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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lating...

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음, 오늘 무슨 얘기를 해볼까… 흠… 자기 성장이 담긴 스토리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볼까 해요.

어… 혹시 이단이라고 아세요? 이단이라는 사람이 팬데믹 때 뉴욕 시에서 벗어나서 브루클린 다운타운에서 뉴욕주 북쪽 시골로 부모님과 격리 생활을 하러 갔대요. 그때 뉴욕에서 엑소더스가 엄청났잖아요, 그죠? 혼자 아파트에 너무 오래, 너무 많은 시간을 갇혀 있다 보니까, 햇빛을 몇 달 동안 못 본 것 같았대요. 낮에 돌아다니는 것도 너무 위험하게 느껴져서, 밤에 거리가 조용할 때만 산책을 했다는 거예요. 그 긴 노을 산책이 조금 도움이 되긴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대요.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그 영국계 통신 회사에서 미디어 쪽 일을 했는데, 일이 너무 무의미해졌대요. 다른 직원들도 다들 그냥 대충 하는 것 같고… 원래는 그 일이 되게 중요하고 흥미진진하다고 생각했는데, 전 세계적인 재앙 앞에서는 너무 사소하게 느껴졌던 거죠. 친구들도 거의 다 도시를 떠났는데, 꿋꿋이 버티다가… 원래 독립심이 엄청 강했거든요. 아니, 거의 숭배할 정도였대요. 그런데 그때는 그 독립심이 너무 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느껴졌대요. 그래서 몇 달 치 옷을 가방에 넣고 북쪽으로 향했다는 거죠.

이단은 완전 도시 사람이었거든요. 운전면허도 없고, 당연히 차도 없고. 심지어 화분 키우는 것도 너무 큰 짐처럼 느껴졌대요. 혼자 살면서, 약간 그런 독신 생활을 즐기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스타일이라… 아, 딱 한 번, 맨해튼 다운타운에 있는 낡은 아파트 화장실에서 버섯이 엄청 잘 자란 적은 있었대요. 습기가 엄청 많은 곳이라 그랬나 봐요. 어쨌든, 원예랑은 진짜 거리가 먼 사람이었대요. 그런데 부모님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여름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셨대요. 놀랍게도, 엄마가 장미, 코스모스, 콜롬바인, 데이릴리, 이런 꽃들을 엄청 좋아하시는데, 그 사랑이 이단에게도 옮겨갔다는 거예요.

몇 년 후, 지금은 이단이랑 엄마 둘 다 정원에 엄청 빠져 있대요. 이제 이단은 가족 내에서 비공식 주말 정원사, 아니면 그냥 무보수 정원 관리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대요. 최근에 세어 보니까, 마당에 심어진 데이릴리 품종만 해도 서른다섯 가지나 된대요. 게다가, 최근에 심은 교배종 실험 구역까지 있다니까요? 대단하죠?

자, 여기서 중요한 건…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의 시간에, 스스로의 이유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무기력함을 이겨내는 엄청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보통 교육이라고 하면 학교 교육을 떠올리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 그 챕터는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잖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서 엄청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거죠. 심지어, 살면서 꼭 배워야 하는 것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대요. 배우는 지식과 자신의 삶이나 관심사를 연결시키면 되는 거죠. 특히, 자신이 이룬 개인적인 성장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 더 좋고요.

꼭 비싼 요트 타는 취미를 갖거나, 골프 배우는데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부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구글에 "데이릴리"라고 검색해서, 호기심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돼요. 뜨개질도 스코틀랜드산 실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렇게 비싸지 않잖아요. 그리고 지루한 줌 회의 중에 몰래 뜨개질을 할 수도 있고요, 그렇죠? 새로운 습관에 얼마나 시간과 돈을 투자할지, 다른 사람과 얼마나 협력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거예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건, 우리 모두가 지금 당장, 오늘부터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죠. 딱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올바른 이유로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는 거예요.

외부적인 동기는, 기술을 습득하거나,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배우는 거죠. 내부적인 동기는, 다른 사람이 되거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를 바꾸거나,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바꾸기 위해서 배우는 거예요.

