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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culating...

아, 여러분, 오늘은 기업의 흥망성쇠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볼까 해요. 음... 그 '기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에서 왔대요. 진짜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심지어 고대 로마 시대에도 비슷한 게 있었다니까요? 런던 금융 지구를 관리하는, 그 City of London Corporation 있잖아요. 거기는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대요. 1067년에 윌리엄 정복왕한테서 특허장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 그때 이전부터 이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죠. 신기하죠?

옛날에는 길드 같은 게 있었잖아요. 은세공인 조합, 생선 장수 조합, 빵집 조합, 양조장 조합… 이런 데서 자기들끼리 규칙도 만들고, 제자도 키우고, 품질 관리도 하고, 가격도 정하고 그랬대요.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었고, 독점 권한 같은 것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그런 길드나 조합 같은 게 남아있기는 한데, 그냥 뭐랄까… 식사 모임 같은 걸로 변질된 경우가 많죠. 물론 좋은 일도 많이 해요. 자선 활동도 하고. 그런데 Fishmongers' Hall에 진짜 생선 장수가 있을 리는 없잖아요? 하하. 아, 근데 진짜 웃긴 건 2019년에 거기 벽에서 뿔고래 엄니를 꺼내서 테러범을 때려잡았대요! 어이구, 세상에... 범죄자 재활 컨퍼런스에서 두 명이나 죽인 놈이었다는데, 참 별일이 다 있죠?

근데 있잖아요, 기업의 핵심은 뭐냐면, 자산을 소유하고 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그게 특정 개인의 재산이 아니라는 거예요. 즉, 법적으로 사람처럼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다는 거죠. 이걸 '법인격'이라고 하는데, 현대 기업법의 중요한 부분이에요. 기업의 규칙에는 목적이랑 회원 자격 같은 게 다 정해져 있고요. 회원들 중에서 소규모 그룹을 뽑아서 경영을 감독하게 하는 거죠.

16세기부터 유럽 사람들이 배를 타고 세계를 탐험하면서, 투자도 많이 하고 위험도 감수해야 하니까 기업을 만들기 시작했대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동인도 회사에 특허장을 줘서 동남아시아랑 무역을 하게 했고, 네덜란드도 암스테르담 상인들한테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라는 회사를 만들게 해서 향신료 제도에 투자하게 했대요.

원래는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회사라고 불렀는데, 동인도 회사처럼 특별한 법적 지위를 얻으면 기업이 되는 거죠. 그 지위에는 보통 "유한 책임"이라는 중요한 혜택이 포함되어 있었대요. 즉, 사업이 잘못돼도 자기 돈으로 다 갚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하지만 이런 특권은 왕의 허락이나 의회의 법률 같은 특별한 승인 과정이 필요했대요.

1606년에는 제임스 왕이 버지니아 회사랑 플리머스 회사에 특허장을 줘서 북미를 식민지화하게 했어요. 근데 이 회사들은 돈을 잘 못 벌었대요. 버지니아에 금이 많을 거라고 광고했지만, 실제로 금은 없었거든요. 결국 왕실이 직접 식민지를 관리하게 됐죠. 그래도 하버드 코퍼레이션은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고 자랑한대요. 1650년에 매사추세츠 식민지 의회에서 특허장을 받았다고 하네요.

17세기에는 왕이 여러 기업에 특허장을 줬는데, 식민지 사업도 있었고, 왕당파를 지지한 대가로 독점권을 준 경우도 있었대요. 그런데 이 기업들의 운명은 제각각이었죠. 제임스 왕은 스코틀랜드랑 잉글랜드를 합쳤지만, 의회는 합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스코틀랜드 회사가 파나마 지협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돈을 엄청 잃고, 결국 잉글랜드랑 스코틀랜드가 완전히 합쳐지게 됐대요.

18세기 후반에 네덜란드가 영국한테 식민지를 뺏기면서 VOC는 망했지만, 동인도 회사는 계속 커져서 19세기 전반에는 사실상 인도를 지배했대요. 그러다가 1857년에 인도 반란이 일어나고 (인도 사람들은 이걸 독립 전쟁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동인도 회사는 사실상 국유화되면서 무역 회사로서의 기능을 잃었대요. 얼마 후에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여제가 됐고, 식민지화는 개인 사업이 아니라 공공 사업이 된 거죠.

