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Content

Calculating...

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음, 오늘 뭐 얘기해볼까 하다가… 갑자기 다니엘 카네만이 생각나서, 그 사람 얘기를 좀 해볼까 해요. 다니엘 카네만, 아시죠? 그 행동 경제학으로 노벨상도 받은 양반인데.

근데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여러 면에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특히 자기 기억력에 대한 불신이 좀 남달랐다고 하더라고요. 막 학기 내내 강의를, 그것도 대본 없이 술술 풀어냈대요. 학생들은 뭐 거의 교과서를 통째로 외운 줄 알았다나. 근데 정작 자기 과거 얘기에 대해서는 기억을 잘 못 믿겠다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 기억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고 했다네요.

자기 삶의 신조 자체가 회의주의였나 봐요. 옛날에 그 사람 제자였던 사람이 "카네만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심하는 거였다"라고 했대요. 그게 뭐 더 깊이 파고들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아니면, 그냥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숨으려고 그런 건지도 모르죠. 하여튼, 자기가 겪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기억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의심을 했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건 몇 가지 있겠죠. 예를 들어서, 1941년 말쯤, 아니면 42년 초였나… 하여튼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나서 한 1년쯤 뒤였을 거예요. 통행금지 끝나고 나갔다가 길에서 딱 걸린 거죠. 그때 유대인들은 옷에 노란 별, 그 다윗의 별을 달고 다녀야 했잖아요. 그걸 달고 학교 가는 게 너무 창피해서, 매일 아침 30분 일찍 학교에 갔대요.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는 옷을 뒤집어 입고.

그러던 어느 날, 늦게 집에 가는데 독일 군인을 만난 거예요. 검은색 제복을 입었는데, 그게 다른 독일 군인보다 더 무서운, 특별히 뽑힌 나치 친위대들이 입는 옷이었다고 하더라고요. 노벨상 위원회에서 자서전 써달라고 했을 때, 그때 쓴 글에 그렇게 썼대요. 막 발걸음을 빨리 했는데, 그 군인이 자기를 막 뚫어지게 쳐다보더래요. 그러더니, 막 손짓을 하더니, 자기를 안아 올렸대요. 옷 안쪽에 있는 별을 볼까 봐 엄청 걱정했는데, 그냥 독일말로 막 뭐라고 하면서 엄청 반갑게 대해줬대요. 그러더니 지갑에서 남자애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고, 돈도 좀 줬대요. 그때 엄마 말이 맞다는 생각을 더 굳게 했다고 하더라고요. 엄마가 항상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재밌다"라고 했었나 봐요.

그리고 1941년 11월에 아버지, 아버지가 "대숙청" 때 끌려갔던 것도 기억한대요. 유대인들 막 잡아다가 강제 수용소로 보냈잖아요. 카네만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그냥 사랑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가 막 빛나는 사람 같았대요. 아버지는 파리 외곽에 있는 드랑시라는 임시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 원래 700명 정도 살던 아파트에 유대인 7천 명을 막 쑤셔 넣었다고 하더라고요. "엄마랑 그 감옥에 갔던 기억이 나요." 카네만이 회상하기를, "귤색 건물이었는데,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긴 하는데 얼굴은 잘 안 보였어요. 여자들이랑 애들 목소리도 들리고. 그리고 그 감옥 경비병이 '여기 생활은 끔찍할 겁니다. 걔들은 과일 껍질이나 야채 껍질 같은 거나 먹을 수 있을 거예요'라고 했던 것도 기억나요." 드랑시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그냥 강제 수용소로 가는 중간 기착지였어요. 거기 가면 애들이랑 엄마들은 격리되고, 아우슈비츠행 기차에 실려 가는 거죠.

