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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오늘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볼까 해요. 음… 1930년대에, 그러니까 전 세계가 대공황으로 막 힘들어할 때, 독일은 진짜 빠르게 회복했거든요. 근데 문제는, 나치 이념 자체가 평화적인 경제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거죠. 아시잖아요, 히틀러.
1935년 3월에 히틀러가 뙇! 베르사유 조약 파기하고 재무장하겠다고 선언을 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나라들 입장에서는 진짜 골치 아픈 외교 문제가 생긴 거죠.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이라 유럽에 군대 보낼 생각도 없고, 영국이랑 프랑스 국민들은 당연히 1차 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전쟁 또 겪고 싶지 않고. 근데 히틀러는 재무장하고 국가의 힘을 키우겠다고 막 나서니까, 영국이랑 프랑스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거예요.
1930년대 외교전은 솔직히 좀 불공평했어요. 그게 단순히 영국이랑 프랑스가 무장이 잘 되어 있고 대공황 영향을 덜 받아서, 독일은 무장 해제된 상태고 경제도 엄청 안 좋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진짜 이유는 영국이랑 프랑스는 전쟁 가까이 가고 싶어하지 않았고, 또 다른 나라도 전쟁을 원치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죠. 혹시라도 또 끔찍한 전쟁에 휘말릴까 봐. 근데 히틀러는 생각이 달랐던 거예요. 독일 권력층 전체가 그랬고요.
영국이랑 프랑스의 정책은, 뭐랄까… 유화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죠. 히틀러한테 외교적인 승리를 조금씩 줘서, 작은 성공에 만족하게 만들고, 약속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전략이었던 거죠. 1935년에 영국 대사였던 에릭 핍스가 일기에 쓴 걸 보면, “히틀러를 서명으로 묶을 수 있다면, 약속을 지킬 수도 있다” 뭐 이런 생각이었던 거죠. "영국과 프랑스에 완전히 좋진 않지만, 이탈리아한테 너무 싫지만 않은 합의를 하면, 당분간 독일이 국제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다. 시간이 지나면, 히틀러도 늙을 거다” 뭐 이렇게 썼더라고요.
근데, 글쎄요… 그 전략이 성공하진 못했죠.
히틀러가 외교적인 움직임을 시작했을 때, 나름 강력한 논리들이 있었어요. 1차 세계대전 끝나고 맺은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독일 군대 규모가 10만 명으로 제한됐는데, 다른 나라들은 군대를 줄이지 않았거든요. 그럼 독일만 덴마크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해야 하냐? 이건 좀 불공평하다는 거죠. 그리고 나치 독일이 잔혹하고 억압적인 독재 국가라서 안 된다는 말은, 유럽 외교 무대에서는 설득력이 없었어요. 왜냐면, 다른 나라 정부들은 다른 나라가 자기 나라 안에서 뭘 하든 신경 안 쓴다는 생각이 꽤 깊게 뿌리 박혀 있었거든요.
유럽 외교에서 통하는 건, 어떤 마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언어를 쓰느냐, 그거였어요. 베르사유 조약이나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여러 조약들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최대한 언어 기준으로 국경선을 다시 그리려고 했거든요. 근데 독일은 좀 달랐던 거죠.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베를린뿐만 아니라 로마,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바르샤바, 빌뉴스, 파리, 심지어 부쿠레슈티에서도 살고 있었으니까요.
히틀러가 외국과의 관계에서 독일 군비 제한을 없애서 다른 나라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려고 하거나, 아니면 언어 기준으로 국경선을 다시 그려서 소수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정도였다면, 영국이나 프랑스는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거예요.
결국, 영국이랑 프랑스가 독일을 침략해서 히틀러를 몰아내고, 독일 민족주의를 더 자극할 불안정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우고 싶어했냐? 뭐, 솔직히 윈스턴 처칠만 그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처칠을 좀 엉뚱한 사람 취급했죠. 인도 자치에 반대했던 것도 틀렸고, 1925년에 영국 재무장관으로서 디플레이션을 밀어붙인 것도 틀렸고, 두 번이나 이혼한 월리스 심슨이랑 결혼하겠다는 에드워드 8세를 지지한 것도 틀렸고, 1차 세계대전을 프랑스나 벨기에가 아니라 터키에서 이기려고 했던 계획도 틀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까 독일 위협에 대한 처칠의 주장을 누가 믿겠어요?
