긴 거라고 생각했대. 에휴...
근데 신기하게도, 과학계 주류 학설에 영향을 받지 않은 현지 농부들은 더 잘 알고 있었대. 스위스 박물학자 장 드 샤르팡티에가 1834년에 스위스 벌목꾼이랑 시골길을 걷다가 길가에 널려 있는 큰 바위들에 대해 얘기했는데, 벌목꾼이 그 바위들이 멀리 떨어진 그림젤 지역에서 온 거라고 딱 잘라서 말했대. "그 바위들이 어떻게 여기 왔냐"고 물었더니, 벌목꾼은 "그림젤 빙하가 계곡을 따라 여기까지 옮겨온 거다. 옛날에는 빙하가 베른 마을까지 뻗어 있었다"고 대답했대.
샤르팡티에는 깜짝 놀랐대. 왜냐면 자기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근데 학회에서 이 주장을 발표했을 때는 사람들이 냉담하게 반응했대. 샤르팡티에의 절친한 친구였던 스위스 박물학자 루이스 아가시스도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는데, 점점 설득당해서 나중에는 그 이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됐대.
아가시스는 파리에서 퀴비에한테 배웠고, 스위스 뇌샤텔 주립학교 자연사 교수였대. 그의 또 다른 친구였던 카를 심퍼는 식물학자였는데, 사실 "빙하기(Eizeit)"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심퍼래. 그는 빙하가 스위스 알프스 산맥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북미 대부분을 덮었다는 증거가 많다고 생각했대. 엄청나게 급진적인 주장이었지. 심퍼는 자기 연구 노트를 아가시스한테 빌려줬는데, 나중에 엄청 후회했대. 왜냐면 아가시스가 점점 자기 주장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심퍼는 자기가 만든 이론이라고 생각했거든. 샤르팡티에도 결국 오랜 친구와 적으로 돌아서게 됐고.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아가시스의 친구였는데, 과학적 발견의 세 단계를 이렇게 설명했대. 첫째, 사람들은 그 주장이 옳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은 그 주장이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셋째, 사람들은 그 주장의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 훔볼트가 이렇게 말했을 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아가시스를 염두에 뒀던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시스는 이 분야에 엄청나게 몰두했대. 빙하 작용의 힘을 알기 위해 위험한 틈새 깊숙이 들어가고, 가파른 알프스 산봉우리를 오르고, 심지어 자기랑 팀원들이 오른 산이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인지도 모르고 막 올라갔대. 근데 아가시스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그의 이론을 잘 믿지 않았대. 훔볼트는 아가시스한테 빙하에 대한 광적인 조사를 그만두고, 자기가 잘하는 어류 화석 연구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아가시스는 하나의 생각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이었대.
영국에서는 아가시스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적었대. 왜냐면 대부분의 박물학자들이 빙하를 본 적이 없어서 빙하의 엄청난 힘을 이해하지 못했거든. 로더릭 머치슨은 학회에서 "바위 지층의 긁히고 닳은 흔적이 빙하 작용 때문이라고?"라고 비웃듯이 물었대. 마치 바위 표면이 가볍고 미끄러운 얼음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죽을 때까지 그는 뭐든지 빙하 탓으로 돌리는 "빙하 광" 지질학자들을 불신했대. 지질학회 회장이자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였던 윌리엄 홉킨스도 똑같은 생각이었대. 그는 "빙하가 바위를 옮길 수 있다는 주장은 역학적으로 말도 안 된다"면서 지질학회가 관심을 가질 가치도 없다고 했대.
하지만 아가시스는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자기 이론을 설파했대. 1840년에는 글래스고에서 열린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는데, 찰스 라이엘한테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았대. 다음 해에는 에든버러 지질학회가 아가시스의 이론에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스코틀랜드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대.