근데 아버지, 아버지가 유진 쉴러 덕분에 6주 만에 풀려났대요. 쉴러가 프랑스 화장품 회사, 로레알 창업자였거든요. 아버지는 거기서 화장품 개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참 뒤에, 쉴러가 나치 도와서 프랑스 유대인들 잡아서 죽이는 데 앞장섰다는 게 밝혀졌잖아요. 근데 희한하게도, 자기 핵심 엔지니어는 풀어줬더라고요. 쉴러가 독일 사람들 설득해서 카네만 아버지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핵심 인물"이라고, 그래서 파리로 돌려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아버지 돌아온 날, 그날 기억이 생생하대요.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걸 알고, 뭐 좀 사러 갔어요. 집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더니,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시더라고요. 제일 아끼는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몸무게가 45kg밖에 안 나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었어요. 아무것도 안 드시고, 우리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계셨죠. 그게 정말 기억에 남아요."

쉴러도 더 이상 파리에서 그들을 보호해줄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도망쳤어요. 1942년에는 프랑스 국경이 다 막혀서 안전한 곳으로 가는 확실한 길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다니엘, 다니엘 누나 루스, 그리고 부모님 에프라임이랑 라헬은 남쪽으로 도망갔어요. 거기에는 비시 정부가 명목상으로 통치하고 있었죠. 가는 길에 진짜 위험한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많았대요. 다니엘은 헛간에 숨었던 것도 기억하고, 아버지가 파리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는 가짜 신분증에 철자가 틀렸던 것도 기억한대요. 다니엘이랑 누나, 엄마 이름이 "카데르"로 되어 있었고, 아버지 성은 원래 "카이드레"였는데. 안 들키려고 아버지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했고. 엄마는 프랑스어를 이디시 억양으로 해서, 엄마 대신 말해야 했대요. 엄마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항상 남편 탓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지 않았으니까 2차 세계 대전 때도 안 그럴 거라고 잘못 생각해서 파리에 남았던 거라고. 엄마는 계속 그렇게 생각 안 했대요. "엄마가 아버지보다 더 일찍 끔찍한 운명을 예감했다는 걸 기억해요. 엄마는 비관적이었고, 아버지는 낙관적이었죠." 다니엘은 자기가 아버지보다는 엄마를 더 닮았다는 걸 그때 이미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되게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나 봐요.

계속 불안에 떨면서, 1942년 겨울이 다가올 때쯤 뤼앙레뱅이라는 해안 마을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쉴러 덕분에 집을 하나 얻었고, 아버지 연구실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부모님은 다니엘을 학교에 보냈지만,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너무 똑똑해 보이지 말라고 경고했대요. "유대인이라는 게 들통날까 봐 걱정했던 거죠." 그 시절에 대해서 다니엘이 기억하는 건 늙은이 같고, 책만 파는 애 같았다는 것뿐이래요. 자기 생각과 몸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거의 못 느꼈대요. 운동 신경도 너무 둔해서, 애들이 "걸어 다니는 시체"라고 불렀다고. 체육 선생님은 학업상 줘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기도 했대요. "무슨 일에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면서. 그래도, 똑똑하고 강한 정신력은 가지고 있었대요. 자기가 커서 뭐가 될지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머리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대요. 머리만 있고 몸은 없는 그런 사람. 이제는, 사냥꾼한테 쫓기는 토끼 같은 자기 모습을 상상한다고 하더라고요. 살아남는 게 유일한 목표인.

1942년 11월 10일, 독일군이 프랑스 남부를 점령했어요. 검은색 제복을 입은 독일 군인들이 버스에서 남자들을 끌어내서 옷을 찢고, 포경 수술을 했는지 확인했대요. "잡힌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다니엘이 회상하길. 아버지는 독실한 무신론자였는데, 그래서 젊은 시절에 유대교 현자들이 전해 내려오는 빛나는 사상을 버리고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왔었거든요. 다니엘은 그때 아직 신을 믿는 걸 포기할 생각이 없었대요. "부모님과 같은 모기장 안에서 잤어요. 부모님은 큰 침대에서, 저는 작은 침대에서 잤는데, 그때 9살이었죠.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제가 바쁘신 거 알고, 힘든 시기인 것도 알아요.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을게요. 그냥 하루만 더 살게 해주세요'라고요."

