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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러분 안녕하세요! 음... 오늘 제가 좀 얘기해볼 이야기는, 그... 인간관계, 특히 따뜻하고 신뢰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에 대한 거예요. 음... 얼마 전에 칼이랑 아론이라는 커플이 어린 아들이랑 대도시에서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갔대요. 팬데믹이 막 시작될 즈음이었는데,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컸겠죠. 다행히 직장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아도 됐대요. 왜냐하면 둘 다 새 집에서 출퇴근하거나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거든요. 부모로서는 비교적 초보였지만, 아들이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는 걸 엄청 기대했대요. 그래서 유모차에 아들을 태우고 동네를 산책하기 시작했는데... 몇 주 지나고 나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대요.
사람들이 그들을 보면 길을 건너가는 거예요! 웃으면서 "아, 역시 여기 사람들은 게이를 싫어하는구나?"라고 농담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꽤나 개방적인 마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질병을 너무 무서워해서,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으로도 새로운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던 거죠.
그래도 외로웠대요. 혼란스럽고... 솔직히 가족끼리만 지내는 것도 좀 지겨워졌대요. 아, 네, 짐작하시겠지만, 공허함을 느꼈대요. 괜히 이사 온 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뒤에 두고...?
다행히도, 예전에 도시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몇 년 전에 교외로 이사 간 사람들이 있었대요. 그 인맥을 통해서 새로운 마을에서 조금씩 삶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대요. 둘 중에 좀 더 외향적인 칼은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마자 PTA(학부모회)에 가입하고 다른 지역 위원회에도 참여했대요. 곧 다시 예전의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대요. 아론은 조용한 웃음소리와 부드러운 비꼼으로, 동네 사람들과 아들의 유치원 친구들의 부모들과 친구가 되었대요. 칼만큼 활발하게 활동하진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사랑받는 사람이었대요. 몇 년이 흘러서, 지금은 그들이 데이트를 하려고 아들을 맡길 사람이나, 여행을 갈 때 아픈 강아지를 돌봐줄 사람들을 쉽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대요.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을 봐도 길을 건너지 않는 사람들이죠.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드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마침내 찾았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대요. 가족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거죠.
자, 그러면 친구와 우정은 뭐가 다를까요? 친구란 뭘까요? 어떤 관계가 따뜻하고 신뢰로울까요? 그리고 점점 더 연결되는 세상에서, 페이스북 친구, 스냅챗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워, 틱톡 팔로워가 있는데도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을까요? 온라인 접촉이 늘어나는 것이 실제 삶에서의 관계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을 이렇게 설명해요. 우리는 친구와 우정을 착각하고 있다, 뭐 그런 거죠. 전자가 기분은 좋지만, 후자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거예요.
C. S. 루이스는 그의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우정이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드물고 심오한 관계라고 주장했대요. 자연스러운 애정, 예를 들어 강아지와 주인의 애정, 가장 열정적이지만 불안정한 에로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이나 우리가 헌신적으로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아가페보다 더 높다고요. 그는 이렇게 썼대요. "내 친구들 각자에게는 다른 친구만이 완전히 이끌어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혼자서는 그 사람 전체를 불러낼 만큼 크지 않다. 그의 모든 면모를 보여주려면 내 빛이 아닌 다른 빛이 필요하다."
사회적 관계는 아주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대요. 그리고 공유하는 관심사, 취미, 가치관은 생각보다 덜 중요할 수도 있대요. 좋아하는 책 시리즈에 대해 열광하는 것이 대화를 시작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쉬운 대화 주제가 우정의 질을 가장 잘 예측하는 것은 아니래요. 그리고 공통점이 너무 많으면 서로에게서 배우기가 더 어렵다고 하네요.
진정한 우정은 상호주의에 달려 있대요. 양쪽 모두 자유롭게 주고받는 거죠. 점수를 매기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돕도록 허용하는 것은 더 어려울 수도 있대요. 다른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보다 자신의 가장 깊은 필요와 어려움을 공유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지만, 진정한 친밀감이 형성되려면 양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죠. 루이스가 썼듯이, 우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뭐?! 너도?! 나 혼자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에 태어난다"는 거예요.
