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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lating...

아, 있잖아, 음... 그러니까... "시간을 벗어나기"라는 제목으로 한번 얘기해볼까 해요.

제가 아는 동생 중에, 일하는 엄마들끼리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말 저녁에 모임을 갖는 친구가 있어요. 뭐, "선데이 펀데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애들이 어리거나 아니면 십 대 자녀를 둔 워킹맘들이 모이는 거죠. 다들 먹을 거, 마실 거 하나씩 가져오고, 제일 중요한 건, 어떤 기대나 계획 없이 그냥 모이는 거예요. 그냥 다음 날 학교나 직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요일 저녁의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근데, 어느 날 저녁이었나, 6살, 5살 꼬맹이 둘이 저녁 먹고 나서 춤 파티를 하자고 막 조르는 거예요. 그래서 음악 틀고, 좋아하는 노래 틀어놓고 막 뛰어놀았죠. 보통은 애들이 엄마들 와인 마시는 동안 자기들끼리 놀이방에 가서 노는데, 그날은 달랐어요. 애들이 엄마들이랑 같이 놀고 싶어 했던 거죠. 그래서 정말 신나게 놀았어요. 팔 흔들고, 음악 크게 틀어놓고, 거실에서 다 같이 춤추고... 얼마나 춤을 췄는지, 엄마들도 애들도 땀 범벅이 되고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서 막 웃고 그랬대요. 그러고 나서 완전 뻗어서 꿀잠 잤다는 거죠.

우리 다 알잖아요. 놀이가 아이들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 그런데 "어른스럽게" 된다는 게, 놀이를 버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실은, 계획 없는 즐거움이야말로 어른한테도 정말 중요하거든요. 자존심도 좀 내려놓게 해주고, 스트레스도 줄여주고, 행복감도 높여주고요.

그럼, 대체 "놀이"가 뭘까요?

놀이는, 결과보다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기 주도적인 활동이에요. 규칙이 있다면,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어야 하고요. 이런 일상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데는, 뭐 장비나 경기장, 규칙 같은 게 필요 없어요. 그냥 상상력만 있으면 돼요. 유일한 "규칙"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던 순간에서 기쁨을 얻는 거죠. 예를 들어, 저는 잔디 깎을 때마다 머릿속으로 새로운 무늬를 그리거든요. 그러면 잔디 깎는 게 그냥 노동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가 되는 거예요. "론 스트라이핑"이라고도 하는데, 저는 이게 너무 재밌어요. 뭐, 제가 재밌으면 그걸로 된 거죠.

놀이는 시간을 잊게 만들어요. 캘리그라피 연습을 하든, 라떼 아트를 배우든, 샤퀴테리 보드를 막 화려하게 꾸미든, 클레이 액세서리를 만들어보든, 새로운 앤티크 숍을 찾아 옆 동네로 드라이브를 가든, 우표를 모으든, 연예인 메이크업을 따라 해보든, 타로 카드를 보든, 롤러 스케이트를 타든, 정원 가꾸기를 하든, 동화책을 쓰든... 심지어 스포츠 리그에 참여하거나, 매주 보드게임 모임을 하는데 사람들이 엄청 경쟁적으로 변하더라도, 놀이가 될 수 있죠. 물론, 저는 보드게임 엄청 좋아하긴 하는데, 규칙 설명서가 톰 클랜시 소설보다 길면, 놀이보다는 그냥 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심지어 집 수리나 집안일도, 즐겁게 하면 시간이 엄청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잔디를 예술 작품처럼 깎을 때는 시간이 진짜 쏜살같이 지나가요.

최근에, 뉴욕 타임즈에서 감동적인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어떤 엄마가 자기 어린 딸이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내용이었어요. 그 딸의 가장 친한 친구는, 바로 평생을 함께 놀았던, 인형들이었던 거죠. 그런데 11살이 되면서 갑자기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인형들이 더 이상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게 된 거예요. 놀 줄을 잊어버린 거죠.

그 딸이 엄마한테 화를 내면서 "내 상상력이 사라졌는데 왜 아무도 말 안 해줬어!"라고 했대요. 완전 슬퍼하면서. 딸이 인형들이랑 나눴던 모든 대화와 감정들, 우정부터 사랑까지,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 거죠. 이제 남은 건 추억뿐이었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인형들을 다 줘버릴 거라고 했대요. "이제 인형들이랑 어떻게 놀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라면서요.