결국 라이엘은 입장을 바꿨대. 어느 날 스코틀랜드 집에 있는 퇴석 더미(긴 바위 줄) 옆을 수백 번 지나다니다가 갑자기 깨달은 거야. 그 바위들이 거기에 있는 유일한 설명은 빙하가 옮겨왔다는 것뿐이라는 걸. 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바뀌었어도, 라이엘은 빙하기 이론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용기가 없었대. 아가시스에게는 정말 힘든 시기였대. 결혼 생활은 파탄 나고, 심퍼는 자기 연구를 표절했다고 비난하고, 샤르팡티에는 말도 안 걸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질학자 라이엘은 자기는 지지하면서도 미적지근하고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1846년에 아가시스는 미국에서 강연을 하면서 자기가 그토록 원했던 명예를 얻었대. 하버드 대학교가 그를 교수로 초빙하고, 최고 수준의 비교 동물학 박물관을 지어줬대. 그가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것도 한몫했겠지. 왜냐면 거기는 겨울이 길어서 사람들이 긴 추위의 시기에 대한 이론에 어느 정도 공감했거든. 6년 뒤에 아가시스는 그린란드에 대한 첫 번째 과학 탐사를 했대. 그것도 도움이 됐겠지. 그들은 섬 전체가 아가시스 이론에서 상상했던 고대 빙상처럼 얼음으로 덮여 있다는 걸 발견했대. 마침내 그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한 거야. 아가시스 이론의 가장 큰 약점은 빙하기가 왜 생기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거였는데, 뜻밖의 곳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나타났대.
1860년대에 영국 신문과 학술지들은 글래스고 앤더슨 대학교의 제임스 크롤이 쓴 유체역학, 전력학, 기타 학문 분야에 대한 글들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중 한 글에서는 지구 궤도의 변화가 빙하기를 유발하는 원인일 수 있다고 주장했대. 그 글은 1864년에 "철학 잡지"에 발표되자마자 최고 수준의 학술 논문으로 칭송받았대. 근데 사람들이 그 글을 쓴 크롤이 대학교 연구원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직원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대. 좀 당황스럽기도 했겠지?
크롤은 1821년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13살 때 정규 교육을 마친 뒤 목수, 보험 판매원, 금주 여관 관리인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대. 그러다가 글래스고 앤더슨 대학교(지금의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교)에서 문지기로 일하게 된 거야. 그는 동생을 설득해서 많은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조용한 밤에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물리학, 수학, 천문학, 유체역학 등 새롭게 떠오르는 학문들을 독학할 수 있었대. 점점 그는 지구 운동과 기후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춰서 일련의 논문을 쓰기 시작했대.
크롤은 처음으로 지구 궤도가 타원형(약간 찌그러진 계란 모양)에서 원형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타원형으로 돌아가는 주기적인 변화가 빙하기를 일으키고 사라지게 하는 원인일 수 있다고 주장했대. 그 전에는 누구도 천문학적인 관점에서 지구 기후 변화를 설명한 적이 없었거든. 크롤의 설득력 있는 이론 덕분에 영국인들은 지구의 어떤 지역이 예전에 빙하의 지배를 받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대. 크롤의 뛰어난 재능은 널리 인정받았고, 스코틀랜드 지질 조사국에서 자리를 얻었고, 런던 왕립 학회와 뉴욕 과학 학회 회원으로 추대되고,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는 등 많은 영예를 누렸대.
안타깝게도, 아가시스의 이론이 유럽에서 마침내 인정을 받기 시작했을 때, 그는 미친 듯이 아메리카 대륙의 사람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들을 탐험하고 다녔대. 적도 근처를 포함해서 가는 곳마다 빙하의 흔적을 발견했대. 결국 그는 빙하가 지구 전체를 덮어서 그때까지 신이 창조했던 모든 생명체를 파괴했다고 확신했대. 아가시스가 제시한 증거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했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주한 미국에서 그의 지위는 점점 높아져서 1873년에 그가 죽었을 때 하버드 대학교는 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교수 세 명을 추가로 임명해야 할 정도였다니까.
하지만 아가시스의 이론은 곧 인기를 잃었대. 그런 일은 가끔 일어나잖아. 그가 죽은 지 10년도 채 안 돼서 하버드 대학교 지질학과 학과장은 "소위 빙하기라는 것은... 몇 년 전에는 빙하를 연구하는 지질학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망설임 없이 버린다"고 썼대.
어느 정도는 크롤의 계산에 따르면 마지막 빙하기가 8천 년 전에 나타났는데, 지질학적 증거는 지구가 3천 년보다 훨씬 가까운 시기에 심각한 섭동을 겪었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었대. 빙하기를 일으키는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이론 전체가 설득력을 잃는 거지. 밀루틴 밀란코비치라는 세르비아 학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문제가 계속 남아 있었을 거야. 밀란코비치는 천체 운동을 연구한 배경이 전혀 없었대. 그는 기계 공학자였는데, 20세기 초에 갑자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거야. 그는 크롤 이론의 문제는 틀린 게 아니라 너무 단순하다는 걸 알게 됐대.
