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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음… 레이 크록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요. 혹시 맥도날드 모르시는 분은 없겠죠? 그 맥도날드를… 거의 뭐, 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의 인생이 참 흥미롭거든요.
레이 크록이라는 사람이 원래부터 사업가였냐? 그건 또 아니에요. 굉장히 다양한 일을 했어요. 뭐… 음악가도 했었고, 부동산 투기도 했었고, 종이컵 영업도 했었대요. 그러다가… 우연히 밀크셰이크 믹서기 판매를 하게 된 거죠. 만약에 그 종이컵 영업에 만족했더라면, 그냥 평범한 중간 관리자로 살았을 수도 있었겠죠. 근데… 운명인지 뭔지…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는 작은 햄버거 가게 주차장에 딱 도착한 순간! 인생이 확 바뀐 거죠.
그때 당시 맥도날드는 진짜 혁신적인 곳이었대요. 그렇게 빠르고 효율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곳은… 미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감자튀김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햄버거는 고기랑 지방 비율이 완벽하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데도 음식이 엄청 빨리 나오는 거예요. 다른 햄버거 가게들은 너무 느려서 음식이 식어서 나오기 일쑤였는데, 맥도날드는 뜨끈뜨끈한 햄버거, 감자튀김, 셰이크 세트가 50초마다 슉슉 나오는 거죠.
레이 크록은 그걸 보고…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대요. 마치 뉴턴이 사과 맞는 순간처럼? 그날 밤에… 맥도날드 체인점이 전국 곳곳에 생기는 상상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믹서기를 많이 팔 수 있겠다, 이 정도 생각을 했겠지만… 맥도날드라는 가게 자체에 완전히 매료된 거죠. 52살이라는 나이에… 드디어 자기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거예요.
레이 크록은 좀… 특이한 사람이었어요. 군대도 갔다 왔고, 재즈 피아노도 쳤었고, 플로리다에서 돈을 벌려고 하다가 실패해서 겨울에 코트도 없이 시카고로 돌아오기도 했었대요. 아버지처럼 돈에 쪼들리면서 살기는 싫어서… 진짜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이었죠. 플로리다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후에도 10년 넘게 꾸준히 직장 생활을 했지만… 뭔가 조직 생활에는 안 맞는 사람이었던 거죠. 항상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시인이나 화가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던 거죠. 돈 이상의 뭔가, 자기가 진짜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어 했던 거예요.
사실 레이 크록은 처음부터 사업가가 될 운명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1차 세계대전 때는 구급차 운전을 하려고 학교를 중퇴하기도 했었고… 여러 가지 판매직을 하면서 틈틈이 피아노를 치기도 했대요. 어떤 사람들은 레이 크록이 영업 능력하고 음악적 재능을 합쳐서 댄스 밴드 리더가 됐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레이 크록도 뭔가 성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구체적인 목표는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막 계획을 세우고 커리어를 관리하기보다는… 그냥 자기 재능을 갈고닦으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던 거죠. 그러다가 피아노 치다가 부동산 일도 하고, 종이컵도 팔다가… 맥도날드까지 오게 된 거잖아요. 맥도날드 형제를 만났을 때가 52살이었는데… 밀크셰이크 믹서기 판매가 점점 줄어들어서 뭔가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던 시기였대요. 근데… 그걸 맥도날드에서 찾은 거죠! 믹서기를 파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알아본 거예요. 진짜 대단하죠?
레이 크록은 마치… 즉흥적인 예술가 같았다고 할까요? 어떤 예술가들은 처음부터 자기 비전을 확실하게 가지고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내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뭐랄까… ‘개념적 예술가’라고 부른대요. 근데 레이 크록은 정반대였어요. 뚜렷한 목표도 없이, 그냥 조금씩 조금씩, 반복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를 찾아나갔던 거죠. 그런 사람들을 ‘실험적 예술가’라고 부른대요. 실험적 예술가들은… 뭐랄까… 작품 자체가 연구인 거죠.