그... 눈에 보이는 자산에 대한 권리를 나타내는 증권을 사고파는 건 꽤 오래된 생각이에요. 실크로드를 따라다니던 상인들은 돈을 들고 다니는 대신 어음을 썼고, 기업의 주식은 기업의 자산, 즉 배나 화물, 설비 같은 것들을 건드리지 않고도 사고팔 수 있었죠. 주식의 수익은 사업의 성공 여부에 따라 달라지고요.

은행권도 원래는 은행 금고에 있는 금에 대한 청구권이었잖아요. 그런데 은행들이 곧 금보다 더 많은 돈을 발행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대요. 그래서 은행이 '돈을 창조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이걸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제대로 운영되는 은행은 자산이 부채보다 많아야 해요. 그냥 허공에서 돈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는 거죠. 금고에 있는 금의 현대판은 뭐냐면, 은행이 빌려준 대출이에요. 예전에는 이 대출로 집이나 사무실, 공장 같은 유형 자산을 샀는데, 마법이 있다면 그건 만기 전환의 마법이죠. 모든 예금자들이 동시에 돈을 돌려달라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은행은 단기로 돈을 빌려서 장기로 빌려줄 수 있는 거예요.

로이즈나 바클레이즈 같은 영국 은행들은 17세기 마지막 10년 동안에 세워졌고, 점점 사업 범위랑 고객층을 넓혔대요. 1690년대에는 잉글랜드 은행(지금의 영국 중앙은행)이랑 스코틀랜드 은행도 세워졌는데, 스코틀랜드 은행은 2008년에 망해서 로이즈가 인수했죠. 상업 은행들은 국제 무역에 관여하면서 조금 늦게 나타났어요. 바링스 은행은 독일 이민자의 두 아들이 1764년에 세웠고, 1798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은행가인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아들 나탄을 런던으로 보내서 은행을 세우게 했대요. 이게 로스차일드 가문의 상징인 '다섯 개의 화살'의 시작이죠. 런던 지점은 나폴레옹 전쟁 때 번창했는데, 워털루 전투 결과를 미리 알아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 바링스나 로스차일드 같은 은행들은 증권 시장을 전문으로 다뤘고, 현대 투자 은행의 시초가 된 거죠.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는 1602년에 VOC가 자기 회사 주식을 거래하는 장소로 만들었고, 20년 후에는 다른 회사들도 거기서 증권을 팔 수 있게 해줬대요. 커피숍이 철학적인 사색의 장소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옥스퍼드의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Grand Coffee House는 영국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주장하더라고요. 그런데 커피숍은 금융 투기의 장소이기도 했대요. 1660년에 왕정 복고가 되면서 청교도들이 도박에 저항하는 힘이 약해졌거든요. 1680년에 조너선 마일스가 런던 시에 연 커피숍에서는 왕실 부채뿐만 아니라 기업 주식도 거래했대요. 조너선 커피숍은 오늘날 런던 증권 거래소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근처에 있던 에드워드 로이드의 커피숍은 런던 보험 시장의 기원으로 인정받고 있죠.

미국 독립 선언이 있은 지 3년 만에 맨해튼 상인들이 증권 거래 장소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월스트리트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모여서 뉴욕 증권 거래소를 세웠대요. 19세기 전반기의 철도 붐은 주식 소유가 널리 퍼지고 익명으로 거래하는 시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됐고요.

이라크에서는 2004년에 연합 과도 행정부가 해산된 후에 이라크 관리들이 전자 거래 시스템을 구축하고 미국처럼 증권 거래 위원회를 만들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화이트보드에 다섯 개 상장 주식의 가격을 적는 관행으로 돌아갔대요. 헐...

기업 주식의 유통 시장이 생기면서 투기나 사기 같은 일도 많이 일어났대요. 1720년쯤에는 투기 열풍이 불었죠. 영국에서는 남해 버블 사건이 터졌고, 스코틀랜드 출신의 살인자이자 사기꾼인 존 로는 파리로 도망쳐서 엉뚱한 화폐 이론이랑 사기적인 미시시피 회사를 홍보했대요. 그 후 100년 동안 기업 설립이랑 홍보에 대한 엄격한 제한이 가해졌다고 하네요.