자기 시스템이라는 게 있는데… 음… 자기 자신을 개선할 수 있다는 능력, 그리고 우리가 그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 저는 그걸 자기 강화라고 부르고 싶어요. 긍정적인 자아상의 핵심 요소 중 하나고, 더 나아가 행복으로 가는 관문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단은 브루클린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걸 깨달았대요. 넷플릭스 드라마를 밤새도록 보는 대신, 뉴욕주 북부의 혹독한 겨울에도 장미 덤불을 살리는 방법을 찾아봤다는 거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니면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는 정원사가 된 거예요. 스스로 배우고 성장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꾼 거죠.

저는 자아를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마치 집에 있는 냉난방 시스템처럼요. 냉난방 시스템은 집안의 온도를 계속 체크하잖아요. 온도 설정을 입력하면, 시스템의 한 부분이 정보를 수집하고, 다른 부분은 그 데이터를 사용자가 선택한 설정과 비교하고, 세 번째 부분은 그에 따라 집을 데우거나 식히죠.

마찬가지로, 자아는 우리의 강점과 약점, 다양한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식되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가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한 자기 서사, 즉 "온도 설정"과 비교하는 거죠.

심리학자이자 노스웨스턴 대학교 교수인 댄 맥아담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청소년기에 "자아의 역사가"가 되기 시작한대요. 과거의 경험들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물론, 이런 이야기는 바뀔 수도 있지만, "결정적인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고, 사람들은 서사적 가정에 근거해서 삶의 결정을 내리곤 한다"고 해요. 예를 들어, "나는 엄마처럼 되지 않을 거야"라든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거야"라는 확신, 혹은 "나는 항상 약속에 늦고 내 삶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라든가, "나는 동북부 기후에서 꽃을 키우는 조건에 대해 잘 알아" 라든지, "나는 떠오르는 데이릴리 아마추어 전문가야" 와 같은 특정한 능력에 대한 믿음 같은 거죠. 맥아담스는 이렇게 썼어요.

인생 이야기는 심리적인 자원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해서 결정을 내리고 삶을 헤쳐나간다. 긍정적인 메시지를 확인해 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확인해 줄 때,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 줄 때, 우리의 성취와 승리를 축하해 줄 때, 그리고 고통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때, 이야기는 큰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또한 자신의 실제 경험에 충실해야 한다. 지금 당장 끔찍한 일을 겪고 있다면, 강력한 낙관주의를 뿜어내는 긍정적인 재구성은 즉시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실이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어려운 인생 사건들이 우리의 자기 서사를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형성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에서 두 가지를 원하도록 설정되어 있대요. 첫 번째는 자기 일관성이에요.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자기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피드백을 받으면, 서둘러 증거를 제시해서 그것을 회복하려고 한대요. 만약 우리가 자신을 정직하다고 생각하는데 거짓말을 했다는 의심을 받으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자기 감각이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직함을 보여줄 기회를 찾거나 만들려고 엄청 노력한다는 거죠.

또, 자신에 대해 호의적이거나 긍정적인 시각(자기 강화)을 갖고 싶어하는 깊은 심리적 욕구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고 긍정적이거나 듣기 좋은 정보를 찾으려고 한대요. 연구 결과,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자신의 것이든 다른 사람의 것이든) 그것을 운이 아닌 기술 덕분이라고 여기거나, 실패에 대한 변명을 하고 운이 나빴기 때문이지 기술 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등, 긍정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고 인식하고 싶어해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인식하는데, 이걸 착각적 우월성이라고 부른대요. 북미 지역에서 훨씬 더 흔한 현상이래요. 실제로, 미국인의 대다수는 창의성, 지능, 신뢰성, 운동 능력, 정직함, 친절함, 운전 기술 등 수많은 면에서 자신을 평균 이상으로 평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그럼, 이런 이야기들로 어떤 정보를 수집하고, 그걸로 뭘 할까요? 사회적 비교라는 게 있는데,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신을 평가하는 거예요. 친구, 부모, 교사, 동료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다양한 자기 서사를 시도해 보는 거죠. 또, 시간 경과에 따른 자신의 모습도 비교(시간적 자기 비교)하는데, "백 투 더 퓨처" 시스템을 이용해서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습과 그것이 어떻게 개선되었는지 또는 악화되었는지 생각해 보는 거예요. 재구성적 기억을 통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 후, 현재의 자신과 과거의 자신을 비교하는 거죠.