레이 크록도 그랬던 것 같아요. 구체적인 목표는 없었지만… 그냥 하나하나 부딪혀가면서 맥도날드를 만들어나간 거죠. 마치 예술가들이 작품을 만들듯이…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수정하면서요. 대단한 상상력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현실을 꼼꼼하게 관찰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죠.
레이 크록은 마치… 야망 있는 예술가처럼 끊임없이 발전하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완벽을 쫓았어요. 마치 늦게 꽃피는 시인처럼… 끊임없이 발전하고 기술을 향상시키는 천재성을 보여줬다고 할까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실험하면서… 늦게,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성공을 거둔 거죠.
솔직히 레이 크록을 예술가처럼 생각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춤을 추는 것도 아니고… 작곡가도 아니고, 시인도 아니잖아요. 그냥 글로벌 패스트푸드 기업을 만든 경영자일 뿐인데… 근데… 이런 말도 있잖아요. “창의적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노래하고 춤을 추거나, 아니면 가수와 무용수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레이 크록은 후자에 속하는 거죠. 광고계의 거장도… 자기는 카피라이터나 미술 감독, TV 프로듀서는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광고 회사의 전체 창작물을 총괄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대요. 레이 크록도 그런 사람이었던 거죠. 완전히 새로운 사업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으니까요.
실험적인 예술가들에게 작품 하나하나는 실험이고, 발견이잖아요. 레이 크록도 그랬던 것 같아요. 맥도날드 가게 하나하나가 그냥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실험이었던 거죠. 그런 실험들이 쌓여서… 결국 맥도날드라는 거대한 기업을 만들어낸 거예요.
레이 크록은 대공황 시기에 종이컵 영업을 하면서 믹서기 사업에 뛰어들게 됐대요. 그렇게 에너지 넘치고 야망 있는 사람이… 왜 10년 동안이나 종이컵 영업에 매달렸을까요? 월급 문제로 한 번 그만둔 적도 있었지만… 다시 돌아갔대요. 그만큼 안정적인 직업이었던 거죠. 1927년 이전에는 운이 너무 안 좋아서… 그냥 안정적인 직장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직업도 계속 바뀌고… 정신없이 살았거든요.
16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커피 원두를 팔다가 1차 세계대전에 지원해서 구급차 운전을 하려고 했대요. (근데 휴전 협정이 맺어져서 프랑스에는 가지 못했죠.) 그러다가 리본을 파는 일을 했는데… 아버지보다 돈을 더 많이 벌었다고 자랑했대요. 틈틈이 피아노도 치면서… 어쩌다가 윤락가에서 일하게 되기도 했대요. 리본 파는 일이 지루해서… 찰스턴에서 밴드 활동을 하면서 피아노를 쳤는데… 그때 입었던 옷이 줄무늬 블레이저에 밀짚모자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시카고 주식 거래소에서 시세표를 보고 가격을 적는 일을 하게 됐대요. 부모님이 뉴욕으로 이사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여자친구 에델을 두고 뉴욕으로 가게 됐대요. 에델이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뉴욕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게 된 거죠. 결국 회사가 망해서… 다시 시카고로 돌아와서 에델이랑 결혼했어요. 뉴욕 생활에 질렸던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한 거죠.
레이 크록의 아버지는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라고 잔소리를 했대요. 그래서 며칠 후에 릴리라는 회사의 종이컵을 파는 일을 시작했대요. 낮에는 종이컵을 팔고, 저녁에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피아노를 쳤대요. 근데 일이 일정하지 않고… 종이컵은 겨울에는 잘 안 팔려서…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1925년에는 플로리다로 가서 부동산 사업을 하려고 했대요. 처음에는 잘 나갔는데… “딱 재미를 붙이려고 하니까… 갑자기 사업이 망해버렸다”라고 하더라고요. 종이컵 회사에 휴가를 내고 플로리다에 방을 빌렸는데… 이제는 일도 없어진 거죠. 근데 마침 건물에 사는 사람이 레이 크록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일자리를 소개해줬대요.