대공황 시대에 프랑스랑 영국 정치 지도자들은 베르사유 조약 조항 하나하나 지키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독일이 서유럽 국가 공동체에 다시 합류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독일이 무장 해제된 상태라서, 소련 국경과 라인 강 사이에 힘의 공백이 생겼거든요. 폴란드랑 소련은 1920년대 초에 전쟁을 벌여서 소련군이 바르샤바 근처까지 갔다가 밀려난 적도 있었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강한 독일 군대가 공산주의 러시아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죠. 1930년대에 독일 육군, 해군, 공군이 조약 제한을 넘어서 엄청나게 커졌는데도, 영국이랑 프랑스는 사실상 아무것도 안 했어요.
히틀러는 1936년 3월에 또 베르사유 조약 조항을 어겼어요. 라인란트에 군대를 보낸 거죠. 라인란트는 1918년 이후에 비무장 지대로 지정된 독일 땅이었거든요. 영국이랑 프랑스는 또 다시 선택의 순간을 맞았는데, 이번에도 딱히 뭘 해야 할 이유를 못 찾았어요. 다른 유럽 나라들은 자기네 국경 안에 비무장 지대를 두고 있지 않았거든요. 독일한테만 비무장 지대를 유지하라고 하는 건, 독일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죠. 그리고 또, 그 조항을 지키려면 독일을 침략해서 히틀러를 몰아내고 꼭두각시 정부를 세워야 할 텐데…
히틀러는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어요. 오스트리아는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는 곳이었거든요.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독일 민족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고 19세기 후반에 오스트리아 독일인들을 독일에서 제외했던 정치적 오류를 바로잡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어요. 만약 연합군이 다른 유럽 국가들한테 적용했던 민족 자결 원칙을 독일한테도 똑같이 적용했다면, 바로잡을 오류도 없었을 거라는 거죠. 실제로 독일 군대는 오스트리아에 저항 없이 들어갔고, 환영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어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다음에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또 다른 이상한 국경에 관심을 돌렸어요. 바로 “주데텐란트”였죠. 체코슬로바키아 북쪽과 서쪽 국경은 중세 보헤미아 왕국의 국경을 따랐는데, 체코 국경 방어선이 다 거기에 있었거든요. 근데 그 지역에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일부는 억압받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독일에 합병해달라고 요구했고, 독일은 그런 불만을 부추겼죠.
영국 정부는 프랑스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고, 프랑스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어요. 체코슬로바키아는 산악 지역, 그러니까 국경 방어선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요. 하지만 영국이랑 프랑스 정부는 주데텐란트 사람들이 독일에 합류하는 걸 막으려고 전쟁을 하고 싶진 않았어요.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군사 자문관들은 2차 세계대전이 1차 세계대전 참호전의 끔찍함을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민간인들한테까지 가져올 거라고 걱정했거든요.
그리고 그들의 걱정은 현실이 됐죠.
전쟁을 피하려고 1938년 9월 29일부터 30일까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으로 가서 히틀러랑 합의를 봤어요.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합병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고, 영국이랑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한 거죠. 체코 대표들은 협상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어요.
체임벌린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환호하는 사람들이 박수를 쳤어요. 전쟁을 막았다는 거죠. 체임벌린은 “명예로운 평화를 얻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습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자기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죠. 처칠은, “앞으로 몇 주 안에 전쟁과 수치 중에서 선택해야 할 거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거의 확신한다”라고 썼어요.
히틀러는 1939년 3월 15일에 먼저 슬로바키아에서 분리 독립 운동을 지원한 다음에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합병했어요. 영국이랑 프랑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죠. 체임벌린은 “이 독립 선언으로 우리가 뮌헨에서 보장하려고 했던 국가가 내부 분열로 끝났다. 영국 정부는 더 이상 이 의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어요.
근데 이틀 만에 체임벌린은 생각을 바꿨어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해서는 아니었지만, 유화 정책에 대해서는 바뀐 거죠.