번성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가 상호 평등감을 가져야 한대요. 물론, 많은 관계에는 사회적 지위 차이가 있죠. 부모와 자녀는 평등하지 않고, 직원은 상사나 관리자와 평등하지 않죠. 그리고 우리는 모두 삶의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정도의 힘과 지위를 가지고 있어요. 이러한 불평등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는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 또는 "내가 우위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보낼 기회를 줄 수 있지만, "나는 너를 봐, 너는 여기에 어울려, 우리는 똑같아"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는 거죠.
평등과 상호주의라는 토대 위에서 진정한 우정은 공감하고, 이해하고, 협력하고, 갈등이 있을 때에도 타협하려는 의지,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기술과 능력이 필요하대요.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신을 잘 아는 사람은 당신에게 빠른 공감이나 쉬운 해결책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거예요. 그리고 어떤 종류의 지원이 가장 의미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면, 물어볼 거예요. 집에 있지 않아도 서로 편안하게 느껴지는 거죠.
말할 필요도 없이,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정서적으로 가깝고 만족스러운 우정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요?
친구가 "오늘 회사에서 엉망진창이었어? 완전 공감. 나도 그래. 내 상사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우정은 "오늘 회사에서 엉망진창이었어? 정말 안됐네. 나도 사실 그래. 조용한 데 가서 술 한잔 하면서 얘기할래?"
친구가 "네 아들이 오늘 학교에서 정학당했어? 우리 애도 고등학교 때 몇 번 정학당했었어. 걱정 마. 잘 자랐어."
우정은 "네 아들이 오늘 학교에서 정학당했어? 와, 너랑 아들 둘 다 정말 힘들겠다. 얘기 좀 할래?"
친구가 "네 어머니가 오늘 넘어져서 병원에 가셨대? 세상에, 정말 끔찍하다. 괜찮으셔?"
우정은 "네 어머니가 오늘 넘어져서 병원에 가셨대? 세상에, 정말 끔찍하다. 병원에 모셔다 드릴까? 바쁠 동안 강아지 봐줄까? 가족들 먹을 거 병원에 가져다줄까?"
좋고 재미있는 친구를 사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래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죠. 그리고 첫 번째 답변 세트가 잘못된 것도 아니에요. 때로는 그게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전부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인간은 또한 우리를 완전히 보고 우리가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지원해주는 친구가 필요하다는 거죠.
실천 계획! 양보다 질에 집중하세요. 삶은 우리 혼자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많은 어려움을 제공하지만, "일상적인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의미 있는 관계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대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우정을 가지고 있거나,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는 우정을 가지고 있지만, 시간이 압축적으로 느껴지기 전까지는, 뭔가 상황이 바뀌기 전까지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거죠. 연장자들이 가르쳐주듯이, 시간이 풍족하게 느껴지다가 압축적으로 느껴지면, 이러한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는 거죠. 의미 있는 관계를 우선시하는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매우 아플 때, 좋은 이웃, 좋은 친구, 좋은 동료를 만들었던 곳을 떠나려고 할 때도 일어난대요.
전문적인 네트워킹부터 트위터 스레드에 대해 재미있게 웃는 것까지, 가벼운 관계를 갖는 데에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와 동기가 있어요. 하지만 사회적 접촉의 목표는 단순히 바쁘고 인기 있다고 느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대요. 그리고 정서적으로 만족스러운 관계를 위해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정신적인 에너지를 투자해야 번성할 수 있다는 거죠.
소속감과 존엄성.
한 10년 전쯤에, 영국에서 번성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대요. 질의응답 시간에 충격적인 질문을 받았대요. "키스 박사님, 헬스 엔젤스의 멤버들도 번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헬스 엔젤스는 자신들을 오토바이 "클럽"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갱단과 더 비슷하게 기능한대요. 이 단체는 마약 밀매부터 암살까지, 다양한 불법 행위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질문한 사람은 제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질문, 즉 불법적인 활동을 수반하는 비전통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통해 번성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던 거죠.