지구가 우주 공간을 움직일 때 궤도의 길이와 모양이 변할 뿐만 아니라, 태양을 향하는 각도, 즉 기울기, 편측도, 이심률도 규칙적으로 변하는데, 이 모든 것이 지표면의 어떤 지점에 닿는 햇빛의 길이와 강도에 영향을 미친대. 특히, 지구는 오랜 시간 동안 세 가지 위치 변화를 겪는데, 그걸 황도 경사, 세차 운동, 이심률이라고 부른대. 밀란코비치는 이런 복잡한 주기적인 변화가 빙하기의 발생과 소멸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대. 문제는 주기적인 변화의 시간 범위가 너무 크다는 거였대. 어떤 건 2만 년 정도, 어떤 건 4만 년, 또 어떤 건 10만 년 정도 걸린대. 거의 모든 주기가 수천 년씩 차이가 나는 거지.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의 교차점을 확인하려면 거의 끝없는 정교한 계산을 거쳐야 한대. 가장 중요한 건 밀란코비치는 100만 년 동안 위의 세 가지 요인이 끊임없이 변화함에 따라 계절마다 지구상의 모든 위도에 햇빛이 비치는 각도와 지속 시간을 계산해야 했다는 거야.
다행히도, 그렇게 복잡하고 방대한 작업은 밀란코비치한테 딱 맞았대. 앞으로 20년 동안 휴가를 갈 때도 연필이랑 계산자로 주기표를 끊임없이 계산했대. 지금은 컴퓨터로 하루 이틀이면 끝낼 수 있는 일을 말이야. 계산은 전부 여가 시간에 해야 했지만, 1914년에 밀란코비치는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그는 세르비아 군대의 예비군이었기 때문에 체포됐대. 그 후 4년 동안 대부분을 부다페스트에 연금됐는데, 관리가 허술해서 매주 경찰에 한 번씩 보고하면 됐고, 나머지 시간은 헝가리 과학 아카데미 도서관에서 열심히 일했대. 그는 역사상 가장 행복한 전쟁 포로였을지도 몰라.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결과로 1930년에 "수학 기후학과 기후 변화의 천문학적 원리"라는 책이 출판됐대. 밀란코비치는 틀리지 않았대. 빙하기는 지구의 섭동과 관련이 있었던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추운 겨울이 점차 심해지면서 긴 추운 시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했지만, 러시아계 독일 기상학자 블라디미르 쾨펜(구조 지질학자 알프레트 베게너의 장인)은 그 과정이 그것보다 더 복잡하고 끔찍하다는 걸 발견했대.
쾨펜은 빙하기가 생기는 이유는 추운 겨울이 아니라 시원한 여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대. 어떤 지역의 여름이 매우 시원하면, 닿는 햇빛이 지표면에 반사돼서 추위가 더 심해지고, 눈이 더 많이 내리게 된대. 그러면 지표면의 눈과 얼음이 영구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대. 눈이 쌓여서 얼음이 되면, 그 지역 전체가 더 추워져서 눈과 얼음이 점점 더 많이 쌓이는 거야. 빙하학자 그윈 슐츠가 말했듯이 "빙상이 생기는 것은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녹지 않은 눈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아무리 적더라도." 빙하기는 어느 계절의 이상한 여름에 시작돼서 녹지 않은 눈이 열을 반사하고 추위를 더 심하게 만들고, 맥피는 "이것은 끊임없이 스스로 확대되는 과정이고, 일단 빙상이 생기면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말했대. 그렇게 해서 움직이는 빙하가 생기고, 빙하기가 시작되는 거지.
1950년대에 연대 측정 기술이 부족해서 과학자들은 당시 가지고 있던 빙하기 데이터를 밀란코비치가 정확하게 계산한 주기와 비교할 수 없었대. 그래서 밀란코비치와 그의 계산 결과는 점점 인기를 잃어갔대. 1958년에 죽을 때까지 밀란코비치는 자기 주기가 옳다는 걸 증명하지 못했대. 당시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 따르면 "그 계산 결과를 골동품 지질학자나 기상학자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간절히 찾고 싶을 정도였다"고 하더라. 1970년대에 들어서 고대 해저 퇴적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칼륨-아르곤 측정법이 개선되면서 밀란코비치의 이론은 마침내 입증됐대.