살아남기 위해서, 다시 도망을 쳤어요. 이번에는 코트다쥐르를 따라서 카뉴쉬르메르로 갔는데, 거기에는 옛날 프랑스 장교가 지휘하는 곳이 있었대요. 다니엘은 그 후 몇 달 동안 집에만 갇혀서 책만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대요.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몇 번이나 읽고, 영국에 푹 빠졌대요. 특히 필리어스 포그를 좋아했다고. 프랑스 장교는 베르됭 전투 기록을 엄청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다니엘이 그걸 다 읽어버렸대요.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죠. 아버지는 해안가에 있는 연구실에서 계속 일했고, 주말마다 버스 타고 가족 보러 왔대요. 금요일 밤에는, 다니엘이 엄마랑 같이 정원에 앉아서 엄마가 꿰맨 양말을 쳐다보면서 아버지 기다렸대요. "우리는 산에 살았는데, 버스 정류장이 보였어요. 아버지가 무사히 오실지 항상 몰랐죠. 그때부터 기다리는 게 너무 싫었어요."

비시 정부랑 현상금 사냥꾼들 덕분에, 독일군이 유대인 잡는 효율이 엄청 높아졌대요. 아버지는 당뇨병이 있었는데, 병원 가는 게 병보다 더 위험했대요. 그래서 또 도망쳤어요. 처음에는 호텔에 숨었고, 마지막에는 리모주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 술집 뒤편 닭장에 숨었대요. 거기에는 독일 군인은 없고, 프랑스 민병대만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독일군 도와서 유대인 잡고, 프랑스 내부 저항 세력 없애는 일을 했다고. 다니엘은 아버지가 어떻게 거기 찾았는지 모르지만, 로레알 사장이랑 관련 있을 거라고 생각한대요. 회사에서 계속 음식 꾸러미를 보내줬거든요. 집 가운데 칸막이를 쳐서 누나 개인 공간을 만들어줬지만, 닭장은 사람이 살 데가 아니었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문이 얼어붙기도 했대요. 누나가 난로 옆에서 자다가 잠옷 태워먹기도 하고.

기독교인으로서 의무를 다하려고, 다니엘 엄마랑 누나는 매주 일요일 교회에 갔대요. 10살 된 다니엘도 학교에 다시 갔는데, 닭장에 있는 것보다 학교에 있는 게 더 나았대요. 시골 학교 애들은 뤼앙레뱅 애들보다 수준이 더 낮았고, 선생님은 착했지만 별로 아는 게 없었다고. 다니엘이 기억하는 유일한 수업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거였는데, 너무 터무니없는 내용이 많아서 선생님이 잘못 가르친 거라고 생각했대요. "제가 '절대 그럴 리 없어요!'라고 했죠.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엄마가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다니엘은 완전히 믿을 수가 없었대요.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엄마 옆에서 자다가 밤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려고 엄마 몸을 넘어서 갔는데, 엄마가 깨서 자기가 자기 위에 있는 걸 알고 깜짝 놀랐대요. "엄마가 너무 놀라서, '아, 진짜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죠."

애였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꿰뚫어 보려고 하는 걸 좋아했대요. 왜 저렇게 생각하는지,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다른 사람한테 직접 경험한 건 별로 없었대요. 학교도 다녔지만, 선생님이나 친구들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친구도 없었대요. 그냥 아는 척만 해도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근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이랑 거리를 두고 살면서 재밌는 행동을 많이 봤대요. 학교 선생님이나 술집 사장님은 자기가 유대인인 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대요. 그렇지 않고서야, 10살짜리 애가 시골 촌놈들만 다니는 학교에 왜 다니겠어요? 옷 잘 입는 네 식구가 왜 닭장에 웅크리고 살겠어요? 근데 티를 하나도 안 냈대요. 선생님은 자기한테 우등 점수를 주고,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술집 사장님 앙드리에 부인은 가끔씩 심부름 시키고 돈도 좀 주고 (쓸 데도 없었는데), 심지어 엄마 꼬셔서 같이 매춘굴 하려고 하기도 하고.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진짜 정체를 몰랐겠죠. 다니엘은 특히 젊은 프랑스 나치 당원, 민병대원 하나를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 자기 누나한테 구애했다가 거절당했대요. 그때 누나가 19살이었는데, 영화배우처럼 예뻤대요. (전쟁 끝나고 그 나치 당원이 자기가 유대인 때문에 사랑에 빠졌었다는 걸 알고 엄청 분해했다고 하더라고요.)