우리는 놀이를 자꾸 운동이랑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 보면 운동 스케줄에 스트레스받고, 놀이가 해야 할 일 목록의 일부가 돼버리는 거죠. 달력이나 점수판은 다 잊어버리세요. 끝내거나 이기려고 하는 놀이는, 외부적인 동기에 따른 행동이에요. 놀이조차도, 자발적이고, 자유롭고, 목표 지향적이지 않은 놀이조차도, 내면의 길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수 있어요. 기쁨을 추구하고,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는 놀이, 그게 진짜 놀이죠. 어쩌면 놀이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이기적인 비타민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렇게 하기 힘든 걸지도 모르고요.

그럼, 진짜 놀아야 할까요?

놀이 연구가들... 네,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이 꽤 오랫동안 힘든 싸움을 해오고 있어요. 놀이의 정의 자체가, "선택 사항"이어야 한다는 걸 포함하거든요. 그러니까, 일상적인 일정에 꼭 필요한 항목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죠. "선택 사항이라면, 꼭 해야 하는 거야? 해야 할 일 목록에 넣는 순간, 그 효과가 사라지는 거 아니야?"

정신과 의사이자 미국 놀이 연구소 소장인 스튜어트 브라운은, 계획 없는 즐거움이 어른으로서 우리의 행복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해요. 브라운은, 생후 10년 동안 놀이 결핍이 우울증, 공격성, 충동성, 경직된 사고, 감정 조절 장애, 의미 있는 관계 부족 등, 수많은 부정적인 결과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를 제시합니다.

놀이의 이점 목록은 정말 길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활력을 잃은 상태의 증상에 확실히 대응하는 것들을 강조하고 싶어요.

놀이는, 어른의 책임감 때문에 잃어버린 우리 안의 중요한 부분들과 다시 연결해 줍니다. 아직도 낄낄거리는 웃음이 나온다면, 당신 안에는 아직 어린아이가 살아있는 거예요.

놀이는, 사용하지 않으면 고갈되는 상상력과 다시 연결해 줍니다.

놀이는, 삶에 대한 흥분, 에너지, 유머를 불어넣어 줍니다.

놀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사를 되찾도록 도와줍니다.

놀이는,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를 높여줍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생물학적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를 포함한 많은 동물 종에서 진화해온 욕구인데, 생존에 기여하기 때문이죠. 심지어 짝짓기 상대를 유혹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공격적인 어른보다는, 유쾌한 어른이 더 매력적인 상대로 여겨질 수 있겠죠.

저항으로서의 놀이

제 좋은 날은, 아주 이른 아침의 놀라운 고요함 속에서 시작돼요. 저는 새벽 4시 30분쯤 일어나서 아내와 사랑하는 강아지들이 자는 동안 제 사무실로 가서 생각하고 글을 쓰는 걸 좋아해요. 아침에는 모든 것이 순수하고 가능성이 넘치죠. 생각도 더 명확해지고, 글도 쉽게 써지고요. 커피를 내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아이디어와 단어들을 이리저리 옮겨 다녀요. 이메일 확인은 나중으로 미루고, 아침 시간은 신성하게 지켜요. 그게 바로 저의 놀이 시간이죠. 저는 좋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고민하기 위해서 아이디어, 개념, 이론, 통계 등을 엮어서 놀아요. 이것이 제가 교수로서 제 "일"에 접근하는 방식이고, 저는 그걸 너무나 사랑합니다.

일과 삶은 놀이가 될 수 있고, 놀이와 삶은 일이 될 수도 있어요. 재미를 느끼는 것은 선택이지, 강요가 아니에요.

제 친구 중에 청소기 돌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청소기가 자기 강아지한테는 숙적이자 가장 좋아하는 놀이 상대라는 걸 깨달은 후, 가장 싫어하던 집안일이 강아지랑 신나게 뛰어놀고 장난치는 시간이 되었대요.