체임벌린은 폴란드랑 루마니아에 대한 안전 보장을 확대했어요. 폴란드나 루마니아에 대한 독일의 공격은 영국이랑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하는 이유가 될 거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거죠. 체임벌린은 이 약속이 히틀러의 추가적인 침략을 막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근데 왜 그래야 했을까요? 영국 군대랑 군함이 폴란드를 어떻게 도울 수 있었을까요? 히틀러는 영국이랑 프랑스가 허풍을 치고 있다고 결론 내렸죠. 그리고 동쪽으로 공격해서 유럽 러시아의 슬라브족한테 미국이 북미 원주민들한테 했던 짓을 똑같이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일어났던 것처럼, 히틀러는 독일이 거대한 곡창 지대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기대했던 거죠. 바로 우크라이나였어요. 우크라이나는 여러 시련을 겪은 끝에 대규모 기계화 농장을 운영하는 독일인들로 채워질 거라는 계획이었죠.
1939년 봄에 히틀러는 또 다시 국경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고 요구했어요. 이번에는 독일과 동프로이센을 나누는 “폴란드 회랑”에 갇힌 독일어를 쓰는 사람들을 되찾아야 한다는 거였죠.
만약 영국이랑 프랑스 외교 정책 담당자들이 냉철한 현실주의자들이었다면, 그냥 어깨를 으쓱했을 거예요. 히틀러가 동쪽으로 가고 싶어한다고? 그럼 가게 놔두자. 히틀러가 동쪽에서 전쟁을 계속하면 당분간 우리를 괴롭히지 않을 거고, 만약 히틀러가 서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그때 가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하지 않았죠. 폴란드랑 루마니아를 보장했고, 억제를 믿으면서 투자를 더 늘렸어요.
체임벌린이랑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억제가 실패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했던 것 같아요. 전쟁을 원치 않았고, 히틀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그러니까 히틀러도 허풍을 치는 거겠죠? 아무도 1차 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전쟁이 다시 일어나길 원하지 않잖아요?
한쪽은 전쟁에 가까워지는 건 싫지만,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고, 히틀러한테 충분한 외교적 승리를 줬으니까 선을 그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한쪽은 전쟁이 불가피하고, 지금 상황보다 낫고, 반드시 “생존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고요. 게다가 영국이랑 프랑스 정치인들은 패를 쥐고 있을 때도 꼬리를 내렸으니까, 패가 약할 때는 당연히 꼬리를 내릴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폴란드를 군사적으로 도울 입장도 아니었고요.
만약 영국이랑 프랑스가 꼬리를 내리지 않으면, 독일은 서쪽 국경에서 전쟁을 치러야 할 수도 있었어요. 그래서 히틀러는 스탈린과 소련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스탈린은 1930년대 중반에 파시즘에 맞서려고 반파시즘 국가들 사이에서 “인민 전선”이랑 “집단 안보”를 추구하면서도, 계속 히틀러한테 접근했어요. 히틀러는 관심이 없었지만, 1939년이 되어서야 소련의 중립이 폴란드를 정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깨달았던 거죠. 히틀러랑 스탈린은 폴란드를 부크 강을 기준으로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어요. 게다가 소련은 독일로부터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세 개의 발트 3국을 합병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죠.
스탈린은 엄청난 오판을 했던 거예요. 이 조약 때문에 히틀러는 폴란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소련을 상대로 세 번의 단독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됐거든요.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기 전까지 소련은 간신히 버텼어요. 미국 공장들과 물류 지원 덕분에 소련군은 먹고, 연료를 공급받고, 움직일 수 있었고, 미국 육군과 공군은 영국군과 미군이 전쟁의 주요 전선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해줬죠. 소련 입장에서는 1941년, 1942년, 그리고 1943년 상반기에 독일의 집중 공격을 받는 것보다 1939년에 강력한 영국과 프랑스를 동맹으로 삼아서 독일과 싸우는 게 훨씬 나았을 거예요.
스탈린, 아니 스탈린이 통치했던 소련에 대해서 이해하는 건 진짜 어려워요. 처칠은 그걸 “수수께끼에 싸인 미스터리 안에 든 불가사의”라고 불렀죠. 하지만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짐작해볼 수 있어요.
질문: 동무, 히틀러는 뭡니까?