집에 있는 냉난방 시스템처럼, 자아 시스템에도 난방 또는 냉방을 작동시키는 반응기가 있어요. 연구자들은 감정 시스템을 난방 구성 요소로, 인지 또는 사고 시스템을 냉방 구성 요소로 부르는 경우가 많대요. 하지만 냉난방 시스템과는 달리, 자아는 두 가지를 동시에 작동시켜서 전속력으로 나아갈 수도 있대요.

어떤 정보나 경험이 일관되게 좋거나 일관되게 나쁘다고 판단될 수 있을 때, 그 경험에 대한 개인의 감정과 생각은 일치한대요. 자신에 대한 피드백과 정보가 좋고 나쁨이 섞여 있을 때 (흔히 있는 일이죠!), 감정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대요. 기분은 이런데 생각은 저럴 수 있다는 거죠.

중요한 시험을 위해 몇 달 동안 공부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시험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좌우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고요. 그런데 시험 바로 전날, 아주 오랜 친구가 자기가 엄청 좋아하는 밴드의 스타디움 공연을 보러 왔다면서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해요. 게다가, 표가 한 장 남았는데, 친구는 당신을 설득해서 모든 걸 제쳐두고 좋아하는 밴드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요. 그것도 매진된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래요! 당신은 결국 가요.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죠. 당연히 그 순간에는 기분이 엄청 좋겠죠. 아니, 최고일 거예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은 녹초가 되어 있고, 약간 숙취도 있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돼요.

가끔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부 시간을 너무 많이 뺐다는 죄책감도 들고, 맥주를 몇 잔 마셔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부하지 못했다는 실망감도 들 거예요. 단 하루 쉬었을 뿐인데 시험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것도 소중한 친구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는데?

기분이 나쁘면서도 긍정적인 생각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걸 알 거예요.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도 있죠. 공부를 더 했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쩌면, 그날 밤의 경험이 장기적으로 더 가치가 있었을지도 모르죠.

매일 전 세계의 학생들이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가잖아요. 만약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면, 우리 청소년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잘 나가는 집단이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죠. 청소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다니고, 사회 초년생이 되는 시기에 무기력함을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하잖아요. 이 시기는 배우는 게 정말 많은 시기인데 말이죠.

심리적인 행복에 기여하려면, 배우는 것이 개인적으로 의미 있거나 관련성이 있는 것을 이해하려는 자율적인 결정이어야 한대요. 어른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재정을 관리하고, 심지어 직장에서 승진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도전에 끊임없이 노출되는데, 이런 것들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개발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을 필요로 하기도 하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쌓이는 지혜는 결코 멈추지 않고, 단지 삶 전체에 걸쳐 밀물과 썰물처럼 변할 뿐이에요. 법대에 가지 않았다고 해서 고등학교나 대학교 졸업 후에 배움을 멈춘 건 아니잖아요. 스스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마세요! 배움은 선택이고, 계속 선택할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긍정적인 자아상에 기여하려면 자신이 쌓은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대요. 지식의 성장과 그에 따른 자아상 향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발견될 수 있다는 거죠.

제 지인 중에 쉴라라는 분이 있는데, 작년에 바이올린을 시작하셨대요. 55세가 되셨는데, 막내 아이가 곧 대학에 간다는 걸 점점 실감하면서, 남편과 둘만 남게 된다는 걸 느끼셨대요. 남편분은 여전히 바쁜 직장에서 일하고, 가까운 가족들이 해외에 살고 있어서, 일과 가족 일로 출장을 자주 가야 했대요. 최근 몇 년 동안, 쉴라 씨는 매우 힘든 자가면역 질환으로 고생했고, 그걸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감과 피로감을 느끼셨대요. 지금은 건강을 회복해서 바쁘게 살고 계시고, 항상 지역 사회와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걸 좋아하셨대요.