1944년 4월 27일 밤, 그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대요. 아버지가 산책 가자고 했대요. 그때 아버지 입술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49살인데 훨씬 늙어 보였대요. "아버지가 이제 네가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어요." 다니엘이 회상하기를, "자기가 이 집 남자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엄마 도와서 집안일 하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자기가 이 집에서 제일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제가 쓴 시집을 아버지한테 줬어요. 그날 밤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 다니엘이 기억하는 건 엄마가 앙드리에 씨 부부랑 같이 하룻밤 지내라고 했던 것뿐이래요. 마을에 유대인 하나 숨어 있었는데, 엄마가 그 사람 찾아와서 아버지 시신을 다니엘이 집에 오기 전에 치워줬대요. 엄마가 유대인 방식으로 아버지 장례를 치렀지만, 다니엘은 안 데려갔대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아버지 죽음에 대해서 화가 났어요. 아프신 적도 없는데, 몸이 항상 안 좋았죠."

6주 뒤에,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어요. 다니엘은 군인 한 명도 못 봤고, 미국 군인들이 탱크 몰고 마을에 들어와서 애들한테 사탕 뿌리는 것도 못 봤대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났는데, 공기가 왠지 모르게 들떠 있었대요. 프랑스 민병대원들은 다 잡혀갔고, 어떤 사람은 총살당하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혔대요. 독일군이랑 잤던 여자들도 머리 빡빡 밀리고 끌려다니면서 벌을 받았대요. 12월까지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완전히 쫓겨났고, 다니엘이랑 엄마는 파리에 있는 전쟁 전에 살던 집이랑 재산으로 돌아갈 수 있었대요. 다니엘은 "내 생각 일지"라는 공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안 쓸 수가 없었겠죠"), 파리에 가서 누나 책에서 파스칼 글을 읽고 글 쓰는 데 불이 붙었대요. 그때 독일군이 프랑스 다시 점령하려고 마지막 반격을 하고 있었거든요. 다니엘이랑 엄마는 독일군이 방어선을 뚫을까 봐 엄청 무서워했대요. 그 시기에 작은 글 하나 썼는데, 왜 인간은 종교 없이는 살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대요. 서론에 파스칼 말 인용해서 "신을 믿으면 마음이 맑아진다"라고 쓰고, "정말 맞는 말이다"라고 평가했대요. 그러면서 종교랑 몸은 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거고, 그걸 통해서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주장을 폈대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기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대요. 나중에 자기 인생 돌아봤을 때, 어렸을 때 썼던 허세 가득한 글을 기억하면서 약간 뿌듯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대요. 자기 늙은이 같은 글쓰기 방식이 "자기 마음이랑 너무 가까웠고, 자기가 유대인으로서 쓸모없는 몸뚱이로 머리만 달고 다른 애들이랑 절대 어울릴 수 없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았다"고 생각했대요.

파리에, 전쟁 전에 살던 낡은 아파트에서 다니엘이랑 엄마는 망가진 녹색 안락의자 두 개밖에 못 찾았대요. 그래도 거기서 살았대요. 5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가 유대인이라는 걸 숨길 필요 없이 당당하게 학교에 다녔대요. 그러다가 키 크고 잘생긴 러시아 귀족 남자애 두 명이랑 잊을 수 없는 우정을 쌓았대요. 너무 외로웠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때 기억이 너무 좋고 잊을 수가 없었대요. 몇 년 뒤에, 자기 기억 확인하려고 그 귀족 형제들을 막 찾아다녔대요. 형제들은 한 명은 건축가가 되고, 한 명은 의사가 됐는데, 다니엘을 기억한다고 답장 보내주고 같이 찍은 사진도 보내줬대요. 근데 다니엘은 그 사진에서 자기를 못 찾았대요. 자기를 다른 사람이랑 착각한 거죠. 그 외로운 우정은 그냥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거였나 봐요.