또 다른 친구는 아침 산책을 하면서 주변 풍경에 대한 노래를 즉흥적으로 만들어서 흥얼거린다고 해요. 누가 자기가 노래하는 걸 들을 뻔하면, 웃음을 참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대용량 허브바버 껌(꼭 포도 맛으로만 산다고 하더라고요)을 사서, 최대한 크게 풍선껌을 불어보는 연습을 한대요. 아직도 풍선껌을 불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제가 아는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엔지니어는 출근하기 전에 매일 아침 자기 방으로 들어가요. 저처럼, 아이디어와 함께 노는 시간을 갖는 거죠. 그리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랑 자기 생각을 아주 자세하게 토론하는 걸 좋아한대요. 그래서 그걸 막는 대신, 계속 아인슈타인이랑 "회의"를 하라고 격려해줘요. 왜냐고요? 그 친구가 재밌어하고, 그걸 놀이라고 표현하고, 천재와의 "만남"이 자기 일에 대한 기쁨과 목적의식을 고취시키기 때문이죠.

제가 생각하면서 노는 걸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수라는 직업에서 재미를 쏙 빼놓을 수 있는 직장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모두 놀이를 일종의 저항 행위로 생각할 수 있어요. 끊임없이 어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활동을 우선시하도록 강요받는 세상에서, 놀이를 통해 정신 건강을 지키는 방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시간은 돈이고, 우리의 가치는 청구 가능한 시간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낭비되는 시간은 우리가 가진 모든 기술을 수익화할 기회를 잃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잖아요.

지난 챕터에서 불안한 감정과 즐거운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죠? 일과 놀이도 마찬가지예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화면을 끈 다음, 종이비행기를 만들어서 동료 사무실로 날려 보내세요. 좋아하는 초콜릿바를 숨겨놓고, 바로 옆 사무실에서 강의하는 동료를 위한 작은 보물찾기를 만들어서 초콜릿바를 찾도록 하세요.

심지어 오전 중에 아이스 모카 커피를 사러 가는 것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되찾는 순간이 될 수 있어요. 오후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카페인 보충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잠시 마음을 풀고 자유로워지도록 자신에게 주는 휴식 시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순간에 대한 기대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실천 계획: 어떤 일에서든 재미를 빼고 싶다면, 그걸 "일"이라고 부르고 꼭 해야 하는 일로 만드세요. 저는 가족 여행을 일로 만드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일정 짜기, 엄격한 계획, 억지로 하는 상호 작용, 최고의 시간을 보내겠다는 의지 때문에 오히려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거죠. 매일 해야 하는 일상적인 일에 놀이 정신을 더할 수 있는 작은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 친구처럼 청소기를 돌리거나, 저처럼 잔디를 깎을 때 놀이의 마음가짐을 가져보세요. 매일 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힘들게 느껴질 때는, 그걸 완전히 뒤집어 보세요. 가족 저녁 식사를 위해 새롭고 정교한 요리를 만들어보는 건 어때요? 마치 톱 셰프 대회 참가자처럼 멋지게 플레이팅하면 보너스 점수를 받을 수 있겠죠. 아니면 아이의 보이 스카우트 베이크 세일을 위해 쿠키를 만들 때, 웃긴 장식을 해보는 것도 좋고요. 설거지를 하면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주방 조리대에서 나무 숟가락으로 드럼 치는 연습을 해볼 수도 있겠죠. 매일의 마음가짐을 놀이의 마음가짐으로 바꿔보세요.

놀이는 보호막이다

놀이는 어린 시절의 축소판이에요. 마치 나비의 번데기처럼, 삶의 화살과 칼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보호막이죠.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요. 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이유로, 빈곤, 인종 차별, 기타 역경과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 놀이가 육성되고 지원된다면, 회복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놀이 기회를 늘리면 예상보다 더 나은 삶의 결과를 장려하고, 빈곤의 악순환이 영속화될 가능성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폭력과 학대가 시작되었을 때, 저는 그 집에서 벗어날 때까지 완전히 놀이를 멈췄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다른 많은 아이들에게도, 학교는 놀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집에서 놀 수 있는 안전감을 잃어버리자, 다른 돌파구가 없었던 거죠.

제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교실은, 여러분에게도 익숙할 거예요. 학생들이 교실 앞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책상 줄, 거의 없는 신체 활동,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책상에서 혼자 숙제를 하거나 교과서 활동을 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죠.