답변: 히틀러는 자본가들의 도구입니다, 동무.
질문: 동무, 왜 히틀러가 소련을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고 싶어할까요?
답변: 우리의 원자재를 싸게 얻어서, 자본가들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동무.
질문: 그럼 우리가 히틀러한테 최대한 많은 원자재를 엄청 싸게 주면 어떻게 될까요, 동무?
답변: 그럼 침략하지 않을 겁니다, 동무. 침략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질문: 그럼 어떻게 될까요, 동무?
답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동무. 거대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제국주의자가 되고, 시장을 놓고 끔찍한 전쟁을 벌일 겁니다.
질문: 옳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요?
답변: 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했던 것처럼, 우리가 개입해서 사회주의 진영을 확장할 겁니다, 동무.
질문: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뭡니까, 동무?
답변: 히틀러가 원하는 원자재를 다 줘서 달래고, 우리의 때를 기다리는 겁니다, 동무.
아마 스탈린은 1차 세계대전이 다시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아요. 프랑스-독일 국경에서 참호전이 길어지면서 또 다시 젊은이들이 학살당하고, 자본주의 국가들이 쇠약해지고, 모스크바가 주도하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확실한 건 스탈린은 히틀러랑 일시적으로라도 손을 잡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몰랐다는 거예요.
한쪽은 시장 자본주의 국가들이 폭력적으로 경쟁하다가 망할 거고, 결국 프롤레타리아 천국이 올 거라고 확신했고, 다른 한쪽은 유대인-볼셰비키 음모가 자신들과 생존 공간 사이에 있는 실존적인 위협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거죠.
1939년 9월에 히틀러랑 스탈린은 군대를 보내서 폴란드를 나눠 가졌어요.
그리고 영국이랑 프랑스는 허풍을 치는 게 아니었어요.
자신들의 약속을 지켰죠. 히틀러와 나치 군대는 9월 1일 새벽에 폴란드를 공격했어요. 그날 오후에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자신을 비판하던 윈스턴 처칠을 전쟁 내각에 합류시키고는, 이틀 동안 완전히 무시했어요. 아무도 그 결정 과정을 모르겠지만, 나치 공격 50시간 뒤인 9월 3일 오전 9시에 영국 정부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오전 11시에 선전 포고를 했죠. 프랑스도 뒤따랐지만, 군대가 준비가 안 됐고 폴란드랑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폴란드는 한 달 만에 히틀러랑 스탈린한테 함락당했어요.
허풍은 아니었지만, 준비도 안 했던 거죠.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할 계획도 없었고, 만들 생각도 안 했어요. 그래서 폴란드가 함락된 후 8개월 동안 서부 전선은 조용했죠.
체임벌린이랑 달라디에, 그리고 1930년대에 영국이랑 프랑스를 다스렸던 다른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건 흔한 일이죠. 히틀러가 약했을 때 없애지 못했고, 강해졌을 때 싸울 준비도 안 했고, 미국이랑 소련을 끌어들여서 반파시즘 연합을 구축하지도 못했다는 거죠. 미국이랑 소련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어도, 시도조차 안 한 건 잘못이라는 거죠.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어요. 나치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에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나라는 달라디에의 프랑스밖에 없었어요. 다른 나라들은 히틀러가 선전 포고를 하거나, 그냥 공격할 때까지 기다렸죠. 스탈린의 러시아 같은 경우에는 공격받기 전에 독일이랑 불가침 조약을 맺고 대부분 잘 지키고 있었고요.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 나라는 영국밖에 없었어요. 물론 영국은 다른 선택이 없을 때, 그리고 정치적 생존이 걸렸다고 생각했을 때만 선전 포고를 했고, 선전 포고를 한 다음에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몰랐죠.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폭정을 막기 위해서 제국이랑 국민들을 위험에 빠뜨릴 각오를 했던 거예요. 에두아르 달라디에랑 네빌 체임벌린이 보여준 제한적인 용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그 누구보다 더 많은 걸 보여줬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의 용기는 보상받지 못했죠.