다니엘 가족은 1946년에 자기들을 받아주지 않는 유럽을 떠났어요. 다니엘 아버지 가족은 리투아니아에 남아 있었는데, 유대인 6천 명이랑 같이 학살당해서 죽었대요. 다니엘 삼촌 하나만 살아남았는데, 선생님이었고, 독일군이 쳐들어왔을 때 마침 밖에 나가 있어서 살아남았다고. 그 사람도 다니엘 엄마 가족처럼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었대요. 그래서 다니엘 가족은 그쪽으로 이사 갔대요. 그 사람들이 오니까 난리가 났었대요. 짧은 영상도 찍고 (필름은 어디 갔는지 모르지만). 근데 다니엘이 나중에 이 일에 대해서 얘기할 때 유일하게 말하는 건 삼촌이 따뜻한 우유 한 잔 줬다는 거였대요. "그 우유 색깔이 아직도 기억나요. 너무 하얗고 예뻤어요. 5년 만에 처음 마시는 우유였거든요." 다니엘이랑 엄마, 누나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외할아버지 집에 들어갔대요. 거기서 1년 살고 나서, 13살 된 다니엘은 자기랑 하나님 관계를 끊었대요. "제가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나요. 예루살렘 거리에 있었죠. 제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하는데, 하나님이 진짜 있다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하나님은 내가 자위하는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죠. 제 종교 생활은 거기서 끝났어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물어보면 다니엘이 기억하는 건, 아니면 기억하기로 선택한 건, 그게 다래요. 7살 때부터, 아무도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고, 그렇게 했대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사람들하고 거리를 두고, 자기가 누군지 들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래요. 자기는 세계 최고의 심리학자가 될 운명이었고, 인간 오류 행동 연구 분야를 개척한 놀라운 권위자가 된 거죠. 연구 결과 말고도, 인간 의사 결정 과정에서 기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탐구할 거라고. 예를 들어서, 프랑스군이 독일군 1차 세계 대전 군사 전략 기억 때문에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 군사 전략을 잘못 판단한 것처럼. 그리고 유대인 잡아 죽이는 걸 자기 임무로 생각하는 히틀러 친위대가 독일 멀리 있는 어린애 기억 때문에 파리 길에서 만나서 안아줬던 어린애가 유대인인지 알아보는 걸 방해한 것처럼.

근데, 다니엘은 자기 기억에서는 그런 관련성을 많이 못 찾았대요. 항상 과거 경험이랑 자기 세계관은 거의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대요. 아니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랑은 관련이 없다고. 계속 물어보면 이렇게 말했대요. "사람들은 어렸을 때 경험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게 맞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한 친구들한테도, 홀로코스트 얘기는 한 번도 안 꺼냈대요. 진짜로, 노벨상 받고 기자들이 계속 귀찮게 하니까 그때서야 자기 삶에 대해서 조금씩 얘기하기 시작했대요. 옛날 친구들은 다 신문 보고서 자기 과거를 알게 된 거죠.

카네만이 엄마랑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전쟁이 터졌대요. 1947년 가을에, 팔레스타인 문제가 영국에서 유엔으로 넘어갔어요. 유엔은 11월 29일에 팔레스타인을 두 나라로 나누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대요. 새로 생긴 유대인 나라는 코네티컷 주 정도 크기였고, 아랍 나라는 그거보다 조금 작았대요. 예루살렘이랑 성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대요.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시민"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사실, 예루살렘 시민 중에는 아랍 혈통인 사람도 있고, 유대 혈통인 사람도 있었는데, 두 세력은 계속 서로 죽이려고 엄청 노력했대요. 다니엘 가족이 이사 간 아파트 건물은 두 세력이 마음대로 정한 경계선 근처에 있었는데, 총알이 다니엘 방으로 날아온 적도 있었대요. 다니엘이 있던 보이 스카우트 대장도 죽었고.