밀란코비치 주기만으로는 빙하기의 주기를 설명할 수 없대. 다른 많은 요인들도 고려해야 하는데, 특히 대륙의 분포, 극지방 육괴의 존재가 중요하대. 하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해. 그래도 북미 대륙, 유라시아 대륙, 그린란드를 500킬로미터 북쪽으로 옮기면 우리는 영원히 빙하기에 갇힐 거라는 말이 있대. 운 좋게도 우리는 날씨가 좋은 시기에 살고 있는 것 같아. 빙하기 안에 있는 기후가 상대적으로 따뜻한 시기를 간빙기라고 하는데, 우리는 특히 그 주기에 대해 잘 몰라. 어쩌면 좀 우울할 수도 있지만, 인류 문명 전체, 즉 농업의 발전, 도시의 건설, 수학, 문학, 과학 등 모든 것들이 특이하게 날씨가 좋은 시기에 일어났대. 지난 간빙기들은 8천 년밖에 지속되지 않았는데, 이번 간빙기는 벌써 1만 년이나 됐대.
사실, 우리는 여전히 빙하기에 살고 있대. 단지 범위가 줄어들었을 뿐이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지난 빙하기의 최고조, 즉 약 2만 년 전에는 지구 육지 표면의 약 30%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대. 지금도 여전히 육지의 10%가 얼음으로 덮여 있고, 14%는 영구 동토층이래. 지구 담수의 4분의 3이 얼음으로 변하고, 남북극에 빙상이 있는 경우는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극히 드문 일이래. 세계 많은 지역에서 겨울에 눈이 내리고, 뉴질랜드처럼 습한 지역도 영구적인 빙상으로 덮여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한 일이지만, 지구 역사에서는 극히 드문 일이래.
꽤 최근까지 지구 표면의 온도는 대부분 더 높았고, 영구적인 빙하가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대. 현재의 빙하기, 즉 실제로 빙하시대는 약 4천만 년 전에 시작됐고, 극도로 혹독한 상태에서 덜 혹독한 상태로 변했대. 우리는 덜 혹독한 시기 중 하나에 살고 있는 거지. 새로운 빙하기는 항상 이전 빙하기의 흔적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앞에 펼쳐지는 그림은 점점 불완전해진대. 하지만 지난 250만 년 동안 우리는 적어도 17번의 혹독한 빙하기를 겪은 것 같대. 아프리카 직립인과 그 이후의 현대인이 살았던 시기에 말이야. 현재 빙하기를 초래한 두 가지 용의자는 히말라야 산맥의 융기와 파나마 지협의 형성이라고 흔히 말한대. 전자는 기류의 흐름을 방해하고, 후자는 해류의 흐름을 망가뜨렸대. 지난 4500만 년 동안 섬이었던 인도는 2000킬로미터를 이동해서 아시아 대륙과 충돌했고, 그 결과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오르고 그 뒤에 광대한 티베트 고원이 생겼대. 고원의 해발 고도가 높아지면 기후가 더 추워질 뿐만 아니라 바람의 방향도 바뀌어서 바람이 북쪽, 북미로 불어서 그곳이 오랫동안 추위에 더 쉽게 지배당하게 된다고 여겨진대. 그러다가 약 5백만 년 전부터 파나마 지역이 바다에서 솟아올라서 남북 아메리카를 연결했고, 그 결과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의 난류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적어도 반 세계의 강우량 분포를 바꿨대. 그 결과 중 하나는 아프리카의 가뭄을 초래해서 그곳의 유인원들이 나무에서 내려와서 형성되고 있는 대초원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을 찾았대.
어쨌든 해양과 대륙이 현재와 같은 분포를 갖게 되면서 우리는 앞으로 긴 빙하기를 겪을 것 같대. 존 맥피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앞으로 약 50개의 빙하기를 더 겪을 것이고, 각 빙하기는 약 10만 년 동안 지속될 것이고, 그 후에야 우리는 극도로 긴 해빙기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
5천만 년 전에는 지구에 규칙적인 빙하기가 없었대. 하지만 빙하기가 지구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그 규모와 지속 시간은 엄청나게 놀라웠대. 처음으로 광범위한 빙하기는 약 22억 년 전에 나타났고, 그 후 10억 년 정도의 따뜻한 시기가 있었대. 그 후에 나타난 빙하기는 처음보다 더 컸대. 너무 커서 오늘날 일부 과학자들은 그 시대를 언급할 때 "빙하기" 또는 "초빙하기"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대. 이런 상황은 "눈덩이 지구"라고 더 자주 불린대.