사회적 연결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 아니래요. 갓 태어난 아기의 엄마, 사회 불안을 겪는 십 대, 고립된 노인들뿐만 아니라, 그 중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요. 따뜻하고 신뢰로운 관계는 너무나 중요해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사회적 규범을 위반하거나 심지어 법을 어기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연결점을 찾으려고 한대요. 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고, 보호받고 있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요.
헬스 엔젤스부터 야쿠자, MS-13부터 마피아까지, 다양한 종류의 갱단은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여전히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고, 지역 사회와 구성원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죠. 그렇다면 왜 많은 젊은이들이 갱단에 가입하는 걸까요?
갱단은 십 대와 젊은 성인으로 구성된 집단으로, 주로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상징과 특별한 의사소통 방식을 채택하며 종종 불법적인 활동에 관여한대요. 갱단은 특정 지역이나 지리적 위치에서 일정 기간 동안 존재하고 활동하죠. 이렇게 정의하면, 불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갱단과 리틀 리그 야구팀이나 보이 스카우트 부대를 구별하기가 어렵지 않나요? 우리 인간은 인간 관계를 갈망하도록 깊이 연결되어 있대요. 어쩌면 그것을 찾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멀리 갈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죠. 어쩌면 동네 리틀 리그 야구팀과 갱단을 구분하는 유일한 진정한 차이점은 후자가 일상적으로 범죄 행위에 관여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협박이나 폭력을 사용한다는 것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단순히 소속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안전과 보호를 제공하는 사회적 단위(가족, 이웃, 사회 집단)에 속해 있죠. 보호받고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세상에서 번성하기는 매우 어렵대요. 신체적 안전은 건강한 애착과 진정한 연결의 전제 조건이래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안전과 보안이 기본적인 욕구인 이유가 있는 거죠.
하지만 다른 종류의 안전도 신체적 안전만큼 중요하대요. 심리적 안전은 소속감과 수용감을 느끼게 해주고, 정서적 안전은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주죠. 그리고 이러한 다른 유형의 안전이 선행되어야 하는 사회적 안전은 마침내 우리가 기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곳이죠.
인간 진화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의 생존은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안전을 찾는 데 달려 있었대요. 역사적으로 신체적, 심리적 안전감은 사냥 및 채집 단위의 유용하고 가치 있는 구성원이 되는 데서 비롯되었는데, 세바스찬 정거는 그의 책 "부족: 귀향과 소속에 대하여"에서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논의했죠. 사냥꾼과 채집가로서의 우리의 부족적인 본성은 우리의 신체적, 사회적 DNA의 일부로 남아 있어서 사회적 연결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대요. 교회 합창단부터 갱단까지, 무엇인가의 멤버가 되는 것에서 오는 그 교훈 말이죠. 반드시 조직화된 그룹일 필요는 없어요. 브루클린의 젊은 엄마, 애리조나의 55세 이상 거주 공동체의 은퇴자, 또는 헬스 엔젤스의 멤버 등 친밀하고 연결된 그룹에서도 동일한 이점이 발생하죠.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의심스럽고 불법적인 수단을 통해 사회적 지위, 권력, 돈을 얻어왔대요. 좋은 학교, 좋은 동네 등 합법적인 사회적 수단을 통해 번성을 찾을 기회를 거부당한 사람들은 여전히 인내하려는 인간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죠. 가깝고 안전한 관계(모든 의미에서)를 맺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갱단에 가입할 가능성이 더 높대요. 이는 우리가 연결에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죠. 어떤 종류든 간에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을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거예요.
소속되고 싶은 욕망.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소속되기 위해 애썼을 거예요. 우리는 너무나 자주 우리 주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강하고, 빠르고, 낫고, 더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고 믿는 데 어려움을 겪어서, 소속감을 느끼는 능력을 저해하죠.
이러한 투쟁은 일찍 시작된대요. 모든 인종과 문화의 유아는 심리학자들이 효과 동기라고 부르는 것, 즉 자신의 주변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욕구를 보인데죠. 이 욕망은 능숙함과 유용한 기술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으로 발전하고, 이는 성인이 되어서 사회적 기여를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대요. 인종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학대, 그리고 수많은 다른 삶의 트라우마는 효과에 대한 우리의 내재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억압하죠.