그런데 뭔가 남아있는 공허함 같은 게 느껴지셨대요. 아팠던 기억이 아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막내 아이가 곧 집을 떠날 거라는 변화를 감지해서일까요? 이유가 뭐든, 쉴라 씨는 그게 싫으셨대요. 그래서 오랜만에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어 하셨대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만둔 악기들이 다락방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 보셨대요. 가능할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래, 할 수 있어! 라고 결심하신 거죠. 바이올린을 배우기로요.

시작하신 지 1년이 넘었는데, "늙은 개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는 것"의 어려움은, 쉴라 씨가 웃으면서 말씀하시길, 정말 사실이래요! 어른이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정말 힘들대요! 곧 첫 번째 큰 연주회가 있다고 하셨어요. 다른 연주자들은 대부분 10대래요. 가끔, 그룹에 있는 아이들의 부모 중 한 명이 "용감하다"고 감탄하면서, 계속 노력하고, 약간 창피함을 무릅쓰고, 매주 새로운 것을 시도하러 나타나는 쉴라 씨의 의지에 감탄한대요.

"용감하다고 부르는 것에 화가 나시나요?"라고 제가 여쭤봤어요.

쉴라 씨는 웃으셨어요. "아니요, 저는 용감해요!"

쉴라 씨는 작은 고립된 마을에서 유색인종 여성으로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고 말씀하셨대요. 아내, 엄마, PTA 학부모가 아닌, 자신만의 존재감을 갖고 싶어 하셨대요. 몇 년 전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할 생각은 없으셨던 거죠.

바이올린은 다시 쉴라 씨에게 목소리를 되찾아줬대요. 더 젊고 활기차게 느껴지게 하고, 더 독립적으로, 왠지 세상에 덜 휘둘리고 자기 삶을 더 잘 통제하는 느낌을 동시에 받게 해준대요.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아직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바이올린 활을 집어 들 때마다 짜릿함을 느낀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쉴라 씨처럼 우리도 한번 해보는 거예요. 만약 일할 필요가 없다면, 하루나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까? 내 삶에서 본받고 싶은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뭘까?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더 많이 찾아갈 수 있을까? 내 삶에서 나에게 가장 큰 자극을 주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뭘까? 나에게 자극을 주는 사람들을 어떻게 더 많이 찾아갈 수 있을까? 나를 가장 두렵게 하는 가능성과 미래의 결과는 무엇이며, 그 이유는 뭘까? 죄책감이나 후회 없이 내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도망치는 대신 도전을 찾아나설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을 더 가치 있게 여길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답에 귀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변화를 만들어보는 거예요.

제가 오랫동안 교수를 해오면서, 배움이 어떤 모습인지 매일 직접 보고 있잖아요. 제 학생들은 배우기 위해 수업에 오고, 저는 매 수업, 매 학기, 매년 더 나은 교사가 되는 방법을 배우고 있어요.

제가 заметил одно thing, это то, что 대학생이 되는 것이 제가 대학에 처음 왔을 때부터 많이 변했다는 거예요. 저는 최초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으로서,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저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성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대학에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저를 둘러싼 어른들의 압박감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죠. 전공과목과 수업에 대한 결정은 완전히 제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어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주변 어른들이나 다른 학생들과 상의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때는 제가 좀 특이한 케이스였을 수도 있지만, 요즘에는 절대 그렇지 않죠. 많은 학생들은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해서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GPA가 높아도, 부모님보다 잘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전공을 선택하면 부모님을 실망시킬 거라고 생각하죠.

부모보다 더 나은 직업과 소득을 얻는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악몽이 되어버린 거죠.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많은 학생들에게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주고 있어요. 제 생각에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열정을 키우는 배움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는 것 같아요. 현대 교육 시스템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배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능력을 잃어버린 걸까요?