그래도, 다니엘은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대요. "예전이랑 느낌이 완전히 달랐어요. 싸우는 거니까 마음이 좀 편했죠. 유대인으로 유럽에서 살았던 기분이 너무 싫었고, 도망 다니는 짐승처럼 살기 싫었고, 도망치는 토끼처럼 살고 싶지 않았어요." 1948년 1월 어느 날 밤에, 너무 흥분했는데, 처음으로 유대인 군인들을 봤기 때문이래요. 38명 젊은 군인들이 자기네 아파트 지하에 모였대요. 아랍 군인들이 작은 나라 남부 지역에 있는 유대인 정착지 몇 군데를 봉쇄했는데, 이 38명 군인들이 자기 집 아래에서 출발해서 그 정착지 사람들을 구하러 가려고 했던 거죠. 가는 길에, 군인 세 명이 중간에 돌아왔는데, 한 명은 발을 삐었고, 다른 두 명은 그 사람 데려다주려고. 그래서 35명만 남았는데, "35인조"라고 불렀대요. 밤에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까지도 목적지에 도착 못했대요. 길에서 아랍인 목동을 만났고, 결국 풀어주기로 했대요. 적어도 다니엘이 아는 건 그거였대요. 근데 목동이 아랍 군인들한테 달려가서 알려줬고, "35인조"는 매복 공격당해서 다 죽고, 시체도 훼손됐대요. 그 재앙을 불러온 결정에 대해서 다니엘은 이해할 수가 없었대요. "걔네들이 왜 죽었는지 알아요?" 다니엘이 말하길, "목동한테 총을 쏠 수 없어서 죽은 거예요."

몇 달 뒤에, 의료팀이 적십자 깃발 달고 유대인 도시에서 스코푸스 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차를 몰고 갔대요. 스코푸스 산은 히브리 대학교랑 부속 병원이 있는 곳인데. 스코푸스 산은 아랍 국경선 바로 옆에 있어서 아랍 땅에 갇힌 유대인 섬 같았대요. 산으로 가는 유일한 길은 2.4km 길이 작은 길이었는데, 영국 정부가 관리하면서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해줬대요. 대부분 조용했는데, 그날은 폭탄이 터져서 맨 앞에 있던 포드 트럭이 멈춰 섰대요. 그러자 아랍인 기관총이 트럭 뒤에 있던 버스랑 구급차에 막 쏘아댔대요. 차 몇 대는 빨리 돌아서 도망쳤는데, 승객 가득한 버스는 꼼짝도 못했대요. 쏘아대던 게 멈추고, 차에 있던 78명은 다 죽었대요. 시체는 총알 구멍 투성이여서 다 같이 묻어야 했대요. 그중에는 엔초 보나벤투라라는 학자도 있었는데, 9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와서 히브리 대학교에 심리학과 세우려고 했었대요. 근데 지금은, 자기 시체랑 같이 묻힌 거죠.

다니엘은 자기가 죽을까 봐 걱정했다는 걸 절대 인정 안 했대요. "우리는 아랍 나라 5개국을 이겼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좀 믿기지 않지만, 하여튼 걱정은 없었어요. 세상이 망할 거 같다는 느낌은 안 들었어요. 그냥 몇몇 사람들이 적한테 죽은 것뿐이었죠. 근데, 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는 진짜 안심이 됐어요." 엄마는 자기가 그렇게 낙관적인 거 같지 않았대요. 14살 된 아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도망쳤대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고, 영국 군대는 다음 날 철수했대요. 그러자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군대랑 이라크, 레바논 일부 무장 세력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대요. 예루살렘은 몇 달 동안 갇혔고, 텔아비브 생활도 엉망이 됐대요. 지금 인터콘티넨털 호텔 옆에 있는 해변에 이슬람 사원 탑이 하나 있었는데, 아랍인들이 저격수 숨는 곳으로 썼대요. 유대인 애들이 학교 가는 길에 쏘려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총알이 막 날아다녔어요." 시몬 샤미르가 회상했대요. 그 전쟁 터졌을 때 텔아비브에 살았는데, 14살밖에 안 됐대요. 커서 외교관이 됐는데, 이집트랑 요르단 두 나라에 다 대사로 간 유일한 이스라엘 대사래요.