직접적인 강의식 수업은 저에게는 악몽이었어요. 하지만 선생님들에게는 더 끔찍했을 거예요. 선생님들은 제가 책상을 두드리거나 다리를 흔드는 것을 멈춰달라고 매일 애원했거든요. 책상이 흔들려서 선생님들을 미치게 만들었죠. 저는 종종 벌을 받았는데, 칠판이나 종이에 똑같은 문장을 수백 번씩 엉망진창인 글씨로 썼습니다. "나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제가 8살쯤 되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도시로 이사 갔어요. 거기서 저는 "열린 교실"이라고 불리는 곳에 배치되었고, 처음으로 꽃을 피웠어요. 저는 벌을 받지 않았고, 성적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으며, 읽기 및 기타 기술에서 2년이나 앞서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1년 후, 우리는 다시 이사 갔습니다. 아버지는 건식 벽체 마감공이었고, 건설 경기가 더 좋은 플로리다로 이사해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저는 직접적인 강의식 교실로 돌아왔고, 문제아가 되었죠.

어린 시절 저에게 완전한 해방감을 주었던, 소위 열린 교실에서의 그 축복받은 1년은, 1960년대 중반에 실시된 유명한 연구인 HighScope Perry Preschool Study와 매우 흡사한 교육 모델로 밝혀졌습니다. 이 연구는 모든 어린이가 흑인 청소년이고 모두 빈곤 속에서 살고 있는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유아 교육 개입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은 무작위로 "직접 교육" 그룹 또는 두 개의 "자발적" 교육 조건 중 하나에 할당되었습니다.

직접 교육 프로그램은 학업 기술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교사들은 워크북과 같은 준비된 자료를 사용하여 언어, 수학, 읽기에 대한 짧고 계획된 수업에서 어린이를 이끌었습니다. 두 개의 자발적 모델에서 한 모델의 교실은 읽기, 쓰기, 수학과 같은 뚜렷한 관심 주제 영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중심 경험은 어린이의 주도성을 장려하고,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며, 창의성, 음악, 움직임, 언어 및 문해력, 개체 분류 및 계산과 같은 기본적인 수학 연산을 통해 자기 표현을 촉진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두 번째 자발적 접근 방식은 전통적인 유치원 커리큘럼이었는데, 여기서 주요 목표는 어린이가 학업 기술보다는 사회적 기술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교사들은 때때로 수업 활동, 토론, 현장 학습을 조직했습니다. 종종 어린이들은 자신의 활동을 선택하고, 한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이동하고, 동료나 성인과 상호 작용할 자유가 있었습니다. 다른 두 가지 학습 모델과 달리, 유치원 접근 방식은 놀이를 장려했습니다. 놀이는 중심적이고 환영받는 활동이었고, 어린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직접 교육 교실에서 배우거나 적어도 배우려고 노력했던 아이들은 미국에서 가난하게 자라는 많은 아이들과 똑같이 매우 나쁜 결과를 겪었습니다. 자발적인 교실에서 배운 아이들은 미국에서 빈곤 속에서 자라는 또 다른 통계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이 어떤 자발적인 교실에 배치되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직접 교육 교실이 아닌 그 두 설정 중 하나에 있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파괴적이었습니다. 직접 교육 교실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의 특징이었던 불행한 결과 중 일부는 더 높은 학교 중퇴율, 더 많은 마약 거래 혐의, 5건 이상의 체포 기록, 혼외 자녀 출산, 공공 지원금으로 생활, 집 소유 실패, 실업 등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앞으로도 고용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연간 2,000달러 이상(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오늘날 약 17,500달러에 해당)을 벌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결과는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행히도 놀이 지향적인 사고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다른 교실의 아이들은 대체로 성공한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7세가 되었을 때, 그들은 집을 소유하고 좋은 생활을 할 가능성이 더 높았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고등학교 중퇴자, 미혼모, 공공 지원금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방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기 주도성을 주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놀도록 허용하는 것이 빈곤의 악순환을 끊는 데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주요 놀이 연구가 중 한 명인 조 프로스트는 유사한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어릴 때 놀이를 박탈당한 어린이는 불리한 상황에서 회복력이 감소하고, 자기 통제력이 낮으며, 사회적,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놀이는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닙니다. 특히 놀이가 우리 아이들의 더 밝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 놀이를 멈출까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놀이가 필요하고, 나이에 적합하며, 중요하다는 생각을 잃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순수한 놀이에는 덜 참여하고 게임에는 더 많이 참여합니다. 놀이와 게임 모두 아이들에게 협력하는 방법과 활동을 계속하고 싶다면 활동을 조정하는 방법을 사회화합니다. 놀이와 게임 모두 공감 능력을 장려하며, 특히 다른 사람의 관점을 취하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다른 참가자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동정심을 보이는 것을 장려합니다. 하지만 게임은 학교 성적처럼 가능한 바람직한 결과 때문에 일을 하도록 외부 동기를 장려하고, 단순히 즐기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도록 내부 동기를 저해하는 과정을 시작합니다.