하지만 딱 100년 동안만 그랬대요. 철도는 경제 생활의 거의 모든 면을 바꿨고, 사업 조직이랑 생산 조직도 바꿨죠. 초기 철도는 주로 지역 사업가들이 자기들 사업에 빠르고 믿을 수 있는 운송 수단이 필요해서 만들었는데, 왕이나 정부에서 기업 특허장을 받았대요. 철도 건설은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기 때문에, 사업가들이나 부자들이 돈을 내고 주식에 대한 배당금을 약속받았죠. 예를 들어,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는 브리스톨 상인들이 런던으로 빠르게 연결하고 싶어서 만들었고, 젊은 엔지니어인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을 고용해서 건설을 감독하게 했대요.

조지 엘리엇의 소설 "미들마치"에는 철도가 곧 도착할 거라는 소식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데, 소설은 1829년부터 1832년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대요. 리버풀의 국회의원이자 전 내각 장관이었던 윌리엄 허스키슨이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철도 개통식에서 선로에 서 있다가 기관차에 치여 죽은 사건은 기회와 위험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엘리엇의 가상 인물인 칼렙 가스는 새로운 철도 노선 부지를 측량하는 과정에 휘말리게 되죠. 미국에서는 철도 발전이 더뎠지만, 결국 더 큰 영향을 미쳤대요. 1869년에 릴랜드 스탠퍼드가 금 못을 박아서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 완공을 기념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죠.

1840년대에는 철도의 경제적인 잠재력과 사회적인 영향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영국에서는 '철도 광풍'이 불었대요. 주가가 1845~6년에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런던과 버밍엄, 리버풀, 맨체스터를 연결하는 가장 큰 회사인 런던 앤드 노스 웨스턴 철도의 주가는 출시 가격이 100파운드였는데 250파운드까지 올랐다가 1840년대 말에는 110파운드로 떨어졌대요. 새로운 인프라는 영국 중산층의 저축으로 자금을 조달했고, 미국 철도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했다고 하네요. 딜로이트 회계 법인을 세운 윌리엄 딜로이트는 철도 붐 동안에 만연했던 사기 속에서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주주들을 안심시키는 과정을 만들어서 명성을 얻었대요.

샬롯 브론테는 "철도 패닉" 소식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작은 자본은 아직 줄어들지 않았다고 안심시켜줘서 기뻤죠. 요크 앤드 미들랜드 철도는 아주 좋은 노선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제 자신을 위해서는 제때 현명해지고 싶었어요. 최고의 노선조차도 지금처럼 오랫동안 프리미엄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주식을 너무 늦기 전에 팔고, 수익금을 더 안전하고, 지금은 덜 이익이 되는 곳에 투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여동생들을 설득해서 정확히 제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에밀리의 의견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을 해서 그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느니 차라리 손실을 감수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샬롯은 부분적으로만 옳았대요. 요크 앤드 (노스) 미들랜드는 '철도 왕' 조지 허드슨의 제국의 중심이었는데, 1849년에 주주 총회에서 허드슨은 사기꾼으로 밝혀졌고, 요크 앤드 노스 미들랜드에서 쫓겨났고, 결국 투옥을 피하기 위해 해외로 도피했대요. 이 이야기는 현대 암호화폐 '자산' 붐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해 버블 사건이랑 미시시피 회사 실패 이후에 가해졌던 제한은 점차 완화됐대요. 1856년에는 영국에서 법률이 통과되면서 사업가들이 왕실 특허장이나 특별법 없이도 유한 책임 회사를 설립할 수 있게 됐대요. 그냥 등록만 하면 됐죠. 프랑스랑 몇몇 미국 주에서는 이미 그런 법인 설립을 허용하고 있었다고 하네요.

많은 사람들은 유한 책임만 지고 심지어 회계 장부도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 기관이랑 거래하고 싶어할지 의심했대요. (1880년에 공인회계사 협회가 설립돼서 감사관을 교육하고 규제했지만, 20세기가 되어서야 대기업조차도 감사관을 고용해야 했대요.) 오버렌드, 거니 앤드 컴퍼니 은행이 1865년에 유한 책임을 채택하고 다음 해에 파산하면서 경제 침체를 유발했을 때 그런 의심은 더 커졌죠.