제 학생들은 B-보다 낮은 성적을 받을까 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행복 사회학 수업의 교수인 제가 학생들이 스스로의 기준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준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의미 있는 과제를 제공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저와 제 학생들에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재미있고 의미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학생과 교사의 상호 작용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저와 학생 모두에게서 즐거움과 열정을 더 짜내야 했죠. 하지만 오랫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드디어 문제가 뭔지 깨달았죠. 제가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잊어버렸던 거예요! 그 결과, 한때 가르치는 일에서 느꼈던 기쁨을 잃어버렸던 거죠. 어쩌면 행복 수업이 스트레스에 지친 제 학생들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저는 가르치는 방식을 바꿔야 했어요. 학생들의 삶과 최대한 관련성 있게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야 했죠. 그래서 각 과정을 완전히 개편했어요. 그때부터 저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젊은이들, 즉 제 학생들이 지금 당장 또는 가까운 미래에 그 내용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모든 주제에 접근했어요. 읽어야 할 기사를 일주일에 두 개 이하로 줄였고, 주로 Scientific American, The Economist, Vanity Fair, Rolling Stone과 같은 주류 잡지에서 기사를 가져왔어요.

유튜브 동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TED 강연도 과제로 내줬어요. 하지만 자연스럽게 재미있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해도, 영감을 주고 감정적으로 호소력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어요. 곧, 매 학기마다 수업 내용과 토론이 학생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순간들이 생겨났어요. 호스피스에서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더 이상 삶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등, 우리가 다루는 모든 주제에 대해 깊은 감동과 울림이 있는 순간들이 있었어요.

제 학생들은 물론 그 수업을 듣고 필기를 하고 있었죠. 여전히 열심히 노력하는 학생들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또한 그 순간들을 자신의 삶에서 살고 있었어요. 부모님의 실망을 걱정하고, 잃어버린 할아버지 할머니를 애도하고, 사랑을 찾지 못할까 봐 고통스러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죠. 심지어 감사 편지를 쓰고 공유하는 단순하지만 엄청 중요한 행위조차 수업을 멈추게 할 수 있었어요.

저는 드디어 교과서에 나오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 학생들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는 수업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낸 거예요! 학생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저에게 가르침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정말 기뻤어요. 제 수업이 열리자마자 5분 안에 마감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학생들이 수업을 들으려면 4학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4학년에게 항상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이에요. 제 학생들은 제 수업에서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배웠다고 자주 평가하고 댓글을 달았어요.

제가 가르치는 방식을 바꾼 것은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건 확실해요. 하지만 그것이 제 학생들의 삶도 바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적어도 그들은 수업을 마친 후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 후에 저에게 그렇게 보고했어요. 많은 학생들에게, 제가 가르치고 배우는 새로운 방식은 그들이 매일 내리는 선택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거죠.

저는 그들이 제 분야에 대해 배워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멈추고,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배워야 하는 것처럼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자기 변화만이 유일한 변화다, 라는 말도 있잖아요. 인지 행동 치료사와 함께 일할 때, 치료사분께서 솔직하게 말씀하시길, 제가 경험할 개선의 최대 20% 정도만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신대요. 나머지 80%는 전적으로 저에게 달려있다는 거죠. 저를 이끌 수는 있지만, 저를 대신해서 일해줄 수는 없다는 거예요. 부정적인 생각이 제 삶을 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내면적인 변화를 만들려면, 제가 직접 숙제를 해야 한다는 거죠. 부정적인 자동적인 생각을 즉시 멈추고 더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으로 바꿀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한다는 거예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나 바람직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감정이 격해지는 것을 느꼈을 때,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하는 데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몇 가지 불쾌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죠. 힘든 순간에, 제 감정을 고조시킨 것은 과거의 힘든 경험이었고,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 할 때도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결코 통제할 수 없지만, 제가 어떻게 반응할지, 즉 불쾌한 사건이나 상호 작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어떤 경계를 설정할지 (또는 설정하지 않을지)는 저만이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죠.