게임은 성인의 축소판입니다. 때로는 아이들이 게임을 하면서 다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적으로, 때로는 감정적으로 다치기도 합니다. 때로는 게임으로 인한 고통이나 상처가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일 수도 있는데, 아이들이 특히 공개적으로 관람하는 게임에서 자신의 성과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운동장에서 머리를 숙이고 땅을 응시하며 눈물을 흘리며 풀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게임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자존감이 조건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때로는 노력보다는 성과의 질에 따라 얻어지기도 하고, 자아감은 투입보다는 전적으로 결과에 기반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게임은 정의상 놀이와는 다릅니다. 게임에는 명확한 결과가 있고 승자와 패자를 지명합니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거나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게임의 시작과 끝 사이에는 미리 결정된 규칙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게임은 "올바른" 방식으로 플레이하면 놀이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게임은 경쟁보다는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과정의 즐거움과 더 많은 상상력 구축 실험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특정 비디오 게임은 미션 지배보다는 세계 건설에 더 중점을 두어 최종 게임이나 점수 합계를 걱정하지 않고도 아름다움이나 놀라움의 작은 순간에 몰두하기가 더 쉽습니다.

게임 전문가인 C. Thi Nguyen 철학 교수는 Cards Against Humanity와 같은 파티 게임은 "임의성, 기술 부족, 의도적인 혼란"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썼습니다. 점수 합계와 승패 열을 염두에 두고 플레이하는 대신, 이러한 게임의 사회적 관행은 "가벼운 정신으로 플레이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놀이와 게임은 겹칠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Pinball: The Man Who Saved the Game이라는 훌륭한 영화를 봤습니다. 저는 한때 핀볼이 기술보다는 운에 따른 게임으로 간주되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도박의 한 형태로 여겨졌기 때문에 많은 도시에서 불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핀볼 머신은 실제로 미국인들이 국가 역사의 매우 어려운 시기인 대공황 동안 성취감과 행복감을 느끼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핀볼 머신 제작자 중 한 명은 행복 연구가들보다 수십 년 앞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당시 단순히 점수를 축적하고 승리를 쫓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게임을 설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핀볼 머신 설계자는 "무엇이 좋은 게임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게임은 다음과 같을 때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성취감을 제공합니다.

원인과 결과가 있으므로 플레이어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술을 사용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핀볼 머신에서 현대적인 수백만 명의 플레이어를 위한 비디오 게임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게임 디자이너에 따르면 이것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계속 게임에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은 성취감을 느껴야 하고, 당신이 달성하고 싶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어야 하고, 당신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게임은 당신에게 놀이의 모든 이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삶에 대한 얼마나 훌륭한 은유입니까.

너무 일찍 놀이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기

교수로서 저는 항상 제 학생들과 제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제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철학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때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미치도록 힘들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미있습니다. 제 학생들, 대부분 18세에서 23세 사이의 젊은 성인들은 사회적으로나 스스로 완전한 성인으로 여겨지지 않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말하자면 아이이고, 재미를 느끼고, 놀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모든 것을 과도하게 스케줄링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수업 전, 수업 중, 수업 직후에 제 학생들은 변함없이 아이폰을 꺼내 친구 및 가족과 연락합니다. 재미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확인하고 있지만 대부분 자신이 놓친 일에 대해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받고, 저녁이나 주말을 위해 미래의 재미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주말의 재미라는 개념조차도 어두운 면모를 띠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제 학생들은 과다 복용 또는 과다 복용의 위험과 같은 깊이 우려되는 주제에 대해 저에게 더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알코올뿐만 아니라 심각한 폭음에서 헤로인, 코카인, 옥시콘틴, 케타민, 펜타닐, 메스암페타민, 환각제 및 기타 다양한 암페타민에 이르기까지 현기증이 나는 불법 및 위험한 약물을 사용합니다. 단지 마리화나를 피우고 따뜻한 맥주 몇 병을 마시던 시대는 오래전에 제 학생들에게 "심각한 파티"라고 불리는 것에 의해 가려졌습니다.