만기 전환의 마법은 너무 많은 예금자들이 동시에 돈을 돌려달라고 하면 사라질 수 있대요.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으면, 당신은 줄의 맨 앞에 서고 싶을 거예요. 이걸 '뱅크런'이라고 하죠. "이코노미스트" 잡지의 편집자인 월터 배저트의 중요한 기사에서는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는데, 이 개념은 21세기의 매우 다른 금융 환경에서도 살아남았고, 2008년에 배저트가 권고했던 방식과는 조금 다르지만, 충분히 활용됐죠.

하지만 은행 파산의 결과는 법인 설립의 진행을 막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거였대요. 1878년에는 국제적으로 확장해서 100개가 넘는 지점을 열었던 시티 오브 글래스고 은행이 파산했대요. 그 은행은 주주들의 무한 책임을 강조했는데, 1,800명의 주주들 중에서 80% 이상이 파산했죠. 시티 오브 글래스고 은행의 파산은 영국 소매 은행에서 무한 책임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대요. 몇 달 안에 이사들은 감옥에 갇혔고, 일부 논평가들은 2008년에 두 개의 주요 스코틀랜드 은행이 파산했을 때 결과가 매우 달랐다는 점을 지적했죠.

하지만 투기랑 사기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19세기 말에는 유한 책임 회사의 성장을 막을 수 없었대요. 철도에 자금을 지원했던 기업 구조는 은행업에도 사용됐고, 자원 탐사에도 자금을 지원했고, 결국에는 제조 회사로까지 확대됐죠. 1886년에 아일랜드 양조업체인 기네스가 기업 공개(IPO)를 한 것은 런던 증권 거래소에서 산업 회사의 대표적인 상장이었대요. 발행 주식은 엄청나게 초과 청약됐고, 주가는 개장하자마자 10파운드에서 16파운드로 올랐대요. 곧 아이베아 백작이 된 에드워드 기네스는 회사 주식의 65%를 팔아서 600만 파운드를 벌었고, 발행을 주관한 바링스 은행은 50만 파운드 이상을 벌었고, 발행을 주관한 바링스 가문은 발행 주식의 3분의 1을 영리하게 보유했대요.

에드워드(네드) 바링은 1885년에 19세기 후반 금융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귀족 작위를 받았대요. 하지만 그의 은행이 아르헨티나에서 큰 손실을 입으면서 남작 작위를 받고, 금융 쿠데타를 일으키고, 캐나다 태평양 철도 자금 지원에 기여한 공로를 기념해서 도시 이름(레벨스토크)까지 얻었던 그의 성공은 5년 만에 무너져 버렸죠. 바링스 은행은 아르헨티나에서 큰 손실을 입은 최초의 금융 기관 중 하나였지만, 마지막은 아니었어요. 바링스 은행은 잉글랜드 은행에 의해 구제됐지만, 그 은행은 무한 책임 파트너십이었대요. 최근에 귀족으로 승격된 그의 시골 영지와 메이페어 타운하우스는 채권자들에게 갚기 위해 팔렸다고 하네요.

1890년의 몰락 이후에 바링스 은행은 유한 회사로 재건됐지만, 런던과 뉴욕의 다른 투자 은행들은 그 후 100년 동안 파트너십으로 남아 있었대요. 그래서 1995년에 바링스 은행이 다시 파산했을 때('불량 거래자' 닉 리슨의 사기 때문에), 주주들은 투자를 잃었지만, 후세의 바링스 가문이 소유한 옥스퍼드셔의 우아한 조지아 바로크 양식의 저택은 여전히 그 가문에 남아있대요.

20세기에 걸쳐서 금융 경영 실패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졌대요. 리먼 브라더스의 CEO였던 딕 풀드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일으킨 장본인인데, 1년도 안 돼서 새로운 자문 회사를 열고, 그 개업식에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라는 글귀를 걸었대요. 하지만 전설적인 투자자인 존 템플턴 경이 남긴 "투자에 있어서 가장 비싼 네 단어는 '이번에는 다르다'이다"라는 격언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아요.