그건 저에게도 분명히 해당되는 이야기예요. 어렸을 때 저는 끔찍하게 기능 장애가 있는, 버려짐, 중독,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을 겪었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 엄청나게 고생했죠. 매주 저는 징계를 받거나 수업을 낙제했대요. 12살 때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에게 입양된 후에 제 삶은 180도 바뀌었죠.
갑자기 저는 평화롭고 안전한 환경에서 살게 되었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저에게 사랑과 지도를 듬뿍 주셨죠. 거의 하룻밤 사이에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미식축구 팀의 쿼터백을 맡고, 홈커밍 퀸 선발전에 참여하는 우등생으로 변모했대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친구, 진정한 우정을 가지게 되었죠. 저는 사랑을 받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집이 있었죠. 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었던 거예요.
지금 제가 방금 입력한 문장들을 보면, 제가 사회학자가 된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사는 환경을 바꾸면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과학자 말이에요. 때로는 우리가 "심어진" 곳에서 번성하고, 때로는 더 나은 곳, 우리가 번성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심어져야 하는 거죠. 누군가 시들어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잘못이라고 단정하지 마세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저는 53명 중 3명만이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학생 중 한 명이었대요. 저는 키스 가족 최초로 대학교에 진학하는 사람이었죠. 현재는 1세대 학생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저는 평등감, 즉 제가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내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평생 동안 계속 그래왔대요.
고등학교는 저를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제대로 준비시켜주지 못했죠. 왜냐하면 위스콘신 주 쓰리 레이크스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요. 대학 1학년은 재앙이었죠. 제 GPA는 2.01(C 학점)로 2학년 때 학사 경고를 받을 뻔했대요. 기본적인 에세이를 쓸 수도 없었고, 튜터의 도움을 받아 영어 101 에세이를 수정하려고 노력했지만, 교수님은 만족하지 않으셨대요.
그 해 말에 저는 대학에서 영어 101에서 받은 가장 낮은 점수인 D-를 받았죠. 학기말에 영어 교수님은 저를 찾아와서 현명한 조언처럼 느껴졌을 조언을 해주셨대요. "코리, 나는 네가 여기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교수님은 모르셨겠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제게 심어준 핵심 신념, 즉 '너는 어울리지 않아, 너는 여기서 원하지 않아, 너는 평등하지 않아'를 건드렸던 거죠. 저의 능력에 대한 부정은 저를 뼈 속까지 아프게 했대요.
제 트라우마가 심어준 또 다른 것은 반항심이었대요. 교수님이 제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바로 그 순간에 발동된 것은 그분, 그리고 세상 전체에게 그들이 저에 대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었죠. 그 동기는 평생 동안 지속되었대요. 저는 트라우마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죠. "너는 나를 꺾을 수 없어, 너는 이길 수 없어."라고 몇 번이고 말했대요.
그 반항심은 저에게 도움이 되었죠. 매우 힘든 시작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학을 최우등(거의 최우수)으로 졸업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사회학 대학원 프로그램인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에 합격했대요. 5년 안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회적 안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죠.
그 반항심, 즉 내가 평등하지 않다는 느낌, 누구도 나를 평등하게 보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저의 학업과 연구를 밀어붙였죠. 저는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은 것, 즉 사회적으로 더 통합되고, 다른 사람들을 더 수용하고, 사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어하고, 사회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잘 이해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갈망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대요. 저는 제 삶에서 더 많이 원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던 거죠.
1세대 학생으로서 성공하는 것은 당신을 이상한 사회적 격리의 장소에 놓이게 한대요. 당신은 성공에 만족하고, 어쩌면 놀라기까지 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 당신은 두 세계 사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죠. 당신이 왔고 결코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있죠.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이 너무 많이 변해서 더 이상 그들이 함께 자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죠.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온 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거죠.