1940년 5월 10일부터 6주 동안 프랑스는 함락당했어요. 나치는 프랑스 항복을 강요하고, 영국군을 덩케르크에서 몰아냈는데, 거기서 모든 장비를 버리고 와야 했죠. 하지만 놀랍게도 윈스턴 처칠이 이끌던 영국은 평화 협상을 하지 않았어요. 계속 싸우면서 히틀러가 영국 해협을 건너서 침략하도록 도발했죠. 히틀러는 침략하지 않았어요. 1940년에는 낮에 폭격기를 보내고, 나중에는 밤에 폭격기를 보냈죠. 베르너 폰 브라운의 로켓 개발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1944년에 “V” 시리즈 보복 무기를 만들었고요.
하지만 프랑스가 함락된 후에는 원래 계획대로 동쪽으로 군대를 돌렸어요. 1941년 6월 22일에 나치 군대는 소련을 공격했어요. 하지만 경제랑 사회를 총력전에 완전히 동원하지는 않았고, 당장 쓸 수 있는 걸로 공격했던 거죠.
스탈린은 처음에는 나치를 “도발”할까 봐 군대에 반격하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그 결과 소련 공군은 전쟁 첫날에 지상에서 파괴됐고, 국경에 있던 소련군은 그 자리에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죠. 스탈린의 악행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어요.
스탈린은 자기가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군대에서 숙청하고 또 숙청했어요.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하면 경력을 망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던 거죠. 나치가 공격했을 때 소련군은 1939년 이전에 구축해 놓은 방어선에서 배치됐어요. 폴란드 분할 이후 국경에 대한 방어선을 완전히 배치하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소련은 1941년 6월 말, 7월, 8월 초에 리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르보프, 그리고 국경 근처에서 나치가 공격했던 군대만큼 크고 장비도 잘 갖춰져 있었지만, 훈련이나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군대를 잃었던 거예요.
하지만 1941년 8월에 나치는 보급선이 끊어져서 진격을 멈췄어요. 스탈린이랑 소련군 최고사령부(스타프카)는 상황을 잘못 판단해서 8월 말, 9월, 10월 초에 스몰렌스크랑 키예프 근처에서 반격을 시도하면서 나치가 공격했던 군대만큼 크고 장비도 잘 갖춰져 있었지만, 훈련이나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두 번째 군대를 잃었어요. 후퇴를 거부했거든요. 그래서 나치가 러시아를 침공한 지 4개월 만에 거의 4백만 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혔죠. 그리고 나치는 다시 공격했어요. 1941년 12월 7일,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때쯤, 나치 군대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하르코프, 로스토프 도시 외곽에 있었는데, 1941년 나치-소련 국경에서 평균 620마일 떨어진 곳이었죠.
하지만 소련은 세 번째 군대를 가지고 있었어요. 나치가 공격했던 군대만큼 컸지만, 이번에는 장비가 덜 갖춰져 있었죠. 이 군대는 1941년 가을과 겨울 전투에서 버티고 반격했어요.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아니, 참전하게 됐을 때(달라디에의 프랑스랑 체임벌린의 영국을 제외하고는 자발적으로 히틀러와 전쟁을 시작한 나라는 없었죠), 1941년 12월 7일에 일본 제국 해군의 기동부대가 오아후 섬의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태평양 전쟁은 이미 5년째였어요. 일본이 1937년에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됐거든요.
유럽에서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을 1차 세계대전 없이 상상하기는 어려워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경제적, 정치적, 인적 피해가 유럽의 안정과 번영을 훼손했거든요. 또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그래요. 평범한 시대에는 스탈린이나 히틀러가 기회를 잡을 수 없었을 거예요. 지구 반대편도 마찬가지였죠.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은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데 큰 영향을 줬어요.
1차 세계대전은 일본 산업화에 간접적인 자극을 줬어요. 전쟁 중에는 유럽에서 아시아로의 수출이 사실상 중단됐거든요. 그럼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에서 수입했던 제품을 어디서 사야 할까요? 성장하고 산업화되고 있던 일본 제국이 답이었죠. 일본의 산업 생산량과 제품 수출량은 1차 세계대전 동안 거의 4배로 늘었어요. 일본 상품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물가도 2배 이상으로 올랐죠.