기업을 규제하는 법률의 세부 사항은 나라마다, 심지어 미국 주마다도 상당히 다르대요. 오늘날 전 세계에는 LLC(유한 책임 회사, 미국), Inc.(주식회사, 미국), PLC(공개 유한 회사, 영국), SARL(유한 책임 회사, 프랑스), AG(주식회사, 독일) 등 약간씩 다른 법적 형태를 설명하는 약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죠. 사업 구조를 선택할 때 중요한 요소는 개인 책임 제한, 보고 의무, 적용되는 세금, 그리고 사업에 소수의 주주만 있는지 아니면 더 많은 주주가 있는지, 주식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계획이 있는지 여부라고 하네요.

유럽 위원회는 EU 전반에 걸쳐서 어느 정도의 공통성을 추구했고, 대규모 사업의 행위는 당연히 공익의 문제라는 원칙을 명시한 공익 법인이라는 개념을 유용하게 만들었대요. 하지만 그 아이디어의 적용은 회원국의 손에 달려 있어서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유럽 기업은 이제 Societas Europaea로 등록할 수 있고, 에어버스 SE는 현대 유럽 회사의 전형이지만, 제목에 라틴어를 사용해야 했다는 사실은 대륙 전체의 해결책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corporation'이랑 'company'라는 단어는 오늘날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책에서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사용할 것 같아요. 미국 영어에서는 'corporation'을 선호하고, 영국 영어에서는 'company'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요.

사업 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고도 사업 주식을 사고팔 수 있게 해주는 시장성 있는 증권이랑, 유동적인 저축으로 장기 투자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만기 전환이라는 두 가지 발명품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대요. 그게 없었다면 국제 무역이 어떻게 발전하고, 산업 혁명이 어떻게 일어났고, 철도와 같은 현대 경제에 필수적인 인프라가 어떻게 건설됐을지 상상하기 어렵겠죠.

19세기에 영국과 그 제국은 세계 산업계를 지배했지만, 독일과 미국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그 리더십은 점점 도전을 받게 됐대요. 1860년대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지배 아래 독일을 통일했고, 산업화는 계속 가속화됐죠. 도이치 은행은 1870년에 산업가인 베르너 지멘스를 이사 중 한 명으로 해서 베를린에 설립됐대요. 독일에서는 주식 시장이 아니라 은행 시스템이 대중의 저축을 산업에 투자하는 주요 통로였고, 지금도 그렇다고 하네요. 지멘스가 1897년에 주식을 공개했을 때 그 목적은 에드워드 기네스처럼 창업자들이 보유 지분을 현금화하는 게 아니라 사업 확장을 위한 자본을 조달하는 거였고, 대부분의 새로운 자본은 은행에서 조달했대요. 오늘날에도 독일 은행 산업의 주류는 도이치 같은 국제 은행이 아니라, 주에서 지원하는 란데스방켄과 대부분의 독일 도시에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지역 저축 기관이라고 하네요.

미국은 존 D. 록펠러(석유),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철도), 앤드루 카네기(철강), 제임스 듀크(담배) 같은 '강도 귀족'들이 경쟁자들을 매수해서 독점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던 '도금 시대'에 접어들었대요. 그들은 E. H. 해리먼과 제이 굴드 같은 금융가들의 도움을 받았고요. 그들은 가격을 정하는 힘, 산업의 미래를 결정하는 힘, 노동자들과 정부에 명령하는 힘을 원했대요. 그들은 끊임없이 확장되는 제국이 규모의 경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대요.

하지만 당대 최고의 은행가는 J. P. 모건이었죠. 기네스 상장에서 바링스의 금융적 성공은 모건이 1901년에 카네기 철강이랑 다른 여러 사업체를 합병해서 US 스틸을 만들었을 때 가려졌대요. 그 결과 만들어진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가 됐고, US 스틸은 뉴욕 증권 거래소에 14억 5천만 달러의 시가총액으로 데뷔했대요. 모건과 그의 동료들의 수익은 1억 달러를 조금 넘었는데, 현대 기준으로도 이 액수는 놀라울 정도라고 하네요. 특히 가장 큰 기여자(또는 피해자)가 앤드루 카네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 그렇대요. 65세였던 카네기는 사업에서 은퇴해서 남은 생애를 자선 활동에 바치기로 하고, 힘든 거래를 하는 데 관심이 없어졌고, 상장으로 4억 5천만 달러를 챙기는 데 만족했을지도 모르죠.