이때 중요한 교훈을 얻었대요. 자기가 피아노를 쳤던 술집이… 가격이 정해진 메뉴하고 간단한 음식을 팔았는데… 그게 인상적이었다는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중요한 순간들이 눈에 띄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잖아요. 레이 크록은 평생 동안 식당하고 식품 사업에 종사했잖아요. 술집에서 피아노도 쳤고, 음료수 제조기도 팔았고, 식당 주방도 많이 가봤으니까… 식당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어가고 있었던 거죠.
플로리다 사업은 잘 안됐어요. 레이 크록이 피아노를 치던 술집이 금주법을 위반해서 경찰에 단속되는 바람에… 하룻밤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대요. 에델은 플로리다에서 외롭고 힘들었는데… 그 일 때문에 더 불안해했던 거죠. 그래서 에델은 아이랑 먼저 시카고로 가고… 레이 크록은 2주 동안 밴드에서 일하고 시카고로 돌아갔대요. 얼마 후에 플로리다 경제가 완전히 망가졌다고 하더라고요.
레이 크록은 플로리다에서 기회가 갑자기 사라지는 걸 보고 겁을 먹었대요. 아이도 있는데…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음악하고 부동산 사업을 포기하고 종이컵 판매에 전념하기로 한 거죠. 레이 크록은 다양한 재능과 관심사가 결국에는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기회로 방향을 틀고 있었던 거예요.
실험적인 예술가들은 추상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것을 선호한대요. 레이 크록도 그랬던 거죠. 항상 사업의 세부 사항을 꼼꼼하게 챙겼으니까요. 종이컵을 팔면서 랄프 설리번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새로운 방식으로 밀크셰이크를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대요. 기존 방식보다 훨씬 더 걸쭉하고 차가운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게 된 거죠. 줄이 엄청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고 하더라고요. 레이 크록은 설리번에게 종이컵을 많이 팔아서 좋았대요. 근데… 설리번의 사업 가능성을 알아보고 맥도날드처럼 자기 상사들을 설득해서 설리번을 만나러 갔대요. 아이스크림하고 종이컵 판매업자 모두에게 좋은 기회였던 거죠. 설리번에게 영감을 받은 얼 프린스라는 사람은 새로운 종류의 밀크셰이크를 팔기 시작했고… 레이 크록은 그 사람에게 종이컵을 더 많이 팔게 됐대요. 프린스는 직접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개발했는데… 멀티믹서라고 불렀대요. 레이 크록은 자기 상사들을 설득해서 멀티믹서 판매 대리점이 됐대요.
프린스는 레이 크록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대요. 레이 크록은 하고 싶었지만… 에델은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그런 “모험”을 하는 걸 싫어했대요. 이때부터 둘의 결혼 생활이 흔들리기 시작한 거죠. 문제는 또 있었어요. 레이 크록의 상사가 멀티믹서 판매 계약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계약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죠. 결국 레이 크록은 자기 상사에게 사업 지분의 60%를 주는 조건으로 계약을 따냈대요. 모기지 대출까지 받아야 했대요. 맥도날드 형제와 사업을 하면서도 사업 구조를 제대로 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고… 그 경험이 프랜차이즈 사업의 핵심이 된 거죠.