전쟁이 끝난 후 유럽 국가들은 다시 아시아로 수출하기 시작했고, 새롭게 확장된 일본 산업은 엄청난 경쟁에 직면했어요. 일본 경제는 1923년 도쿄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5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가 사망했죠.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본 산업화는 계속됐고, 1920년대에는 제조업이 농업을 넘어섰어요.
일본 제조업은 원래 다른 나라들처럼 미혼 여성한테 의존했어요. 고용주 입장에서는 이 인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험이 부족하고 이직률이 높다는 거였죠. 그래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본 제조업체들은 단기적인 미혼 여성 노동자들과 장기적인 숙련 남성 노동자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그 결과 “종신 고용 제도”라는 게 생겨났죠. 일본 남성 노동자들은 학교를 졸업하거나 견습생으로 채용되면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대가로 임금 인상, 의료 혜택, 연금 등의 혜택을 받으면서 평생 고용을 보장받았어요. 일본 사회에 잘 맞아서 이 종신 고용 제도가 번성했을 수도 있고, 심각한 경기 침체를 피해서 제조업체들이 노동자를 해고할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어요.
1930년대에 일본 경제의 중심은 면직물, 가구 제조, 의류, 그리고 비교적 작은 중공업이었어요. 이 현대적인 제조 부문은 재벌이 지배했는데, 재벌은 임원들을 교환하고, 협력하고, 서로의 주식을 소유하고, 같은 은행과 보험 회사에 의존하는 기업 집단이었죠. 일본의 금융 자본주의 형태는 독일을 많이 모방한 것처럼 보였어요.
대공황은 1930년에 일본에 약하게 왔어요. 수출, 특히 비단 수출이 급격히 감소했고, 금본위제를 고수하면서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 압력을 받았죠. 일본은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정부 지출, 특히 군사비 지출을 늘리면서 대응했어요. 대공황이 일본 경제를 강타하지는 않았지만,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드러냈죠.
그래서 1931년에 일본 정부는 팽창주의로 돌아섰어요. 만주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는 만주국이라는 일본의 괴뢰 국가로서 “독립” 선언으로 이어졌죠. 팽창 다음에는 재무장이 따랐고, 재무장 다음에는 1937년에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 뒤따랐어요. 정부의 전쟁 물자 주문과 만주 인프라 건설을 위한 자본재 주문은 일본 산업 생산에 큰 도움이 됐죠. 일본은 1937년부터 군수 경제를 받아들여서 군함, 비행기, 엔진, 라디오, 탱크, 기관총 등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중국과의 전쟁을 계속하려면 석유가 필요했고, 석유는 미국이나 지금의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수입해야 했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 제국 확장을 막기 위해서 압력을 넣으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1941년 7월 25일,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남부를 점령한 다음 날에 루스벨트는 미국에 있는 모든 일본 금융 자산을 동결하라고 지시했죠.
일본 정부는 미국에서 석유를 사서 일본으로 운송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어떻게 돈을 내야 할까요? 자산이 동결됐으니까요. 일본 정부가 석유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자금 해제를 요청했지만, 딘 애치슨 국무부 차관보 사무실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관료주의 때문이었을까요? 정책 때문이었을까요? 정책이라면 누구의 정책이었을까요? 루스벨트나 육군, 해군이 자산 동결이 사실상 석유 금수 조치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12월 7일 전에 알았는지도 불분명하고, 그 금수 조치가 인도네시아산 석유에도 적용됐다는 사실도 몰랐을 거예요. 네덜란드 식민 당국이 달러로 지불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요.
그래서 미국은 자산 동결을 통해서 사실상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던 거죠. 미국산 석유뿐만 아니라 모든 석유를요. 석유 수입 없이는 일본 군사 기계를 돌릴 수 없었죠. 금수 조치는 일본에게 미국의 요구에 따르거나 전쟁을 시작해서 적어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유전을 점령하는 선택지를 제시했던 거예요. 예측 가능했고, 예측했어야 했고, 그에 맞춰서 대응했어야 했죠. 미국 육군이랑 해군이 실제로 채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경계를 태평양에서 유지했어야 했고요.