제 진단은 제 학생들이 젊은 대학생이라는 "과도함"에서 일시적으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성과가 B+ 아래로 떨어지면 실패를 의미하고 의사, 변호사 또는 사업가가 되겠다는 미래 계획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겁에 질리고 두려워하는 아이들일 뿐입니다.

1990년대 후반에 교수로 처음 시작했을 때 저는 학생들과 회의 일정을 잡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학생과의 회의 일정을 잡는 것은 악몽이 되었습니다. 저 때문이 아닙니다. 회의를 한 번 예약하려면 약 5~10통의 이메일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9시에는 바쁘고, 11시에는 바쁘고, 점심은 안 되고, 여전히 바쁘고, 수업은 오후 내내 있고, 스포츠나 과외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적어도 5시부터 7시까지 시간이 있습니다. 바쁘고, 과도하게 스케줄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대학 캠퍼스에서 명예 훈장입니다. 이 학생들은 아직 어른이 아니지만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결코 배우지 못한 것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식적으로 성인이 되었을 때 놀이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수영장에 들어가면 서로의 머리에 공을 던지고, 끝에서 끝까지 경주하고, 팀을 만들고, 도전을 발명합니다. 어른들은 음, 시원하게 식히기 위해 몸을 담그거나 랩을 수영합니다. 그런 다음 수건으로 몸을 닦고 그릴을 켜서 저녁을 만듭니다. 거기에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저는 책이나 희곡을 쓰거나 영화를 쓰거나 감독하는 것과 같이 고도로 창의적인 분야에 있는 성인들은 아마도 자신의 직업을 통해 놀이에 참여하는 데 매우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프로 운동 선수나 레고 엔지니어는 자신의 최고의 근무일에 자신의 삶이 놀이로 가득 차 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어른들이 놀이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우리는 직업을 통해 놀고, 돈을 벌고, 우리가 성인의 형태로 만든 제품을 소비하는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우리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아이로 알았던 놀이가 어른이 되면서 레저가 됩니다. 우리는 레크리에이션에 참여합니다. 흥미로운 단어입니다, 레크리에이션은 라틴어로 recreare는 "다시 만들거나 갱신하다"를 의미합니다. 중세 영어와 고대 프랑스어에서 레크리에이션은 "정신적 또는 영적 위로"를 시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위로는 상실에 처한 사람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레저는 또한 중세 영어에서 발견되는 단어로 라틴어 licere로 거슬러 올라가며 "허용되다"를 의미합니다. 레저에 참여하는 것은 무언가를 허용받는 것입니다. 아마도 일로부터의 자유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일 것입니다.

건강한 라이프스타일과 워라밸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알려진 덴마크인들은 자신의 레저 시간을 fritid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유 시간"을 의미하며, 낚싯대, 등산화, 캠핑 장비와 같이 자신의 fritid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에 전념하는 전체 상점 섹션이 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레저의 명명과 추구가 일찍 시작됩니다. 학교의 방과 후 프로그램도 fritid라고 불리며, 이 동안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야외에서 강사의 눈에 띄지 않지만 주의 깊은 눈 아래에서 참여하고 싶은 활동을 선택하지만 활동은 아이가 주도하고 아이 중심적이며 공감 능력, 사회성 및 자립심을 구축하기 위해 아이의 발달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아이들이 7세가 될 때까지 공식 학교를 시작하지도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외에서 눈과 비를 맞으며 워크시트 없이 놀이를 하면서 인생의 첫 몇 년을 보낸 후에야 시작합니다.

독일 철학자 요제프 피퍼는 그의 책 레저: 문화의 기초에서 레저를 되찾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을 되찾는 것이며 "레저는 작업 과정에 대해 수직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레저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다시 일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새로운 힘을 얻더라도 레저는 우리 의미에서 신체적 갱신이나 더 나아가 추가 작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정신적 상쾌함을 제공함으로써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단지 '상쾌함'을 위해 레저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깊은 잠에서 오는 깊은 상쾌함과 같은 진정한 열매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진정한 상쾌함은 진정한 레저에서만 옵니다. 진정한 레저의 첫 번째 특징은 일, 가사, 가족 및 개인적인 의무로부터 자유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자유 시간과 함께 덴마크의 아이들처럼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기 때문에 무언가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놀이처럼 레저의 공유된 측면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합니다.