레이 크록은 적재적소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대요. 종이컵 회사 상사들은 밀크셰이크 믹서 사업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거죠. 맥도날드를 설립할 때는 유능한 재무 담당 이사 프레드 터너와 함께 했어요. 무엇보다 멀티믹서를 팔면서 수천 개의 주방을 돌아다녔는데… 그때 “어떤 사업이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어떤 사업이 실패할지 알 수 있었다”라고 하더라고요. 플로리다에서 술집의 간단한 서비스 방식을 주의 깊게 봤던 것처럼… 세부적인 것들을 관찰하면서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죠. 레이 크록은 나중에 인생을 바꿀 만한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믹서기 사업은 레이 크록에게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했어요. 믹서기를 많이 팔았던 덕분에 맥도날드 형제를 만나게 된 거니까요.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를 발명한 건 아니에요. 맥도날드는 모리스하고 리처드 맥도날드 형제가 만든 거죠. 레이 크록은 그 사업을 확장시킨 거고요. 레이 크록이 없었다면… 맥도날드는 그냥 작은 가족 사업으로 남았을 수도 있었겠죠. 아니면, 맥도날드 형제가 어떻게든 사업을 키웠더라도… “어느 고층 빌딩에서 네 개의 위궤양과 여덟 명의 세무 변호사를 거느리고 소득세를 어떻게 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대요. 레이 크록 덕분에 맥도날드 형제의 경영 원칙은 전 세계적인 사업으로 발전하게 된 거죠.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거랑 전 세계에 똑같은 품질의 햄버거를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제국을 건설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요.
맥도날드 형제는 주방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어서 햄버거를 빠르게 만들 수 있도록 했어요. 레이 크록은 그 사업을 어떻게 프랜차이즈화해서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행에 옮겼던 거죠.
어떤 사람들은 레이 크록을 표절자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맥도날드를 훔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죠. “레이 크록 때문에 엄청난 재산을 놓치고 유산이 거의 지워졌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대요. 근데… 레이 크록이 없었다면 맥도날드 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었을까요? 맥도날드 형제는 이미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었잖아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관리하는 게 너무 힘들었던 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레이 크록하고 일하는 것도 망설였던 거고요.
맥도날드 형제의 조카는 레이 크록이 매출의 0.5%를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하기도 했대요. 하지만 맥도날드 형제는 소득세를 많이 내는 걸 싫어했고, 돈 때문에 복잡하게 사는 걸 싫어했대요. 나중에 리처드는 “세금 때문에 힘들었다. 우리는 더 이상 젊은이도 아니었고… 집 세 채에 캐딜락으로 가득 찬 차고를 가지고 있었고, 누구에게도 빚진 돈도 없었다. 후회는 없다. 프랑스 해안에서 요트를 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대요. 맥도날드 형제는 세금을 낸 후에 100만 달러씩, 현금으로 받기로 하고 레이 크록에게 회사를 팔았어요. 당시에는 레이 크록에게 엄청나게 큰돈이었고, 지금 가치로 따지면 천만 달러 정도 된대요. 그리고 맥도날드 형제도 계약을 어기고 원래 맥도날드 가게를 계속 운영하겠다고 주장했대요.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 형제를 속였다는 주장을 하려면… 레이 크록의 노력 덕분에 맥도날드가 전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는 사실을 무시해야 하는 거죠. 어떤 신문에서는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를 인수한 후 엄청난 확장을 이끌었다”라고 묘사했대요.
최근에 나온 레이 크록에 대한 영화에서도 레이 크록을 순진한 맥도날드 형제를 속여넘긴 악덕 사업가로 묘사했대요. 물론 레이 크록은 경쟁심이 강한 사람이었어요. 목표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는 스타일이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은 잘 신경 쓰지 않았던 거죠. 자기가 보기에 정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바로 관계를 끊어버렸대요. 하지만 영화는 좀 과장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악덕 경쟁자가 아이디어를 훔치는 건 흔한 영화적 설정이잖아요. 페이스북 창업에 대한 영화에서도 마크 저커버그가 윙클보스 형제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영화에서는 아이디어하고 실행을 구분하지 않는데… 그건 중요한 차이거든요. 영화에서 저커버그는 “너희가 페이스북을 만들었으면 너희가 페이스북을 만들었겠지”라고 말하잖아요. 실제 저커버그도 “코드를 작성하고 제품을 만들고 회사를 세우는 건 영화로 만들 만큼 화려한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대요. 레이 크록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예요. 맥도날드 형제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레이 크록은 사업을 만든 거죠. 레이 크록이 아니었다면 맥도날드 형제가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었을 거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아요.