지도자들이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던 선택에 직면한 일본군은 선제공격하기로 결정했어요. 1941년 12월 7일에 태평양에 있는 영국, 네덜란드, 미국 군대와 영토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죠. 가장 유명한 건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들이 침몰했다는 거지만, 가장 큰 피해는 필리핀의 클라크 필드 공군 기지에 대한 공격으로 B-17 폭격기 부대가 파괴됐다는 거예요. 그 부대가 일본의 해상 침공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일본 제국이 진주만을 공격하지 않고, 아돌프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거예요. 1941년 후반 미국 여론은 영국과 소련이 히틀러랑 싸울 수 있도록 충분한 무기를 지원하되, 미국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보내지 말자는 쪽이었거든요. 만약 그런 여론이 미국 정책에서 계속 우선시됐다면,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2차 세계대전 참전국의 범위는 넓어졌다 좁아졌다 했어요.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폴란드가 나치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고, 나치 독일과 소련은 1939년 9월 말까지 폴란드를 점령했어요. 소련은 핀란드를 공격했고, 1940년 겨울과 봄에는 핀란드가 비겼고 평화를 맺었죠. 1940년 봄에는 독일이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를 공격해서 점령했고, 이탈리아는 독일 편에 합류했죠. 1940년 여름에는 영국만 나치 독일과 싸우고 있었어요. 1940년 후반과 1941년 초에 영국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동맹국으로 얻었지만, 1941년 봄에 나치 독일한테 점령당했죠. 1941년 여름에 나치 독일은 소련을 공격했고, 1941년 12월 7일에 일본 해군은 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영토를 공격했어요. 나치 독일은 그 다음 날 미국에 선전 포고를 했고요. (신기하게도 일본은 소련과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때 전쟁은 진정으로 세계적인 전쟁이 됐죠.
그건 “총력전”이었어요.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미국 국내 총생산의 약 40%, 영국 GDP의 약 60%가 전쟁에 투입됐어요. 약 6천만 명(플러스마이너스 1천만 명)이 전쟁 중에, 전쟁으로 인해서 사망했죠.
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망자만 생각해봅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유럽에서 4천5백만 명, 아시아에서 1천5백만 명이 폭력이나 기아로 사망했을 거예요. 그 숫자의 절반 이상이 소련 사람들이었죠.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국경 서쪽에서도 20명 중 1명 정도가 사망했고, 중앙 유럽에서는 12명 중 1명 정도가 사망했을 거예요. 1차 세계대전 때는 사망자의 압도적인 비중이 군인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때는 사망자의 절반도 안 됐죠. 정확한 숫자는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사망자 수가 그 점을 보여줍니다.
유럽 유대인: 6백만 명(70%)(3분의 1은 폴란드인)
폴란드: 6백만 명(16%)(3분의 1은 유대인)
소련: 2천6백만 명(13%)
독일: 8백만 명(10%)
일본: 270만 명(4%)
중국: 1천만 명(2%)
프랑스: 60만 명(1%)
이탈리아: 50만 명(1%)
영국: 40만 명(1%)
미국: 40만 명(0.3%)
전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전술적, 작전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어요. 1939년 9월 폴란드 캠페인, 1940년 5월과 6월 프랑스 캠페인, 1941년 6월 22일부터 연말까지 러시아 캠페인 초기 6개월의 주요 캠페인 세 가지를 살펴보죠.
1939년 폴란드 캠페인에서 나치는 4만 명의 군인을 잃었고, 폴란드는 20만 명을 잃었죠. 폴란드는 또한 약 1백만 명이 포로로 잡혔어요. 1940년 프랑스 캠페인에서 나치는 16만 명의 군인을 잃었고, 연합군은 36만 명을 잃었죠. 그리고 연합군은 또한 2백만 명의 군인이 포로로 잡혔어요. 1941년 러시아 캠페인 초기 6개월 동안 나치는 1백만 명의 군인을 잃었고, 러시아는 4백만 명을 잃었죠. 그리고 러시아는 4백만 명의 군인이 포로로 잡혔어요.
나치는 단순히 전쟁을 더 잘했어요. 급강하 폭격기, 탱크 부대, 기습 공격, 측면 공격, 참호전을 이해했죠. 나치가 건설한 독일군은 군인 수가 10만 명밖에 안 됐지만, 끔찍할 정도로 전술적으로 우월한 수준까지 발전시켰어요. 이게 2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