반독점법(최초의 법령은 1890년의 셔먼 법)의 도입은 독특한 미국 현상이었대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시대의 가장 큰 영국 회사들의 이름은 임페리얼 담배, 유나이티드 알칼리, 칼리코 프린터 협회, 연합 포틀랜드 시멘트 제조업체처럼 회사를 운영하려던 사람들의 의도와 야망의 규모를 증명하죠. 미국 사업의 국제적인 성공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럽 정부는 경쟁보다 통합을 더 선호했대요. 저명한 경영사학자인 레슬리 한나는 영국 정부(영국 은행으로 대표됨)가 선호했던 산업 '합리화'가 새로운 '기업 경제'의 무대를 마련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수십 년 동안 영국의 특징이 될 것이라고 하네요. 1920년대에는 합병을 통해서 ICI(화학), 디스틸러스 컴퍼니(스코틀랜드 위스키), 유니레버(비누와 마가린)가 만들어졌고, 독일에서도 비슷한 합병 물결이 일어나서 IG 파르벤과 페어아이니히테 슈탈베르케가 각각 지배적인 화학 및 철강 생산 업체가 됐지만, 이 두 회사는 모두 1945년에 승전국에 의해 해산됐대요.

카네기와 모건에 의한 US 스틸 통합은 독점 금지론자들에게 살아남았지만,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그렇지 못했대요. 그 후의 성과 차이는 두드러지는데, US 스틸이 설립된 지 120년 후에 일본의 닛폰 스틸은 주주들에게 141억 달러를 제안했고, US 스틸이 오랫동안 주요 구성 요소였던 다우존스 지수는 300배나 상승했대요. 스탠더드 오일의 분할로 탄생한 30개 이상의 회사들은 번성했고, 엑손모빌(뉴저지와 뉴욕 자회사에서 기원)은 세계 최고의 회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오랫동안 살아남은 회사라고 하네요.

철도, 공장의 기계 동력, 법인 설립 제도, 공공 자본 시장. 이러한 요소들이 함께 작용해서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었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고, 새로운 세기에는 자동차와 전기라는 혁신적인 발명품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 것이라고 하네요.

많은 기업가들과 엔지니어들이 사회를 변화시킬 자동차의 잠재력을 인식했는데, 헨리 포드도 있었지만, 앙투안 카딜락, 월터 크라이슬러, 랜섬 올즈도 있었고,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칼 벤츠, 윌리엄 모리스, 루이 르노도 있었다고 합니다. 태동기에 있던 자동차 산업은 합리화론자들과 통합론자들의 관심을 피할 수 없었고, 빌리 듀런트는 뷰익 회사를 인수해서 많은 경쟁사들과 공급 업체를 인수하는 기반으로 사용했대요. 1909년 한 해에만 그는 카딜락, 올즈모빌, 폰티악을 자신의 브랜드 라인업에 추가했죠.

세일즈맨이자 거래 성사 능력은 사업 운영 능력보다 뛰어났고, 그의 인수 자금을 지원했던 은행들은 현금이 부족한 회사를 장악하고 듀런트를 해고했지만, 그는 쉐보레를 인수하고 포드의 모델 T에 필적하는 차량을 개발해서 반격했고, 이 상업적인 성공으로 듀런트는 제너럴 모터스의 경영권을 되찾았대요. 하지만 1920년에는 회사가 다시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했고, 듀폰 화학 가문의 일원이자 회사의 최대 주주였던 피에르 뒤퐁은 다시 한번 듀런트를 회사에서 몰아냈고, 그의 롤러 베어링 사업이 제너럴 모터스에 인수되면서 제너럴 모터스에 합류했던 앨프레드 슬론은 뒤퐁의 지원을 받아서 1923년에 듀런트의 다루기 힘든 제국을 관리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회사의 사장이 됐대요. 성미가 까다롭고 독재적인 헨리 포드를 더 이상 위해 일할 수 없었던 빌 크누센의 도움으로 GM은 주요 경쟁사를 제치고 미국 최고의 자동차 회사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제조 회사가 됐다고 하네요.