레이 크록하고 맥도날드 형제가 각각 어떤 기여를 했는지 알려면… 햄버거 역사를 알아야 해요.
햄버거도… 누군가에 의해서 발명되고 발전해야 했어요. 캔자스 주 위치타 출신의 요리사 월터 앤더슨은 현대적인 햄버거 조리법을 발명했대요. 앤더슨 이전에는 햄버거 패티 모양도 제각각이었고 빵 사이에 대충 끼워 넣는 방식이었대요. 앤더슨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뜨거운 그릴 위에서 주걱으로 패티를 눌러서 굽는 기술을 개발했대요. 그렇게 하면 햄버거 모양도 더 예뻐지고 맛도 균일해진다고 하더라고요. 앤더슨은 햄버거를 빵 안에 넣었는데… 그게 이동하기 편해서 자동차 시대에 딱 맞는 음식이었던 거죠. 헨리 포드가 자동차 대량 생산을 시작했던 시대였잖아요.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 가더라도 똑같은 제품을 원했던 거죠. 앤더슨이 일했던 화이트 캐슬이라는 회사는 “당신이 먹는 햄버거는 똑같은 강도의 가스 불 위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조리됩니다… 똑같은 위생 기준이 당신의 음식을 보호합니다. 당신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직원들조차도 처음부터 끝까지 고안된 정확한 기준을 따릅니다”라고 광고했대요.
맥도날드 형제는 그런 정확한 기준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거죠. 이미 존재하는 모델을 기반으로 해서요. 햄버거 제조 과정을 개선한 부분도 많지만… 기본적인 것들은 이미 존재했던 거죠.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가맹점주가 맥도날드 형제가 사용하던 전기 프라이어가 아니라 가스레인지가 더 저렴하고 감자튀김 맛도 더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대요. 그게 너무 중요해서 맥도날드에서는 “가스레인지로 요리한다”라는 말이 칭찬으로 쓰일 정도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화이트 캐슬은 맥도날드보다 훨씬 전에 그 사실을 알아냈대요. 화이트 캐슬은 맥도날드보다 먼저 종이컵이 도자기 컵보다 사용하기 편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화이트 캐슬은 여성 고객을 공략해서 시장을 확대했는데… 맥도날드도 나중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마케팅을 해서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죠.
맥도날드 형제하고 레이 크록은 현대적인 패스트푸드 식당을 만든 혁신가들의 일부였던 거예요. 패스트푸드는 1880년대에 가게에 음료수 판매대를 추가하면서 시작됐고, 거기서 샌드위치나 수프도 팔기 시작했대요. 그게 백화점이나 기차역으로 퍼져나갔고요. 금주법 시대에는 술집이 간이 식당으로 바뀌었대요. 1920년대에는 전차나 지하철 근처에 식당이 생겨서 통근자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20세기 중반에는 식당에서 조립 라인처럼 고객이 쟁반을 밀면서 음식을 고르는 방식이 도입됐는데…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인기가 많았대요. 캘리포니아는 패스트푸드 산업의 중심지였거든요. 식당 모델 덕분에 샌드위치뿐만 아니라 따뜻한 식사도 제공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다음에 등장한 게 식당차를 본떠 만든 식당이었대요.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고속도로에도 식당이 생겼고요. 거기서 현대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의 기본적인 특징들이 개발됐대요. 바쁘게 움직이는 요리사하고 웨이트리스들이 음식을 빨리 제공하는 거죠. 자동차 극장이 번성하면서 젊은 여성들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면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서비스도 생겼대요. 근데 그건 너무 느렸고 음식도 차가워지는 경우가 많았대요. 그리고 돈 없는 10대들이 주차장에 죽치고 앉아서 웨이트리스들을 구경하는 바람에 가족 단위 손님들이 싫어하고 쓰레기도 많이 버리고 갔대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 붐이 일어나면서 패스트푸드 식당은 이미 잘 발달된 모델이었고… 맥도날드 형제하고 레이 크록이 완벽하게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맥도날드 형제는 두 가지 일을 해서 성공했는데… 자동차에서 잘 보이는 황금색 아치 간판을 설치해서 어린아이들도 알아볼 수 있게 만들었고, 웨이트리스 없이 햄버거, 감자튀김, 셰이크를 50초 만에 만들어서 제공했던 거죠. 오랫동안 맥도날드는 뜨거운 음식을 제공한다는 광고를 했대요.