샤미르는 다니엘이 처음으로 제대로 사귄 친구래요. "반 애들 다른 애들은 다니엘이랑 친해지기 어려워했어요." 샤미르가 말하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안 좋아하고, 가려서 사귀었죠. 친구 한 명만 있어도 괜찮아했어요."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처음 왔을 때 히브리어를 못 했는데, 텔아비브 학교에 다닐 때는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했대요. 그리고 영어도 다른 애들보다 잘했고. "다들 다니엘이 엄청 똑똑하다고 생각했어요." 샤미르가 말하길, "제가 농담으로 '너 나중에 유명해질 거야'라고 하면 항상 불편해했어요. 점쟁이는 아니지만, 그때 진짜 잘 될 거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다니엘은 남들이랑 달랐는데, 그거는 다들 알 수 있었대요. 억지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그런 거죠. "반에서 유일하게 영어 발음 제대로 하려고 하는 애였어요." 샤미르가 말하길, "우리는 다 웃겼다고 생각했는데. 여러 면에서 우리랑 달랐어요. 어떻게 보면 아웃사이더였는데, 그거는 난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성격 때문이었죠." 다니엘은 14살짜리 애 같지 않고, 애 몸에 들어간 늙은 학자 같았대요. "항상 뭔가에 푹 빠져 있었어요." 샤미르가 말하길, "어느 날 자기 글을 보여줬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글은 보통 학교에서 시켜서 하는 건데, 숙제할 때만 하는 거잖아요. 다니엘은 수업 내용이랑 상관없는 주제로 엄청 길게 썼는데, 그게 너무 인상 깊었어요. 글에서 영국 신사랑 헤라클레스 시대 그리스 귀족 성격을 비교했는데." 샤미르는 다른 애들은 어른들한테서 배우려고 할 때, 다니엘은 책에서, 자기 생각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는 걸 알았대요. 샤미르가 말하길, "이상, 아니면 모범 같은 걸 찾고 있었던 거 같아요."

이스라엘 독립 전쟁은 10개월 동안 계속됐대요. 전쟁 전에는 유대인 나라 땅이 코네티컷 주 정도 크기였는데, 전쟁 끝나니까 뉴저지 주보다 더 커졌대요. 이스라엘 국민 중에 1퍼센트가 전쟁에서 죽었고 (뉴저지 주 9만 명 정도), 아랍인 사망자 만 명 넘었고, 팔레스타인 사람 75만 명이 집을 잃고 떠돌아다녔대요. 다니엘 엄마는 전쟁 끝나고 다니엘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대요. 거기서 다니엘은 자기 인생에서 두 번째로 친한 친구, 영국 애 에리크 킨즈버그를 만났대요.

텔아비브도 힘들었는데, 예루살렘은 더 심했대요. 카메라, 전화, 심지어 초인종 같은 거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대요. 친구 만나려면 걸어가서 문 두드리거나 휘파람 불어서 불러야 했대요. 다니엘은 그때 걸어서 에리크 집에 가서 휘파람 불어서 내려오라고 하고, 같이 YMCA 가서 수영하거나 탁구 쳤대요. 둘이 같이 있을 때는 말도 잘 안 했대요. 다니엘은 그게 좋았대요. 에리크는 필리어스 포그를 떠올리게 했대요. "다니엘은 특별했어요." 에리크가 말하길, "사람들이랑 벽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 벽을 자기가 막 유지하려고 하는 거 같았어요. 유일한 친구였죠."