동시에 당신은 당신이 올라간 새로운 사회적 계층에 완전히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할 수 있죠. 하지만 속담에도 있듯이,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여전히 당신이 지금 살고 있는 곳에도 완전히 어울리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받을 거예요.
연결을 통해 탈출하기.
이러한 사회적 세계 사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연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대요. 그 어려움의 일부는 미국 농촌 지역의 작은 마을이 점차 붕괴되는 데서 비롯되죠. 오늘날 세계 인구의 대다수는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구는 농촌 지역과 도시 지역으로 더 균등하게 분산되어 있었죠. 제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삶의 도시화가 시작되었고, 제가 위스콘신 주 쓰리 레이크스라는 작은 고향에서 살았던 종류의 삶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대요. 다행히도 쓰리 레이크스는 세계에서 가장 큰 담수 호수 체인의 고향인 휴양지이기 때문에 제 고향은 살아남고 번성할 가능성이 높죠. 하지만 모든 작은 마을이 그러한 천연 자원을 가지고 지속될 만큼 운이 좋은 것은 아니죠. 많은 곳이 대신 자체적인 느린 종말을 목격하고 있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년 후, 저는 아내와 아내의 부모님과 함께 위스콘신 북부로 휴가를 떠났대요. 저는 그들에게 제가 자란 곳을 보고 싶냐고 물었죠. 우리는 코스를 변경하고 쓰리 레이크스로 가서 제가 자란 모바일 홈 공원인 레이크 테라스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대요. 놀랍고 충격적이게도 제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바일 홈은 사라졌죠. 남아있는 것은 땅에 있는 구멍, 그들이 모바일 홈을 놓았던 빈 기초뿐이었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수년에 걸쳐 정성껏 가꾼 나무, 관목, 꽃은 대부분 죽었고요.
당신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모바일 홈은 그 정의상 영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하지만 여전히 저는 너무나 길을 잃고, 단절되고, 세상에서 끊어진 느낌을 받았대요. 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집이 없으니, 제 고향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느낌이 아니었죠. 오늘날까지 저는 그 광경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어린 시절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그 집에서 누군가가 보살핌을 받고 자라고 있다는 기억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요.
소속될 허가를 기다리는 것.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가 쓰레기로 여겨졌다는 것을 잊기 위해 평생을 바쳤대요. 우리는 우리가 "못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수많은 다른 용어들을 가지고 있죠. 저는 여기에서 그것들을 나열하지 않고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힘을 주지 않을 거예요. 제가 "파괴의 용어"라고 부르는 이러한 용어들은 우리의 자존감과 존엄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죠. 그것들은 우리가 어디에도, 여기에, 저기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고,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소속될 허가를 기다리게 만든대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외부 메시지를 내면화함으로써 승리하도록 놔둘 수 없는 거죠.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에게 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린 시절이 얼마나 더 힘들었을지 상상할 수 없대요. 그런 다음 몇 년 후, 경력 면에서 저는 비슷한 경험을 할 만큼 운이 좋았죠. 제가 깊이 존경하는 대학원 멘토, 교수님이 제 안에서 자신을 보셨다고 말씀해주셨대요. 저는 넋이 나갔죠. 제 최고의 순간에, 저는 그분 안에서도 저를 볼 수 있다고 느꼈대요. 우리의 배경, 업적, 대중의 찬사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어쩌면 언젠가 저도 그분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어쩌면 저도 학생들을 평등하고 완전히 보인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요. 그건 인생을 바꿀 만한 일이었죠.
당신이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는 메시지를 받는 것은, 특히 인생 초기에, 성인이 되어 짊어지는 자기 서사를 왜곡할 수 있대요. 우리가 결코 소속될 수 없다고 믿을 때, 우리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죠. 예를 들어 친구에게서 받은 평소보다 짧은 문자에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요. 그리고 우리가 경계를 풀면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거의 믿을 수 없게 될 수 있대요. 브레네 브라운이 그녀의 책 "황무지 용감하게 헤쳐나가기: 진정한 소속감과 홀로 설 용기를 찾아서"에서 썼듯이,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외롭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운이 좋다면 교수님처럼 누군가가 벽을 허물고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대부분에게는 우리가 존엄성이나 존중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거짓된 믿음에 도전하고, 우리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을 실천하고,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와 평등을 중심으로 자기 서사를 구축하는 데는 깊은 내면의 작업이 필요하대요.