맥도날드 형제는 주방 설계를 너무 정확하게 해서 직원들이 장비 사이를 이동할 때 몇 걸음을 걸어야 하는지까지 정해놨대요. 그렇게 정확한 시스템을 확장하려면… 누군가가 프랜차이즈 사업을 성공시키는 방법을 알아내야 했는데… 그게 바로 레이 크록이었던 거죠. 레이 크록은 프랜차이즈 가맹점 운영에 적합한 사람들을 찾아서 맥도날드 방식을 가르쳤어요.
월터 앤더슨도 햄버거 조리법을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지만… 맥도날드 형제처럼 사업 파트너가 필요했어요. 식당 세 개를 열었지만 자본이 부족했던 거죠. 그래서 부동산 중개업자 빌 잉그램하고 파트너십을 맺고 화이트 캐슬 모델을 만들었대요. 1931년에는 식당 115개를 운영하면서 가장 큰 체인이 됐대요. 레이 크록처럼 잉그램도 직원들에게 옷 입는 방법, 말하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지시했대요. 그래도 기준을 유지하는 건 어려웠대요. 유능한 운영자들은 기업가 정신이 강했지만… 사업은 일관성에 의존했거든요. 헨리 포드 스타일의 조립 라인을 여러 위치에서 다양한 운영자들이 운영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던 거죠. 화이트 캐슬은 냉동 햄버거 패티를 사용해서 표준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기준을 낮추는 결과를 낳았대요. 화이트 캐슬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통제는 유지했지만 성장은 제한됐대요.
화이트 캐슬도 혁신적인 기업이었고… 맥도날드도 나중에 그렇게 됐죠.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이 빅맥 같은 메뉴나 로날드 맥도날드 캐릭터를 개발한 것처럼… 화이트 캐슬 운영자 밥 위안은 최초의 2층 햄버거인 빅 보이를 만들었대요. 하지만 잉그램은 프랜차이즈 사업을 거부했대요. 그래서 누군가가 정확성하고 창의성을 결합한 프랜차이즈 모델을 만들기 전까지는 그런 혁신들이 작은 체인에만 머물러 있었던 거죠. 맥도날드 형제는 그런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레이 크록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레이 크록은 식당 프랜차이즈 사업 방식을 완전히 바꿔놨대요. 당시에는 특정 지역이나 구역에 프랜차이즈를 주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레이 크록은 개별 매장에 프랜차이즈를 줬대요. 그렇게 하면 맥도날드는 돈을 덜 벌 수도 있었지만… 통제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거죠. “계약을 체결하면 그 사람들은 우리 기준을 따라야 하고 우리는 그걸 지키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했대요. 레이 크록의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은 두 번째 프랜차이즈를 받을 수 없었대요. 그렇게 해서 맥도날드는 훌륭한 인재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처음 30년 동안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실패한 경우가 단 한 번밖에 없었대요.