하지만 "눈덩이"는 그 시기의 환경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대. 그 이론에 따르면 햇빛의 조사량이 약 6% 감소하고 온실 가스를 생성(또는 유지)하는 능력이 낮아져서 지구가 실제로 열을 유지하기 어려웠대. 지구는 남극처럼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고, 기온은 45도나 떨어졌대. 지구 표면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서 고위도 지역의 해양은 800미터나 되는 두께로 얼고, 열대 지역도 수십 미터나 얼었대.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대. 지질학적 관점에서 보면 적도 지역을 포함한 지구 전체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는데,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얼지 않은 물이 있는 곳이 있었다는 것이 확실히 밝혀졌대. 우선, 남세균이 살아남아서 광합성을 했대. 광합성을 하려면 햇빛이 필요한데, 얼음을 통해 보면 빛이 점점 어두워져서 몇 미터 밖에서는 아예 빛을 볼 수 없대.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대. 하나는 정말로 얼지 않은 물이 있는 작은 부분이 있었다는 것(아마도 그 지역의 어딘가가 뜨거웠기 때문일 거야), 다른 하나는 어떤 구조의 얼음은 반투명하다는 것인데, 이런 현상은 자연에서 실제로 존재한대.
만약 지구가 정말로 얼어붙었다면, 어떻게 다시 따뜻해졌을까? 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이래. 반사되는 열이 너무 많아서 얼어붙은 행성은 영원히 그런 상태로 유지될 수 있대. 이런 상황을 구제할 힘은 지구 내부의 마그마에서 나온 것 같대. 여기서도 우리는 지각의 구조에 다시 한번 감사해야 할지도 몰라. 우리는 화산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생각한대. 화산 폭발이 빙하의 봉쇄를 뚫고 뿜어져 나오면서 열과 가스가 지표면의 얼음을 녹여서 대기층이 다시 변할 수 있게 됐대. 매우 흥미롭게도 이번 극도로 추운 시기는 캄브리아기 대폭발, 즉 생명 발전사에서 봄이라고 불리는 시기의 끝을 장식했대. 물론, 그런 봄이 항상 화창한 것은 아니었대.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역사상 가장 격렬한 날씨를 겪었고, 강력한 허리케인이 고층 빌딩 높이의 거대한 파도를 일으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대.
이 시기에 다모류, 조개류, 기타 심해 열수공에 붙어 사는 생명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살아남았겠지. 반면에 지구상의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거의 멸종 직전까지 갔을 수도 있대. 이 시기는 우리에게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는 현재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부족하대.
빙하기 대폭발 시대와 비교하면 최근 몇 번의 빙하기의 규모는 훨씬 작아 보이지만, 오늘날 지구상의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극히 거대하대. 유럽과 북미를 덮었던 위스콘신 빙상은 어떤 곳에서는 두께가 3킬로미터나 됐고, 매년 120미터씩 계속 전진했대. 가장자리 부분조차도 거의 800미터나 됐대. 정말 장관이었겠지? 상상해 봐. 그렇게 높은 얼음 벽 아래에 서서 벽 뒤에는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의 지역이 있는데, 하늘을 찌르는 얼음 봉우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끝없이 펼쳐진 빙상이래. 거대한 빙상의 압력 때문에 땅덩어리 자체가 내려앉고, 12000년 후에 빙상이 후퇴한 오늘날에도 그 땅들은 아직 원래 위치까지 올라오지 못했대. 빙상이 천천히 이동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돌덩어리들과 퇴석 더미의 위치를 바꿨을 뿐만 아니라, 롱아일랜드, 코드 곶, 난터킷 섬 같은 땅덩어리 전체를 덩그러니 놓고 갔대. 아가시스 이전의 지질학자들이 빙상이 지구 표면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도 당연하대.
만약 빙상이 다시 나타난다면, 우리는 그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어떤 무기도 없대. 1964년에 알래스카 프린스 윌리엄 만에서 북미 최대의 빙하 지역에서 대륙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강도가 리히터 규모 9.2였대. 단층이 생긴 곳에서는 지표면이 6미터나 솟아올랐고, 지진이 너무 강해서 텍사스주의 연못 물이 뭍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대. 하지만 전례 없는 진동이 프린스 윌리엄 만의 빙하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아무 영향도 없었대. 빙하는 지진을 무시하고 계속 전진했대.