실천 계획! 시간을 내어 내면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시스템에서 제거해야 할 외부 메시지를 분리하세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행동으로 뒷받침하는 당신의 삶의 사람들이 진심이라는 것을 가능한 한 자주 상기시키세요. 그들이 좋은 때나 나쁜 때나 당신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안심하고, 흥미롭거나 사랑스럽게 보이기 위해 사회적으로 "연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세요. 그리고 힘들 때 친구들이 당신의 마음을 읽어주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도움을 요청하고 보답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평등의 메시지를 보내세요.
우리는 누구든지 연륜과 권력이 있다면 세상으로부터 항상 소속되어 있다고 듣지 못했던 사람들, 또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 교육, 업무 경험 등이 부족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평등의 메시지를 보낼 수 있대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특권이죠. 올바른 장소에서 태어난 행운이나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난 불운은 우리가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용이성과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한 시간, 학습, 노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대요.
제 친구 중에 스웨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극적인 사회적 차이에 충격을 받는다고 해요. 스웨덴에서는 아이들이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젊은이들이 부모님의 친구들을 매우 격식 없이 대하는데, 이는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신중하고 나이와 관련된 존경심과는 다르죠. 처음에는 그게 놀라웠대요. 그들은 그곳에서 연장자들을 존경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곧 그녀는 그것이 스웨덴 사람들이 포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생활 방식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강화하는 사회 정책을 가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대요. 예를 들어 점심은 주중에 매우 인기 있는 식사이고, 세련된 시내 레스토랑에서는 거의 모든 테이블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세련된 비즈니스 복장을 한 남녀가 한 테이블에 앉아 있고, 캐주얼한 옷차림의 은퇴한 부부가 그 옆에 있고, 반사 조끼를 입은 건설 인부가 바로 건너편에 있는데, 모두 비슷한 기대로 같은 식당을 찾는 거죠. 서로 다른 배경, 다른 직업, 다른 삶의 단계를 가진 사람들의 이러한 교류는 어디에나 존재한대요. 스웨덴 사람들은 평등에 대한 기대가 타협할 수 없는 존중의 형태라는 것을 알아낸 것 같대요. 그들의 사회적 관계는 그러한 가정을 반영하고 있고, 제 친구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대요.
실천 계획! 보세요: 시력을 향상시키세요. 당신과 다르게 보이거나 행동하거나 당신과 매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도 명확하게 보세요. 생각하세요: 다른 사람의 필요가 내 필요와 매우 다르더라도, 그 사람의 하루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내가 존재하고, 우리가 평등하고, 이 순간에 내가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까요? 하세요: 그런 다음 그냥 하세요. 당신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진정한 친구에게서 무엇이 필요했을지 상상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제공하려고 노력하세요. 슬픔에 잠긴 시간에 전달되는 캐서롤일 수도 있고, 말은 거의 하지 않지만 공유되는 지지의 느낌은 헤아릴 수 없는 조용한 저녁 산책을 제안하는 것일 수도 있죠.
중요함.
대학원 교수님이 저에게 자신을 보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제 인생이 바뀌었대요. 그분의 말씀, 그분의 친절한 관심은 제가 그분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우리 사회의 공유된 직업에도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중요함, 중요함은 중요하다는 거죠.
사회학적 관점에서 "중요함"은 번성의 "사회적 기여" 요소에서 중요한 요소래요. 중요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을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래요. 개미 군단에서 벌집, 늑대 무리에서 코끼리 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생물은 사회의 유용한 구성원이 되는 특정 역할을 가지고 있는 거죠. 그들의 사회가 무엇이든 말이에요.
중요함을 측정하는 척도는 단 5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핵심을 찌르는 질문들이래요.
사람들이 당신에게 의존하나요?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경청하나요?
사람들이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인다고 느끼나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느끼나요?