레이 크록은 돈보다 기준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최고의 인재를 찾고 사업에서 가장 강력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어 했던 거죠. 그래야 성장할 때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과거 경험을 통해서 얻은 자신만의 리더십 스타일이 있었던 거죠. 헌신적인 추종자들과 함께 영감을 통해서 일했던 거예요. 그리고 실험적인 예술가들의 방법을 적용했죠. 어떤 학자는 실험적인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는 작품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대요.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 과학은 헛되고 오류로 가득 차 있다”라고 말했대요. 레이 크록도 경험적인 방법으로 일했던 거죠.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든 부분이 작동하는 완전한 시스템으로 구상하는 그런 종류의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부분에서 전체로 생각하고, 작은 디테일을 완벽하게 만들 때까지 큰 아이디어로 넘어가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그게 훨씬 더 유연한 접근 방식이다… 사업이 잘 되기를 바란다면 모든 기본 요소를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 마인드 덕분에 맥도날드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통해서 만들어졌대요. 존 러브라는 사람은 “레이 크록 경영 방식의 핵심 요소는 실패를 인정하고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대요. 작은 디테일을 완벽하게 만들고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가 실험적인 예술가와 같다는 거죠.
어떤 교수는 레이 크록의 삶을 “오랜 견습 기간”이라고 묘사했대요. 그게 바로 실험적인 예술가가 거치는 과정이고… 레이 크록의 늦은 성공을 이해하는 모델인 거죠. 다른 학자의 아이디어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늦게 성공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래요. 예술가처럼 모든 직업, 모든 이메일, 모든 회의, 모든 프로젝트에서 노력하면… 산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죠. 레이 크록은 사업계의 실험적인 예술가였던 거예요.
맥도날드 형제도 늦게 성공한 사람들이었고… 자신만의 견습 기간을 거쳤대요. 1930년에 모리스는 28살, 리처드는 21살에 뉴햄프셔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했대요. 처음에는 영화계에서 잡일을 했대요.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영화관을 열었는데… 대공황 시기라서 망했대요. 1937년, 35살하고 28살에 경마장에서 푸드 트럭을 시작했대요. 계절을 타는 사업이라서 결국 식당을 열기로 결심했대요. 하지만 은행에서는 담보가 없다는 이유로 대출을 거절했대요. 1940년, 한 은행 직원이 맥도날드 형제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대출을 해줬는데… “맥도날드가 성공할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대요. 그래서 드디어 첫 번째 드라이브인 식당을 열게 된 거죠.
드라이브인 식당은 인기가 많았지만… 음식을 받는 데 20분이나 기다려야 했대요. 웨이트리스는 비싸고 비효율적이었고요. 손님들은 불평하지 않았지만… 맥도날드 형제는 손님들이 음식을 더 빨리 받기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대요. 고객이 뭘 원하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건 레이 크록하고 공통점이었죠. 드라이브인 식당에서는 바비큐 음식을 팔았는데… 알고 보니 햄버거 판매량이 80%나 됐대요. 그래서 1948년, 46살하고 39살에 푸드 트럭을 시작한 지 11년 만에 식당 문을 닫고 모든 과정을 완전히 바꿨대요.
맥도날드 형제의 효율성은 화이트 캐슬보다 훨씬 뛰어났대요. 모든 걸 맞춤형으로 설계했대요. 그릴은 더 크고 청소하기 쉽고 열을 더 잘 유지했고… 주방 용품도 모두 맞춤 제작했대요. 햄버거 패티 자르는 기계를 더 좋게 만들려고 과자 회사에 작가인 척하고 찾아가기도 했대요. 모든 건 “속도, 저렴한 가격, 대량 생산”에 맞춰져 있었던 거죠. 햄버거 외에 다른 메뉴는 대부분 없애고 감자튀김하고 밀크셰이크를 추가했대요. 새로운 시스템은 가족, 특히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대요. 직원들은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맥도날드는 20세기 내내 그 마케팅 전략을 사용했대요. 분업도 철저하게 이루어졌대요. 그릴 담당, 감자튀김 담당, 밀크셰이크 담당이 따로 있었던 거죠. 매출은 40%나 증가했고… 이미 성공적인 식당이었는데도 불구하고요. 1950년대 중반에는 10만 달러의 이익을 올리고 매년 새 캐딜락을 몰고 다녔대요. 지금 가치로 따지면 100만 달러 정도 되는 돈이죠. 새로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 거죠. 40대 중반하고 50대 초반에 맥도날드 형제는 꿈에 그리던 돈을 벌기 시작했던 거예요.