사람들이 겪고 있는 매우 현실적이고 심각한 고통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어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어쩌면 당신도, 과거와 현재에 부당함과 고통을 겪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우리 문제의 많은 부분, 즉 어려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사고, 감정, 행동의 습관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에 뿌리내려져 있어요. 그것들은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만이 그것들에 접근해서 바꿀 수 있기를 바라야 한다는 거죠.

또, 선불교를 하시는 분으로부터 배운 중요한 교훈도 받아들여야 했어요. "코리 씨,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든, 그것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일입니다." 처음에는 "잠깐만요, 일이 잘 풀리고 제가 원하는 것을 얻고 있을 때는 멋진 말이지만, 제 삶이 끔찍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학대, 방치, 트라우마,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죠? 그런 일들이 어떻게 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될 수 있나요?"라고 생각했어요. 헛소리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분은 제가 자신의 요점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말을 부드럽게 하셨어요. 불교 철학에서는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완전한 인식을 가지고 앉아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한 인식은 우리가 고통을 통해 나머지 살아있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해로 천천히 발전할 거라는 거죠.

이 책의 1부에서 논의했듯이,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내성을 키우면 우리가 반응을 선택하는 방식에 대한 주체성이 더 커지죠. 여전히 저는 매우 현실적인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겪고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의 매우 현실적인 고통에 완전한 인식을 가져다주는 것이 노력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있어요. 어쩌면 "어떤 순간에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가 더 정확할지도 모르죠. 일단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예요.

불교 수녀인 페마 초드론은 자신의 저서 "When Things Fall Apart: Heart Advice for Difficult Times"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고 우리 상황의 근거 없음과 함께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우리와 그들, 이것과 저것, 좋음과 나쁨 사이의 이원론적 긴장을 우리가 보통 피하는 것을 초대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다"고 썼어요.

초드론의 스승은 이것을 "날카로운 부분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불렀대요. 제 선불교 친구도 분명히 동의했어요. 재앙이 닥치고, 일이 잘못되고, 세상이 겸손함을 요구할 때, 제 삶의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경험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고 말했죠. 아무리 없애고 싶더라도, 지금 내 삶에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직시하고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죠. 처음에는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반응을 선택하는 연습을 했어요. 더 많은 연습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이 저를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저와 상황을 더 좋게 만드는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었죠.

하지만 저는 그런 확신, 즉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일해야 한다는 것의 장점을 믿는 만큼,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할 수 있는 고결한 사람들의 예가 필요했어요. 멘토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적어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필요했어요.

우리 모두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전히 선한 사람,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아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들의 좋은 자질이 진실하고, 다른 사람들, 직장, 가족, 지역 사회로부터 받는 칭찬과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하지만 단순히 존경하는 대신 우리 자신을 그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자신을 개선하는 것을 막는 많은 것은 사회적 비교에서 비롯되는 낙담감 때문이에요.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화려한 셀카뿐만 아니라, 링크드인에는 중요한 컨퍼런스에 참석하고, 강연을 하고, 학위를 받는 사람들의 게시물로 가득하죠. 틱톡은 사람들의 춤 실력, 귀여운 반려동물, 요리 실력, 그리고 더 나쁜 것들에 대한 가시성과 인정을 얻기 위해 만들어졌고요. 이전에는 가족과 친구들만이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기쁨을 받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게시물을 올리고, 마치 색종이를 공중에 던지는 것처럼 넓고 무관심한 세상으로 밀어내고, 어디에 떨어질지 통제할 수 없죠.

비교는 우리를 부정적인 감정에 가둘 수 있어요. 열등감이나 피로감 - 고급 요리 수업을 들을 시간이나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분노 - 동료가 승진과 상사로부터 받는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몰래 생각하는 것. 질투 - 성공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것, 다른 사람의 행운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실패를 위한 길을 닦고 있다고 상기시키는 지나치게 경쟁적인 자본주의 문화. 소크라테스는 질투를 영혼의 궤양이라고 믿었죠. 따라가지 못하고, 충분히 좋지 않고, 결코 충분히 좋지 않을 것이라는 반복적인 생각은 개인의 성장을 멈추게 해요.