오랫동안 우리는 지구가 수십만 년 이상의 주기로 서서히 빙하기에 들어가고 벗어난다고 생각했대. 하지만 지금 우리는 실제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대. 그린란드 빙핵을 측정한 결과 우리는 10만 년 이상 동안의 지구 기후 변화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갖게 됐대. 결과는 긍정적이지 않대. 기록에 따르면 지구는 최근 역사 시기에 이전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순조로운 안식처가 아니었고, 오히려 기후가 따뜻함과 추위 사이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대.
약 12000년 전에 지구는 최근의 대규모 빙하기를 거의 끝내고 기후가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그것도 아주 빨리 따뜻해졌대. 하지만 그러다가 갑자기 1000년 정도의 혹한기로 되돌아갔대. 그 시기는 과학사에서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불린대. (이 이름은 드라이아스라는 북극 식물에서 유래했는데, 빙하가 후퇴한 후 처음으로 다시 자라기 시작한 식물 중 하나였대. 과학사에는 올더 드라이아스기라는 시기도 있는데, 그 특징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대.) 그 천 년의 혹한기가 거의 끝날 무렵, 평균 기온이 다시 갑자기 상승해서 20년 만에 4도나 상승했대. 그렇게 끔찍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20년 만에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기후가 지중해 지역의 기후로 바뀔 만큼 충분했대. 국지적인 지역에서는 그 변화가 더 놀라웠대. 그린란드 빙핵에 따르면 그곳의 기온이 10년 만에 8도나 변했대. 기온 변화는 그곳의 강수 형태와 생장 환경도 바꿨대. 인구가 희박했던 과거에도 그런 상황은 불안했을 텐데, 오늘날에는 그 결과가 상상하기조차 어렵대.
가장 불안한 것은 우리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른다는 거래. 엘리자베스 콜버트가 "뉴요커"에 쓴 글에서 지적했듯이 "알려진 외부 힘은, 심지어 가설적인 외부 힘조차도 지구 온도를 빙핵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격렬하고 빈번하게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 안에는 광범위하고 끔찍한 피드백 루프가 있는 것 같다"고 썼대. 그것은 해양과 해류의 정상적인 순환이 망가진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갈 길이 멀대.
한 가지 이론에 따르면 영거 드라이아스기 초기에 바다로 흘러 들어간 많은 양의 빙설 융빙수가 북반구 해수의 염분 농도(와 밀도)를 낮춰서 멕시코 만류가 방향을 틀어서 남쪽으로 향하게 됐대. 마치 운전자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말이야. 멕시코 만류에서 오는 열이 부족했기 때문에 북반구의 위도가 높은 지역의 기후는 다시 혹독한 상태로 돌아갔대. 하지만 그것은 지구가 다시 따뜻해졌을 때 왜 멕시코 만류가 이전처럼 방향을 틀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못한대. 대신 우리는 홀로세라고 불리는 예외적으로 평온한 시기에 접어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래.
그런 안정적인 기후가 오랫동안 지속될 이유는 없대. 사실 일부 기상학 분야의 권위자들은 우리의 기후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고 생각한대. 사람들은 당연히 전 세계적인 기후 온난화가 지구가 다시 빙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할 거래. 하지만 콜버트가 지적했듯이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동을 겪을 때는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 광범위한 모니터링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래. 어떤 사람들은 기온 상승이 빙하기의 도래를 촉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대. 그런 주장은 언뜻 보기에 이해가 안 되겠지만, 실제로는 타당한 이유가 있대. 기온이 조금만 상승해도 증발 속도가 빨라지고, 구름이 두꺼워져서 위도가 높은 지역의 적설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대. 사실, 전 세계 기온 상승은 북미와 유럽 북부 국지적인 지역을 더 춥게 만들 수도 있대. 그럴듯하지만 모순적인 얘기지?
기후는 다양한 변수의 산물인데, 이산화황 함량의 상승과 하락, 대륙의 이동, 태양의 활동, 밀란코비치 주기 변경 등이 있대. 그래서 과거의 일을 이해하는 것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대.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대.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남극 대륙이 남극 지역으로 표류한 이후 적어도 2천만 년 동안 그곳에는 빙하가 없었고, 식물로 덮여 있었다는 거야. 그런 일은 오늘날에는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들리잖아.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일부 알려진 후기 공룡의 서식지래. 영국 지질학자 스티븐 트룰리는 북극 주변 10위도 범위 내의 숲이 티라노사우루스를 포함한 그런 큰 동물의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