맥도날드 형제는 레이 크록 외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줬대요. 다른 사람들이 맥도날드 형제의 식당을 보고 자기 동네에 똑같은 식당을 만들기도 했대요.
버거 퀸 창업자는 “우리 음식은 맥도날드하고 똑같았다. 만약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굽는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면 나도 똑같이 따라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대요. 레이 크록은 단순히 따라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맥도날드에서 일하면서 항상 작은 부분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했죠. 다른 사람들은 시스템을 베꼈지만 레이 크록은 꼼꼼한 관찰력으로 시스템을 개선하고 확장했던 거예요. 레이 크록의 배경하고 성격 덕분에 작은 가족 사업이 20세기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죠.
레이 크록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따라 할 수도 있었어요. 맥도날드 형제는 레이 크록에게 주방을 자세하게 보여줬고… 레이 크록은 모든 걸 속속들이 알고 있었거든요. 레이 크록이 혼자 식당을 차리는 걸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거죠. 하지만 레이 크록은 다르게 생각했대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세일즈맨의 눈으로 봤다. 완벽한 패키지였고… 나는 나가서 신나게 떠들 수 있었다.” 레이 크록은 자기 능력을 알고 있었던 거죠. 자기는 주방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요. 그리고 자기 강점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맥도날드 형제는 맥도날드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레이 크록은 맥도날드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대요. 종교적인 헌신이라고 할 정도로요. “감자튀김은 나에게 거의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라고 썼대요.
레이 크록이 처음 맥도날드를 방문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는 다른 드라이브인 식당하고 달리 맥도날드 주차장에는 쓰레기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대요. 레이 크록은 청결에 집착했기 때문에 그게 중요했지만… 깨끗하고 친절한 모델에서 새로운 시장을 볼 수 있었던 거죠. “나는 햄버거 가게에는 무조건 주크박스, 전화, 담배 자판기가 있어야 하고 가죽 재킷을 입은 녀석들이 담배 연기를 뿜어대는 곳에는 아내가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대요. 과거에 “종이컵은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의 일부였다”라고 생각해서 종이컵 사업을 시작했던 사람이… 맥도날드를 보고 “이게 바로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이다”라고 생각했던 거죠. 초기 프랜차이즈 가맹점 주차장에 쓰레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엄청 화를 냈대요. 작은 위반 행위도 레이 크록에게는 “심각한 모욕”이었던 거죠. 마치 신성한 장소에서 쓰레기를 발견한 것처럼요. 레이 크록이 그렇게 화를 냈던 이유는 간단해요. “완벽을 이루는 건 매우 어렵고… 나는 맥도날드에서 완벽을 원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내 목표는 이미지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정확하게.”
맥도날드 황금 아치 간판은 현대적인 아이콘으로 묘사되곤 하잖아요. 레이 크록에게 맥도날드 전체가 그런 의미였던 거죠. 은퇴한 후에도 집에서 망원경으로 맥도날드를 지켜보면서 기준에 미달하는 부분이 있으면 프랜차이즈 가맹점주에게 전화해서 엄청 혼냈대요. 처음 방문했을 때 맥도날드 형제가 감자튀김에 쏟는 정성을 보고 감동받았고… 자기가 책임자로 있는 동안에는 맥도날드 사업의 모든 것에 정성을 쏟았던 거죠.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곤한 일이지만 레이 크록에게는 힘이 솟는 일이었대요. “나에게 일은 놀이였다.”
레이 크록이 맥도날드를 건설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능력은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인 것 같아요. 젊은 시절 라디오 피아니스트로 일하면서 공중파 방송 시간을 채울 사람들을 찾는 일을 했는데…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