만약 당신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사람들이 당신을 그리워할까요?
중요함 척도를 만든 연구자들은 특히 어린이와 은퇴 전의 노인이라는 두 그룹이 중요함의 빛을 쬐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대요. 아이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느끼죠.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중년의 성인은 부모, 배우자, 직원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삶에서 일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 책임감을 느끼죠.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젊은 성인과 노인에게 일종의 충격을 준대요. 청소년들이 젊은 성인의 세계에 들어서면 더 이상 어떤 세상의 중심이라고 느끼지 않죠. 마찬가지로 노인들이 은퇴하면 직장 생활을 넘어 세상에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거나, 자신의 삶에서 중요했던 부분이 끝났다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할 수도 있죠.
가족과 직장, 즉 가족의 관심의 중심이 되거나 집이나 직장에서 일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책임자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함의 주요 원천일 수 있지만, 가족과 직장이 우리를 하찮고, 중요하지 않고, 평가 절하되고,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반대 시나리오도 펼쳐질 수 있대요.
세상이 당신을 중요한 존재로 대하지 않을 때, 장기간의 정서적 방치를 겪었거나 노숙자를 경험하는 인구 증가와 같은 소외된 집단의 일원일 때, 당신은 요크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고든 플렛이 "외로움과 중요하지 않음의 '이중 위험'"이라고 부르는 것에 취약해진대요. 플렛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건강과 웰빙에서 "중요하지 않음"의 역할에 대해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낮은 자존감뿐만 아니라 낮은 외향성, 감소된 능력감, 자기 관여에 대한 무능력 또는 무관심, 더 높은 신경증 및 불안정한 애착 스타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대요.
2021년 연구에서 플렛은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기 쉬운 사람들은 "저는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어" 및 "저는 경청할 가치가 없어"와 같은 생각을 내면화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보내는 부정적인 반응과 반응에 취약하고 잠재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일 것"이며 "방어적인 동기 부여 지향과 부정적인 상호 작용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어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대요.
다시 말해, 중요함의 부족은 고립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 외로움은 스스로를 더욱 외롭게 만들 수 있죠. 우리가 가장 허물어야 할 때 벽이 올라가는 거죠.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면 사회적 기여감을 주는 활동에서 물러서게 되죠.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하지 않으면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거예요. 그 연구에서 중요함 수준과 외로움 사이의 상관관계는 강했대요. 중요함에 대한 당신의 감각이 증가함에 따라 외로움은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더 이상 줄 것이 없다는 느낌보다 더 큰 고통은 없을 거래요.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가 그런 식으로 느끼게 하거나 그런 식으로 느끼게 만들 때마다 우리는 그들에게 실패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중요하고 유용할 수 있대요.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돌보는 일을 여성에게 맡겨왔죠. 그것은 부당한 부담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나머지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죠. 연결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 실패 또는 상실의 순간에 스스로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는 것이래요. 그런 순간에 우리는 친절하고, 돌보고, 지지하고, 도움이 될 수 있고 복잡한 상호 의존의 그물에서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거죠.
실천 계획!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참여하고 돕기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하고 요청이나 초대를 받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고통받고 있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래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손을 내미세요. 그들을 보고, 당신 자신도 보이는 거죠.
제 친구가 어렸을 때 그녀의 엄마가 해준 훌륭한 삶의 조언에 대해 이야기해줬대요. 그녀는 제 친구에게 모두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부엌에서 도울 일이 있는지 묻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했대요. 그냥 싱크대로 가서 설거지 솔을 들고 닦기 시작하라고요. 기본적으로 그녀는 당신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묻는 것은 모든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던 거죠. 그냥 바로 일어나서 뛰어드세요. 참여하라고요. 그러면 당신은 항상 기여하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당신은 더 큰 무언가의 일부라고 느끼게 될 것이라는 거죠.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러한 권고는 항상 저에게 중학교 댄스 파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대요. 소녀들과 소년들은 체육관의 반대편에 서 있었죠. 음악이 나오지만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대요. 우리가 신경질적으로 서로를 곁눈질하는 동안 우리는 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