1940년대 영국의 국유화 프로그램은 많은 경우에 이미 존재했던 공공 소유 및 통제보다 통합에 더 중점을 뒀다는 사실을 자주 잊혀지는데, 영국 철도청, 중앙 전력 생산청, 국립 석탄청의 이름은 중앙 정부의 지시가 주요 목표였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1920년대처럼 전후 국제 무역의 성장은 1960년대 영국에서 국가 지원 통합 시대를 자극했고, 산업 재편 회사를 설립한 데 이어서 다소 모순적인 국가 기업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산업 재편 회사의 세 가지 대표적인 성과는 모든 주요 생존 자동차 회사를 브리티시 레일랜드로 합병하고, 모든 영국 컴퓨터 이익을 ICL로 흡수하고, 주요 전기 회사를 제너럴 일렉트릭 컴퍼니(GEC)로 통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국제 경쟁에 대한 해답은 국내 규모였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대요. 자동차 대표 기업인 브리티시 레일랜드는 1974년에 무너져서 국유화됐고 결국 해체됐고, 컴퓨팅 대표 기업인 ICL은 1981년에 실패해서 일본 제조업체인 후지쓰에 흡수됐고(제가 글을 쓰는 시점에서 영국의 가장 비난받는 회사는 결함 있는 우체국 회계 시스템의 희생자들을 박해하는 데 있어서의 역할 때문이라고 하네요), 전기 대표 기업인 GEC는 22장에서 설명된 2001년 해체까지 살아남았대요.

국가 기업 위원회도 효과적이지 못했는데, 브리티시 레일랜드에 대한 성공적이지 못한 투자 및 확장 계획과 함께 공작 기계(앨프레드 허버트, 1983년 실패), 반도체(인모스, 1989년 프랑스 및 이탈리아 정부가 공동 소유한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에 매각), 가전 제품(싱클레어 라디오닉스, 1980년 실패)에서 국가 챔피언을 육성했다고 하네요. 회사의 RB 211 항공 엔진의 엄청난 비용 초과로 1971년에 공공 소유로 넘어간 롤스로이스만 성공적인 회사로 살아남았고, 상징적인 자동차 브랜드는 BMW에 매각됐지만 (이후 민영화된) 항공 엔진 부서는 오늘날 세계 3대 주요 생산 업체 중 하나라고 하네요.

대량 생산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많은 상품들이 국경을 넘어 거래될 수 있었고, 세계화는 철강, 석유, 소비재와 같은 거래 가능한 상품에서 국제 경쟁을 이끌었고, 세기의 전반기에는 보호 무역 로비가 이러한 시장 개방에 저항하려고 시도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확립된 세계 경제 시스템은 제조 상품의 자유 무역을 장려했다고 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국제 무역의 일반적인 패턴은 원자재가 제조 상품과 교환되는 것이었지만, 20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국제 무역이 산업 경제가 제조 상품(그리고 점점 더 많은 서비스)을 서로 교환하는 것을 나타냈다고 하네요.

사업가와 사업 비판가 모두 규모의 이점을 과장하고, 규모의 이점은 기술적이고 눈에 띄지만, 단점은 대부분 인간적이고 즉시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네요. 가격 결정력이 경쟁으로 침식되지 않으면 규제가 일반적으로 뒤따르고, 대규모 조직은 집단 지성의 발전과 새로운 비즈니스 방법 및 혁신적인 제품의 채택을 억제하는 기득권을 발전시키고, 우리는 랩톱 컴퓨터에 대해서 IBM이 아니라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에 감사해야 하고, 스마트폰에 대해서 AT&T와 버라이즌이 아니라 애플에 감사해야 하고, 전기 및 자율 주행 자동차를 개척한 것에 대해서 제너럴 모터스가 아니라 테슬라에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1920년대에는 제너럴 모터스가 미국에서 포드와 크라이슬러와 시장 리더십을 놓고 경쟁했고, 유럽에서는 오펠과 복스홀 자회사를 통해서 경쟁했지만, 결국 산업 혁명을 경험하지 못했던 나라에서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던 회사들에게 선두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하네요. 영국의 소비자들은 오늘날 독일에서 만든 포드, 스페인에서 만든 폭스바겐, 한국에서 만든 현대, 선덜랜드에서 만든 닛산을 살 수 있고, 캘리포니아에서 설계하고 중국에서 조립한 스마트폰 또는 한국에서 설계하고 베트남에서 조립한 스마트폰 중에서 선택할 수 있으며, 이 모든 상품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네요. 이야, 진짜 세상 많이 변했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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