레저는 책을 읽거나 송어 낚시용 플라이 묶기에서 촛불 만들기, 퀼트, 정원 가꾸기, 자전거 타기, 하이킹, TV 또는 영화 시청, 합창단에서 노래하기, 연극이나 박물관에 가기, 여행하기, 외식하기 등 좋아하는 취미를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레저 활동 목록은 거의 끝이 없습니다.

당신이 레저로 생각하는 것이 내 형태의 레저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플라이 낚시를 좋아하지만 송어 플라이 묶기는 레크리에이션 형태가 아닌 일로 여길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놀이처럼 레저도 자유롭게 선택할 뿐만 아니라 당신과 당신만을 위해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레저가 단지 재미의 원천이기 때문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인의 경우 레저 활동은 5장에서 논의했듯이 개인적인 성장에 대한 욕구와 같은 추가적인 동기를 충족시키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결과에 기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을 배우는 것처럼 무언가를 연습하는 과정이 본질적으로 가치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더 잘하게 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최근 80세가 된 제 좋은 친구 한 명이 몇 달 전에 유화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비교적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은 계속해서 더 아름다워지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릴 때 하는 일을 하려면 집중력,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기, 놀라운 손재주, 유연성, 팔 힘,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고 쉽지도 않으며 그것이 요점입니다. 그녀는 다양한 측면에서 계속 나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녀는 유화 매체를 좋아하는데, 유화 매체를 통해 더 미묘함, 더 깊이, 더 많은 색상, 더 많은 밝기,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그림 부분을 계속해서 칠하고 때로는 다시 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것이 그녀에게 만족감, 즐거움, 때로는 기쁨까지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저는 최근에 자전거 타기로 돌아왔습니다. 자전거 타기를 더 잘하는 것은 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유익한 운동과 신체적 이점을 제공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가 자전거 타기로 돌아온 이유가 거의 되지 않습니다. 좋은 신체 건강은 단지 부수적인 이점일 뿐입니다. 저에게 자전거 타기는 자율성과 기분전환에 대한 제 욕구를 충족시켜 줍니다. 저는 자유로움을 사랑합니다. 저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며 제가 선택한 만큼 빠르고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지시하며 활동 자체가 어떤 결과보다 더 중요하므로 자전거 타기는 놀이의 모든 상자를 틱합니다. 저는 혼자 또는 아내와 함께 타는 것을 좋아하지만 특히 기술, 자동차 및 연료에 대한 의존도, 책상, 네 벽,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한 자유와 독립감을 얻기 위해 혼자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약 4년 전에 첫 번째 배를 샀고 지금은 그것을 팔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한동안은 재미있었습니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결국에는 배가 우리를 소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소유하려면 슬립을 임대하고, 서비스를 받고 수리하고, 날씨가 나빠지면 그것에 대해 걱정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유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이 필요한 레저는 즐겁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전거는 기본적인 것이고, 딜러 승인 정비공만 서비스를 할 수 있는 컴퓨터와 부품으로 점점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배와 자동차와 달리 지역 및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전거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수리하는 장비는 여전히 저렴하고 저는 제 물건을 직접 수리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이로 놀았던 것처럼 성인으로서도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긍정적이거나 유익한 감정, 경험 또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기로 선택합니다. 미리 정해진 규칙이 없는 놀이와 달리 많은 레저에는 제가 기존 규칙과 구조라고 부르는 것이 있습니다. 레저 활동을 하는 더 쉽거나 어렵고, 더 간단하거나 더 어려운 옳고 그름이 때로는 있습니다. 많은 레저 추구에서 참가자의 안전을 안내하는 상식적인 규칙과 법률이 있습니다. 부상과 사망은 일부 형태의 레저, 특히 보트 타기(그리고 예, 종종 술에 취한 채 보트 운전을 하기 때문에), 오토바이 타기, 심지어 제가 사랑하는 자전거 타기의 슬픈 현실입니다. 따라서 레저는 구조가 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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