존경심은 완전히 다른 논리로 작용해요. 우리가 존경하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영감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죠. 다른 사람에 대한 더 큰 존경심은 행복의 두 가지 요소와 관련이 있어요. 삶의 목적에 대한 더 큰 인식과 더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성장, 이 두 가지 요소 모두 우리를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하죠.

연구자들은 질투가 모든 종류의 행복 측정과 부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질투심이 적은 사람들은 더 나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목적을 가지고, 더 많은 개인적인 성장을 경험하죠. 게다가, 질투심이 적은 사람들은 자신을 더 잘 받아들이고(자기 수용),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지고 관리할 수 있으며(환경 통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 더 자신감이 넘친다(자율성). 질투의 볼륨을 줄이고 존경심의 볼륨을 높이면 개인적인 성장이 증가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기력함에서 벗어나려면 삶에서 더 잘 기능하는 데 집중하고, 특히 우리가 누구인지, 삶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개선했다고 느끼게 해주는 변화를 만들어야 할 거예요. 우리는 자기 계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이 변화의 결과, 즉 우리 자신에게서 보는 개선이 그 자체로 보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글쎄요, 아닐 수도 있어요. 몇 년 전, 저는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얼마나 즐기는지 측정해보기로 했어요. 놀랍게도, 사람들에게 그대로 머물거나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대부분의 응답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잘 기능하고 있다고 보는지에 관계없이 그대로 머무는 것을 선택했어요.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빠져 있던 사고와 행동 패턴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죠. 어떤 사람들은 그 순환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시작했던 곳으로 미끄러져 돌아가는 것을 보기도 하고요, 심지어 자신이 다시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죠.

더 이상한 것은, 배우자, 직원 또는 부모로서 더 많은 개선을 이루는 것이 그대로 머무는 것보다 더 많은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게다가, 더 많은 개선을 이루는 것은 그대로 머무는 것보다 더 적은 긍정적인 감정을 낳았죠. 동시에, 자신을 더 많이 개선하고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그대로 머무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성장을 보고했어요. 개선을 이루는 것이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당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왜 긍정적인 변화가 그렇게 불편할까요? 이러한 결과는 우리가 자신을 개선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 더 나은 파트너, 친구, 부모, 노동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만 낳을까요?

인식된 개선에 대한 연구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해요. 즉, 자기 일관성에 대한 우리의 열망이 우리를 억제한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은 개선을 이루기는 하지만, 결코 자신이 원했거나 필요했던 만큼 멀리 가지는 못하죠. 하지만 당신은 미래에 더 나은 자신을 상상할 수 있어요. 심지어 개선을 향한 길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도 있죠. 어떤 경우에는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도 있어요.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변화하고 성장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바람직하거나 유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성장의 고통과 어려움을 헤쳐나가고 싶어질 거예요. 우리는 고통을 좋아하지 않아요. 고통을 달래고, 도망치고, 가능한 한 빨리 헤쳐나가도록 동기 부여를 받죠. 하지만 우리는 종종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우리 모두는 제한된 정신적, 감정적 자원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만드는 데 충분한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정신 질환, 기능적 장벽 또는 체계적인 억압에 직면하고 있다면 단순히 "노력하는 것"이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죠.

치료사 K. C. 데이비스가 자신의 저서 "How to Keep House While Drowning"에서 썼듯이:

많은 자기 계발 전문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또는 경제적 특권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성공을 자신의 노력 탓으로 돌리죠. 20세의 피트니스 인플루언서가 세 아이의 싱글맘에게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24시간이 주어져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피트니스 인플루언서는 건강에 극적인 변화를 보기 위해 노력을 더하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전부라고 가정하죠. 그러나 세 아이의 싱글맘은 시간과 관련해서 매우 다른 요구와 제약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녀에게는 노력뿐만 아니라 양육, 운동 수업에 필요한 돈, 그리고 9시간 동안 일하고 추가로 5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보고 집을 청소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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