독립 전쟁 끝나고 몇 년 안 돼서, 이스라엘 유대인 수가 두 배로 늘었대요. 60만 명에서 120만 명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이렇게 새로 온 유대인들 적응시키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대요. 근데 다니엘은 정신적으로 적응을 못했대요. 자기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 자기 같은 이민자 말고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대요. 근데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 같지도 않았고. 다른 이스라엘 애들처럼 보이 스카우트에도 들어갔지만, 금방 그만뒀대요. 에리크랑 자기는 거기 있을 데가 아니라는 걸 알았대요. 히브리어를 엄청 빨리 배웠지만, 집에서는 엄마랑 프랑스어로만 얘기하고, 항상 화내면서 얘기했대요.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어요." 에리크가 말하길, "엄마는 불만이 많았고, 누나는 기회만 되면 빨리 도망가려고 했죠." 다니엘은 자동적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걸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냥 몸 붙여 살 데로만 생각했대요.

이스라엘 국적이 자기를 뭘 의미하는지는 말하기 어려운데, 자기는 원래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어디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거 같지도 않았대요. 어디에 기대는 일도 거의 없었고, 기대더라도 잠깐 기대는 정도였고. 루스 킨즈버그는 옛날에 에리크 여자친구였는데, 말하길 "다니엘은 일찍부터 책임 안 지려고 결심한 거 같아요. 제 생각에는, 자기가 뿌리내릴 곳이 없다는 걸 합리화하려고 하는 거 같아요. 뿌리가 필요 없는 사람인 거죠. 삶은 그냥 우연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건 세상에서 그런 우연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뿐이라고요."

땅이랑 사람을 엄청 원하는 나라에서, 다니엘이 땅이랑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이는 건 엄청 특이한 일이었대요. "저는 1948년에 이스라엘에 왔는데, 걔네들처럼 되고 싶었어요." 예슈아 클로드니가 회상하길, "걔네들이랑 똑같이 샌들 신고, 바짓단 걷어 올린 반바지 입고, 모든 골짜기랑 산 이름 다 외우고 싶었죠.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러시아 억양 고치는 거였어요. 자기 과거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운 부끄러움 같은 게 있었어요. 동포 영웅들을 막 숭배하기 시작했죠. 근데 다니엘은 안 그랬어요. 거기를 얕봤죠."

다니엘은 《롤리타》 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랑 비슷한 점이 있었는데, 둘 다 난민이고, 주변 세상이랑 거리를 두고, 잘난 척하면서 현지인들을 날카롭게 쳐다봤대요. 15살 때, 다니엘은 직업 검사를 받았는데, 앞으로 심리학자가 될 거라고 나왔대요. 자기는 예상하고 있었대요.

항상 자기가 교수 될 거라고 생각했고, 제일 재밌어하는 연구 대상은 사람이었대요. 다니엘이 말하길 "심리학에 관심 가진 건 철학에 들어가려고, 세상을 이해하려고 그런 거예요. 왜 사람들이, 특히 제가 왜 저렇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연구하려고 했죠. 그때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었고,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지 알고 싶었고. 싸움에서 누가 옳고 그른지도 상관없었고, 분노 감정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게 심리학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잖아요!"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군대 가야 했대요. 다니엘은 공부를 너무 잘해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 가서 심리학 학위 따려고 했대요. 어떻게 해야 될지는 잘 몰랐대요. 나라에 대학교가 하나밖에 없는데, 아랍 국경선 근처에 있었고, 심리학과 만들려는 계획도 아랍인 매복 공격 때문에 망했으니까. 그래서 1951년 가을 어느 날 아침에, 17살 된 다니엘 카네만은 예루살렘에 있는 수도원에 세운 수학 수업에 들어갔대요. 거기서도 튀었대요. 대부분 애들은 군대 3년 갔다 온 애들이었고, 전쟁 경험한 애들도 많았고. 다니엘은 나이도 어리고, 항상 재킷 입고, 넥타이 매고 다녀서 이상하게 생각했대요.

그 후 3년 동안, 선생님 수준이 낮아서 그냥 혼자서 공부해서 엄청

Go Back Print Chap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